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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구상의 신앙고백 1

 

 

(차동엽신부의 구상시인에 대한 글)


1. 노시인 구상의 신앙고백 1


  답답하다.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이 다원주의의 시대에 내가 왜 그리스도인으로,

나아가 왜 가톨릭인으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먼저, 내가 왜 크리스천인가? 라는 이야기를 소박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의 신자이올시다.

어머니께서 가톨릭의 선각자 이 승훈 선생의 가문이었기에 저는 어려서부터 가톨릭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지각이 들기 이전,

소위 크리스마스 밤에 산타클로스가 머리맡에다 선물을 가져온다는

 설화를 그대로 믿었을 때 말고는,

철이 나면서부터는 가톨릭신자이기 때문에 평안 속에 있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많은 정신적인 고뇌 속에 있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입니다.

 그래서 저는 동경으로 유학 가서도 종교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불교의 나라이기 때문에 종교학 커리큘럼 중 절반 이상이

 불교경전에 대한 주석이었습니다.

그때 저의 고민은 신의 실재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와 아울러 신의 섭리라든가, 교리 자체 등에 대한 많은

 회의를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가톨릭신자였기 때문에

평안보다는 고뇌에 싸여 있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난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하며 극단적인 생각으로까지

치닫곤 했습니다.

그런데 유학 중이던 당시 제가 크게 위로와 위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20세기 노벨상 수상자의 한 분인 클로텔이라는 시인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그분은 제가 일본에 가지 직전까지 프랑스 주일대사를 지낸 인물로서, 열아홉 살엔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신비 체험을 했는데

 어느 정도 강렬한 체험인가하면 자기는 성서에 씌어진 것보다도 더 명백히 하느님을 체험했다고 증언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만일 그대들이 신을 참되게 알았을 때,

 신은 그대들에게 동요와 불안을 줄 것이다 고 했습니다.”

부처의 평안과 예수의 고뇌

평안이 아니라 동요와 불안을 주는 신, 그분이 시인께서 폴 클로텔을 통하여 알게 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자 가톨릭의 하느님이었다.



2. 노시인의 신앙고백 2


  “그리고 참된 의미의 크리스천이란 부전승한 듯한 자세의 신앙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것처럼 그분과 함께 사지가 찍어지는 아픔을 함께 견디고 참고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지가 찢어지는 아픔을 설명하기를 선과 악이 자기 안에서 잡아당기고, 사랑과 미움, 이성과 감정, 영혼과 육신이 자기 안에서 잡아당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요, 그 십자가를 메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 신자라는 것입니다.

 제가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 가 자문하면서 고뇌에 빠져 있을 때,

그 시인의 말이 그렇게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해탈과 십자가의 차이

  “석가모니나 노자, 장자 등은 인간에게 해탈이나 도통을 요구했지만 나자렛 예수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라는 물음에 너는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자신도 끝까지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 게쎄마니 동산에 올라가기 전,

제자들에게 나는 죽도록 괴롭다고 했던 말,

그리고 동산에서의 기도, 나의  이 잔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뜻에 맡긴다는 기도는 이렇듯 예수의 인간적인 고뇌를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예수님은 저들이 자기들이 하는 바를 모르고 있으니 모두 용서해주십시오 라는 초연한 말씀을 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줍니다.


 정말 나사렛 예수야말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고, 그 인간 자체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고 할 때 예수는 해탈이나

도통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아주인간적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편안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 스스로가 불안하고 고뇌에 차 있기 때문에

크리스천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물론 인간 자체의 영적인 능력에서 오는 신비 체험이나, 도통과 해탈과 같은 인간적 초연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 스스로는 그만한 그릇이 아니기에 초탈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이것이 저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동양종교에서 말하는 해탈, 도통, 초탈은

고통을 피하고 평안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여 사뭇 솔깃하게는 들리지만

그게 어디 범상한 그릇들에게는 가능한 길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꿈꾸기에는 인간 현실 처지가 갈등과 불안과

고뇌 투성 이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그런 고통의 현실 한 복판으로 들어가

 자신의 몫은 물론 남의 몫까지 대신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길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믿고 있다“  


                 (가톨릭신앙의 핵심이 장전되어 있음)


  이 피할 수없는 한계가 바로 원죄(욕망, 갈증, 고뇌, 고통, 불안, 허망)

의 소산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들을 송두리째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뒤따르는 삶에

필경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굳이 믿는다.

시인은 인간은 유한하기에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줄곧 자각한다.

 그리고 시인은 인간을 구원에로 이끌어주는 것은

 신령한 구원의 손길밖에 없음을 통감하며 믿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은총 이것이 시인이 궁극적으로 소망했던

 그 손길이었을 터이다.

시인은 구도자 보다 더 치열하게 종교의 본질을 탐구하셨고,

올바른 삶의 길을 모색하셨으며, 하느님을 향한 영성을 갈구하셨다.

그는 누구보다 민족성이 투철한 시인이시고

누구보다 가톨릭신앙을 공공연하게 고백한 시인이시다.

