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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임종고백/구상

구상 시인은 마치 살아 있는 존재론적  형이 상학적  독보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는  이시대의 양심이었다

 

나는 늘 왜관을 지나는 철교를 볼떄 마다

나의 가족과

시인 구상의  삶을 흡모하며 동시대를 살은 얼굴  본적 없는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소문

그렇게 왜관은 늘 무언지   모를 이유로 싸아 싸아 가슴속    파도를 치는곳이다 육이오를 겪은 시인은 월남후 왜관에서  낙동강변에 사랑채를 짓고  관수재라고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닦는다 ...

물과 강을 사랑한 시인

 

시인이     타계  이태 전  칠곡군은 관수재를 복원하고

구상문학관을 지어 헌정을 했지만

시인은 생전에 단    한번도 그곳을 찾아 가지 않았다

 

자신이 젊어 왜관에 머물면서 베네딕도   수도원과 섬기는 하나님과

추억이 있는곳이나 그는 소장하고 있던 도서와 자료만 보내  애틋한 맘만 살짜기 보여준 그저

명예에 어디든 극복한 그런 시인이였다

이중섭은 오랜시간 구상과  같이 살면서 서로 삶을 의지하기도 했고

공초 오상순

구상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람위에 군림하지 않는 의식을 가진 폭넓은 교류를 통해 순수하고 고결했던

그의인품처럼

그렇게 가까이  자신의 하나님처럼 누구든 섬긴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임종고백은 글마다  참혹할 만큼 자신을 달굼질로 가득한 글을보면서

난 윤동주의 참회록 보다  더 심한 충격으로 읽었다

,,,,,,,임종고백,,,,,,

 

//나는 나의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 왔다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렐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기어 (  奇語 )조작에만 몰두 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 왔달까?//////////

 

나의 아버지의 본가는 왜관서 잠시 가면 있습니다

떄로 좋고 빠른 길 대구 성서로 가지 않고  왜관으로 가서 구상문학관에서 한나절을 보낼때도 있었습니다

육이오떄

 

나의할아버지는 왜관을 거쳐 인민군이 데리고 갔는데 이후로 생사 불명입니다

한떄는 좌익집안이라고 친정어머니의 외삼촌 이셨던 그분은

일본 동지사대를 유학하고 신혼인 아내를 두고

여섯번쨰 딸이였던 외할머니에게 잠시 와서

//누부 내 잠시 다녀오요 ...이말만 남긴채 그렇게 양복 저고리를 걸친채  잠시 간분이 여태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신혼이였던 새색시는 월북한 남편 을  맘에 품은채 평생 수절하고  부모를 봉양한후

유복자를 낳아 지금 까지 생존해 계십니다

외할머니는 남동생에게 터팔았다고  결혼할떄 종자소 과수원 전답  그야말로 여섯번쨰 딸로 태어나

친정으로 부터 극진히 대접받고 복을누렸지만

그렇게 훠이 훠이 손젓으며 사라진 남동생에 대한 그리움

왜관 다부동 근처 낙동강변에서 한번의꿈을 꾼후

//내동생 상욱아  누부다  내한데는 말해라 어디가서 죽었는지 ///그렇게  속이 타들어가

몇해전 소천하셨습니다

임종고백을 통해 시인의 순수함을 읽고 또읽으면

우린 생의 종지부를 찎을떄  자신의 잘한거만 기억할것 같은 이기심의 발로  덩어리라고 전 생각합니다

가끔 맘의 이기심으로 도저히 침잠하기 어려운 시간이면

전 이글을 가끔 읽어봅니다

마치 잠언의 글처럼 그렇게 서서이 맘이 정돈되면서

고결한 모습을 가진 구상시인이 떠오릅니다

왜관 근처에 가실일이 있으면

구상 문학관에 들러보세요

 

낙동강은 흐르고

아카시아 지천으로 피어 오월이면 우리나라 최대의 아카시아 산지인 왜관 지천면

그곳은 박팽년의 후손이 모여 절의를 지킨

그런 침묵의 님들이계신곳입니다

 

 

////////고백이란 심히 두렵습니다  때론 연극배우의 독백을 관객석에서 들을만큼 엄숙합니다

감히 내고백이 무서워 하지 못해 시인의 고백을 통해  맘을 달래보는 이상한 지성을 가진

저는 임종고백을 읽을때 마다 누가 나를 보는듯 해서 자리에서 빨리 일어나  방으로 가서 잠드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

 

임종고백 - 구상 -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知覺만으로도
내가 외면으로 지녀 온
양심, 인정, 명분, 협동이나
보험에나 들듯한 신앙생활도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綺語*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망측한 나의 참 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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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에서는 죽음에 임하게 되면 한평생 자신이 저지를 죄를
뿌리채 사제에게 고백하고 참회를 한다.
이 일생일대의 신앙고백이 바로 임종고백이다.
한때 가톨릭 사제를 꿈꾸었던 구상시인은

특이하게도 대학의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전공한다.
신앙의 뿌리는 가톨릭에 두고 있지만 그는

생전에 걸레스님 "중광" 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10년전 열반한 성철 큰 스님.
1993년 어느 늦가을 새벽 성철스님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상좌들을 부른뒤 "때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다음 일필휘지로 다음과 같은 임종계를 써내려 갔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치고 기어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일생동안 세상사람들을 속였다고 말하면서 열반에 든 성철스님과
한 평생 내가 나를 속였다고 미리 임종고백을 해둔 구상시인!
큰 인물들의 고백은 살아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