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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스크랩]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 이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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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제 여름은 갔다.

비계 많은 사람들이 산이며 바다로 자가용을 몰아대면서 시인에게 열등감을 심어주었던 여름은  갔다

 

죄 없고 마음 청명한 사람들의 가을이 온다.

가을에 우리는 눈물을 참는 법을 배우자.

혹독한 추위 속에서 만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굳게 껴안을 준비를 하자.

봄과 여름은 마음이 녹슨 자들의 것.

가을과 겨울은 외로운 시인들과 착한 사람들의 것이다.

 

사랑이란 애초에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지난여름 그 방황들 속에서 이미 알았고.

지금 내가 이렇게 추위 속을 헤매는 것는,

내 가슴 안에  환상이라도 하나 만들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혼자 마음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진실한 자는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고,

눈물이 남아 있는 자에게는 고통을 굳게 껴안을 순수가 남아 있다.

 

 

가을,

 

가을은 마당을 잘 쓸어놓고 누군가를 기다려보는 계절.

그대 심장에 쓰라린 흔적을 남기고 돌아섰어도 끝끝내 그리운 사람이 있거든 기다려보라.

그 동안의 모든 진실한 말 잘 기억하여 돌아오면 돌려주리라. 미리 준비하라.

 

가을이 왔다.

사랑만 하다가 죽은 자의 아름다운 피처럼 사루비아 꽃이 우리 집 화단에서 피고 있다.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고 살갗이 아주 깨끗하게 소독되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가을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이 전율처럼 나의 혈관을 파고든다.

 

가을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우울한 계절이다.

가을에 모든 것은 텅 비게 된다.

가을에 모든 것은 내 곁에서 죽어간다.

나의 팔레트에는 물감들이 마르고 붓들은 모두 굳어서 방바닥에 뒹굴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맹목의 방황을 시작한다.

방황이라는 말은 듣기에는 유치하고 아무런 윤기도 없는 사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겼을 때의 쓰라림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다시금 돌아온 가을. 이 방황의 나이를 나는 어떻게 경영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가을이여.

아직 한 번도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는 순결한 여인 같은 가을이여.

씻어다오.

우리 마음의 때를, 매연을, 우울을, 빚진 자의 근심을---.그러나 더욱 모질게 기억하도록 해다오.

가난에 찌들리면서 시를 쓰다가 거룩한 행적도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외롭게 죽어간 어느 젊은 시인의 시 한  줄을.

부질없는 한 장 달력처럼 펄럭이면서 떨어져나간 그 허망한 생애를.

 

 

여행을 떠나고 싶다.

그 짙은 안개의 도시로.

그리고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쯤 돌아올지 아직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거기 아직도 남아 있을 것 같은 내 어두운 남들의 흔적을 모두 지울 수만 있다면

나는 우울증을 조금은 치료하게 되는 셈이다.

이 가을 귀밑머리를 스쳐가는 한 가닥 바람, 뜨락에 괴는 식은 금색 햇빛,

눈물겹게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밭, 들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그대의 빛나는 시를 위해 하느님이 장만해 준 은혜이기를.

 

벌써 가을이었다.

은행잎들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은행나무들이 순금빛 해의 비늘들을 눈부시게 털어내고 있었다.

플라타너스 이파리들은 이미 녹물이 들어 오그라든 채로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노인들이 기울어지는 시간속을 걸어와 가을 유배자들처럼 쓸쓸히 고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추수와 타작이 모두 끝나버린 늦가을 해거름녘, 벌판은 텅 비어 있었다.

논바닥 가득 흐린 석양빛만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이따금 북쪽 하늘 어딘가로부터 갈까마귀 떼들이 새까맣게 나타나서는

끼야끼야 시끄럽게 우짖어대며 남쪽 하늘 끝으로 한정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만약 날개를 가질 수만 있다면----.

 

 

 

 

세월이 정박해 있었다.

정박해 있는 세월 속으로 이따금 바람이 스쳐갔다.

은백양나무숲이 흔들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파리들이 새떼처럼 날아와 창문을 어지럽혔다.

때로는 쇠그물에 부딪혀 감전당한 듯 날개를 푸득거리다가 추락하는 놈들도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었다.

가을이 저물고 있었다.

 

뼈에 금이 가는 듯한 고독.

뭐 그런 것뿐임.

정말 여자가 필요함.

진심으로 사랑할 것임.

오늘 마지막 가을비 싸늘하게 내렸음.

갑자기 살갗을 휩싸는 겨울 예감.

혼자 보내는 겨울이 가장 쓰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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