죄책감과 동시에 자긍심을 갖게 해주는 아이러니이다.



3. 노시인의 구도 여정


  “구상의 일생은 진리의 모색으로 설명될 수 있고,

그래서 그의 시는 그 길을 따라간 발자취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실 구상의 모색은 근본적으로 종교적 진리에 대한 것이었다.


 몇 년에 걸친 일본 유학 시절,

그는 동서양의 종교철학의 포괄적 표현과 현대 유럽 철학의

급진적 회의론과 절망을 접하고 충격과 함께 깊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 무렵의 충격을 통해서 비로소 그는 타성적이 아닌 신앙의 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그렇다. 깊은 의문 신앙이란 모름지기 그 의문의 늪을 통과해서

도달한 것일 때 그 진실성이 빛나는 법이다.

그래야 비로소 신앙은 타성을 벗어나다. 이런 것이 신앙이다.

신앙은 설령 집안에서 대물림으로 주어졌다고 해도

그것을 팔자처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신앙은 치열하고 까다로운 저울질을 통하여 검증받을 필요가 있다.


  “하느님은 계시고, 그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하느님이 사랑의 성품을 지닌 인격신이시다고 믿는

 가톨릭신앙이 옳은가,


아니면 우주 곧 천지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본래 있었고,

절대 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어서

 오랜 윤회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신적인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

 불교신앙이 옳은가?  

이 물음이 당시 청년 종교학도 구상을 줄곧 괴롭혀온 물음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밤과 낮고 오랜 세월을/ 그로부터 도망쳤다. /

내 마음이 얽히고설킨 미로에서/

눈물로 시야를 흐리면서 도망쳤다./


나는 웃음소리가 뒤쫓는 속에서/ 그를 피해 숨었다. /

 그리고 나는 푸른 희망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 올라갔다가/

그만 암흑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틈이 벌어진 공포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힘센 두 발이 쫓아왔다./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유유한 속도, 위엄 있는 긴박감으로/

 그 발자국 소리는 울려왔다./


이어 그보다도 더 절박하게 들려오는 한 목소리./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


(하늘이 사냥개.톰슨 작)


  “ 이 시인은 하느님을 하늘의 사냥개로까지 비유했습니다.

하느님은 마치 하늘의 사냥개처럼 아무리 달아나고 뿌리치고 숨어도

 자꾸 따라 온다고 했습니다.

시인 자신은 신을 멀리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도 따라오고 뒤쫓아 오고 벗어날 수 없는 하느님을

 마치 저주하듯 노래하고 있습니다.

 

4. 동시대인을 향한 노시인의 연민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 오리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가오리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십니다.


어둠 보고 이 몸 가려달라고 해보아도/

 빛 보고 밤이 되어 이 몸 감춰달라 해보아도/

당신 앞에서는 어둠이 아니고/

 밤도 대낮처럼 환 합니다/

 당신에게는 빛도 어둠도 구별이 없습니다.(중략)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습니다.“ 

(시편 139, 7-15)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신은 없다,

 신은 주었다는 감미로운 유혹에 덜컹 빠져들고 있는가.

그뿐인가.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하느님을 살해하여 매장해 버리고

 하느님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하느님 행세를 하려는 영적 반란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흙 속 지구의 이곳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여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이기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 난 배처럼/

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 달까? /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락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인류의 맹점에서)


  이 처럼 시방세계는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경합하는 가운데 중심과 방향도 잃고 흔들거리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온갖 도락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이것이 노 시인이 바라본 오늘날 세계의 모습이다.

시인은 이를 칠흑의 어둠이라고 잘라 말한다.


  노시인이 보기에 비극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사람들이 저마다 황금송아지에 사로잡혀 봐야할 것을 못 보는데 있다.

 사람들이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은 욕심에

 저 물질의 우상안에, 우주의 창조주요,

역사의 섭리자인 하느님을 가두어 둔 데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마다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떠느라고

 저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음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데 있다.

 아니 일부러 귀를 무언가로 틀어막는데 있다.

그리하여 저 톰슨 시인의 귓가에 뚜렷이 들려온 나(=하느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 저버림을 당하리라는 저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를 애써 흘려버리려는데 오늘을 사는 이들의 비극이 있다.

 이를 바라보는 시인의 심경이란 허허,

 저런 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5. 노시인이 노래하는 가톨릭 신앙


  그게 언제였는지는 모르되 시인께서는 처절한 싸움 끝에,

 오랜 방황과 모진 사상적 편력을 마치고서

 마침내 하느님의 품안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세월이 흐르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는 경지를 지나

 은총에 눈을 떠서 눈물까지 흘릴 만큼 되었다.


은총에 눈을 뜨니

“이제 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 일뿐이다.

이제 사 하늘이 새와 꽃만을 /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서 감사하노라“


냉철한 이성으로 생로병사에 깃든 영원의 편린을 꿰뚫어 보게 하였으며

천진의 감성으로 하늘의 보살피심에 눈물 흘리게 하였다.

이것이 노시인이 이즈음 노닐고 계신 신앙의 경지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가톨릭신앙의 진면목이다.



