꽃 지는 저녁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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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다소나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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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마음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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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
네가 준 꽃다발을
외로운 지구 위에 걸어놓았다
나는 날마다 너를 만나러
꽃다발이 걸린 지구 위를
걸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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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에 대하여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깎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
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
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
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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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너와 처음 만났던 도서관 숲길이다
아니다
네가 처음으로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버스 종점이다
아니다
버스 종점 부근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가지 위의 까치집이다
아니다
네가 사는 다세대주택 뒷산
민들레가 무더기로 피어나던 강아지 무덤 위다
아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피었다 진 원추리의 이파리다
아니다
외로운 선인장의 가시 위다
아니다
봉천동 달동네에 사는 소년의 똥무더기 위다
아니다
초파일 날
네가 술을 먹고 토하던 조계사 뒷골목이다
아니다
전경들이 진압봉을 들고 서 있던 명동성당 입구다
아니다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던 너의 입술 위다
그렇다
누굴 사랑해본 것은 네가 처음이라고 말하던
나의 입술 위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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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회
그대와 낙화암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잡고 떨어져 백마강이 되지 못했는지
그대와 만장굴에 갔을 때
왜 끝없이 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서귀포 앞바다에 닿지 못했는지
그대와 천마총에 갔을 때
왜 천마를 타고 가을 하늘 속으로 훨훨 날아다니지 못했는지
그대와 감은사에 갔을 때
왜 그대 손을 이끌고 감은사 돌탑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대와 운주사에 갓을 때
운주사에 결국 노을이 질 때
왜 나란히 와불 곁에 누어 있지 못했는지
와불 곁에 잠들어 별이 되지 못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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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눈
지상에 내리는 눈 중에서
가장 어여쁜 눈은 자국눈이다
첫사랑처럼
살짝 발자국이 찍히는 자국눈이다
어머니 첫사랑 남자를 만날 때마다
살짝살짝 자국눈이 내렸다지
그 남자가 가슴에 남긴 발자국이
평생 자국눈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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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에
내가 너를 생각하는 줄
넌 모르지
떨어지는 별똥별을 바라보는 순간에
내가 너의 눈물을 생각하는 줄
넌 모르지
내가 너의 눈물이 되어 떨어지는 줄
넌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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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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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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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꽃
얼마나 착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으면
죽어서도 그대로 피어 있는가
장미는 시들 때 고개를 꺾고
사람은 죽을 때 입을 벌리는데
너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똑같구나
세상의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저 모습으로
우리 헤어져도 저 모습으로 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더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네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내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는가
또따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정 호승
그날의 노래
우리의 주검 위하여 묘비명을 세우지 말라
우리의 주검에서 보리꽃이 필 때까지
우리의 주검을 위하여 통곡하지 말라
우리는 결코 죽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보리꽃으로 웃으며 피어날 때까지
우리의 주검을 그 차가운 땅속에 묻어 두지 말라
비가 오면 이대로 봄비에 젖게 하고
눈이 오면 이대로 흰 눈 속에 묻히게 하라
우리는 지금 가을 밤하늘을 바라보며 당당히
별과 눈물과 자유의 밤을 그리워하노니
보릿대에 묻은 그날의 핏자국을 생각하노니
우리의 주검을 위하여 묘비명을 세우지 말라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 위에
우리의 주검을 던져
날마다 푸른 새들이 날아와 쪼아먹게 하라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워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워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사람을 멀리하고 길을 걷는다
살아갈수록 외로워진다는
사람들의 말이 더욱 외로워
외롭고 마음 쓰라리게 걸어가는
들길에 서서
타오르는 들불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고독하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면
어둠 속에서 그의 등불이 꺼지고
가랑잎 위에는 가랑비가 내린다
푸른 애인
푸른 하늘 아래 너는 있다
푸른 하늘 끝 어딘가에 너는 있다
나는 오늘도 사는 일과 죽는 일이 부끄러워
비 오는 날의 멋새처럼 너를 기다려도
너는 언제나 가랑비처럼 왔다가 사라진다
푸른 땅 아래 너는 있다
푸른 땅 끝 그 무덤 속에 너는 있다
사는 것이 죄인 나에게
내가 산다는 것이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인 이 밤에
너는 언제난 감자꽃처럼 피었다 진다
비오는 사람
그대 빈 들에
비오는 사람
술도 집도 없이
배고픈 사람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
떠나가는 사람들의
옷 적시는 사람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더니
빈집에 새벽부터
비 오는 사람
강변역에서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 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 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없이 지나갔다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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