6. 노시인이 노래하는 가톨릭 신앙 2


 “죽음을 넘어 피안에다 피울

찬란하고도 불멸하는 꿈을 껴안고

백금같이 빛나는 노년을 살자.

        

아무리 오리무중과 같은 시대 속에서도 /

아무리 미혹과 방황의 표류 속에서도 /

아무리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도/

아무리 실패와 좌절의 수렁에서도/

아무리 파탄과 절망의 구렁 속에서도 /

아무리 풍랑과 격동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을 /

굳게굳게 믿으며 거기서 힘을 얻자.

그리고 그님이 우리의 육신 속에/

사람의 징표로 은혜롭게 심어주신 /

양심의 소리에 언제나 귀 기울이며 /

오늘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자.“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희망의 끈을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

그 궁극적인 까닭은 무엇인가?


 아무리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어도 우리의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에 그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노 시인이 염원하던 그 꿈의 동산에 대한 희망 때문인 것이다.

태초에 충만한 사랑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삼라만상을 영원한 축복으로 봉헌하신 하느님의 품,

그곳이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 희망을 우리는 현세도피요 내세지향의 신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엄연한 신앙의 실상이다.

현세의 삶 속에 이미 내세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 집착하지도 사로잡히지도 않되

그 안에 싹을 틔우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이 땅에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서부터 영원을 즐겁게 살자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꽃자리)

“앉은 자리가 /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우리가 노상 가시방석처럼 여겼던 시방 앉은 자리를

행복의 자리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로,

거룩하고 위대한 부르심의 자리로 모두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시방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7.환한 미소 지으며 영원으로 가신님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장례미사 봉헌)


“시나 글로써 우리 사회를 깨우쳐 주신 정신적인 원로,

마음과 사회를 밝혀 주시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명실 공히 가톨릭 시인, 즉 폐쇄적 종파에 갇힌 게 아니라

보편적이고 열려 있는 가톨릭의 본래 뜻에 합당한 시인,

넓고 깊은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신 분,

그분에게 있어 하느님은 자기 자신보다 더 가까이 계시고

자기 자신보다 더 자기를 잘 알고 계시는 분,

그래서 하느님을 숨 쉬지 않으면 단 하루도 살 수 없었던 분,

때로는 회의하고 고뇌하고 방황도 했지만

결국은 돌아올 고향을 지녔던 분,

부활을 철저히 믿고 매화 등걸을 바라보며

부활의 믿음에 취해 있다가 마침내 죽음에 동참하신 분“이라고

주님, 단 하루도 당신을 숨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요한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8. 구도의 시인, 영원 속으로

  구상 시인은 평소에 언급하기를 정신 작업자들이 영혼의 시련을 겪어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더하여 도고마성(높은 진리 주변에는 마귀가 들끓는다)고 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통찰에서 오는 말이다.


영혼의 시련(죽음의 시한이 전제된 운명, 죽음은 얼마나 아프고 무서운가,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나)

 구상 시인의 시 세계는 처음에 허무와 어둠에서 시작했다.


이어 그는 허무에서 긍정, 유한성에서 겸손, 신비에서 충만에 진입해 갔다.


그는 마침내 그래서 나는 죽고나서부터가 아니라 /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고 했다.



9. 천사의 날개를 달고 영원 속으로 가신 시인이여

  

“바닷가 조개껍질처럼

비린내 나는 육신과는 헤어지고“

영원속의 오늘로 천사의 날개를 달고

훌훌 마음도 가볍게 이사를 가셨습니까?


 “내가 거절하면 그 사람이 상처를 받을 테니까”

선생님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신 분이시다.

남에게 상처를 주느니 당신이 욕을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시는 선생님.

진실로 100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 가톨릭의 거목이시고

정신적 지주였으며 우리 마음의 구심점이시었다.

그런 분을 우리는 잃은 것이다

.이 상실감을 무엇으로 달랠 수 있을까.


  “나는 어쩌면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 가” 

그 같은 고뇌를 겪으셨기에 선생님의 신앙은

그 같이 투철하시고 완전하셨다고, 어른 없는 집안의 적막감,

이 적막감을 안고 선생님의영원한 안식을 빌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우리도 머지않아 그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니

옷깃 여미고 때 오면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10. 문상 가는 마음으로


 구상시인은  17세에 폐결핵으로 소 신학교 3학년을 자퇴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니혼 대학 종교학과에 입학한 선생님은,

죽은 신학과 같은 신앙의 한계점에 봉착하여 무척 괴로워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폴 클로델의 시를 읽고 비로소

 신앙의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으며,

그 후 일평생 바른 양심에 기초하여 시를 썼고

 사람들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자신이 아는 만큼 깊이 자신을 통찰하며 살아오신 것이다.

 그분은 진정 작은 선에도 최선을 다하고,

 바람에 떠다니는 풀씨에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발견하신 분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스승님은 85세의 십자가의 길을 마감하시고 하느님 나라에서 자유로운 영혼이 되셨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차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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