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 소리를 듣다
김문억
문득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나
고대 바빌로니아 상형문자를 해독하며 이집트 신전에 그려진 벽화를 더듬다 보면 수화로 다가 오는 아득하기만 한
말씀들이 호롱불빛 아래서 가물가물 흔들린다
도무지 판독은 안 되지만
이 편안한 옛 이야기
비
김문억
돈 받지 말고 그냥 주어라 그냥 주어라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눈이나 진눈개비 비바람 햇빛까지 모두 공짜니라
물 값 받지 말고 그냥 주어라 그냥 주어라
물을 너무 팔아먹어서 빙하가 다 무너지고 지구 온난화로 하늘님도 이젠 힘이 부친다고
요즈음 자주 말씀 하시네
소나기로 말씀 하시네
사랑도 값 매기지 말고 이렇게 듬뿍
그냥 주어라 그냥 주어라
밤비
김문억
너 오는 발자욱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내가 지금 너에게 어찌하면 좋겠느냐
부글거리며 넘실거리며
너는 애처롭게 게 끓어 넘치는데
자칫 죄가 될 수 있는 몸둥아리 밖에는
나는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구나
밤비
김문억
내가 어찌해야 너를 다 채우겠느냐
토닥토닥 초저녁부터 투정으로 시작한 비가
잠 한 숨 안 재우면서 밤새도록 보채네.
소낙비 5
김문억
그렇게 성질부리고 얻은 것이 뭐 있니
패이고 무너지고 다 떠내려 보내 놓고
속 한 번 후련하겠지만 남은 것은 상처 뿐.
소낙비 2
김문억
장엄한 오키스트라
지휘자는 누구냐
물 막대로 현弦을 켜는 관현악의 앙상불,
연주자의 가슴에서는 태풍 일고 천둥 치고
오선지는 하늘 땅 사이에서 비 바람 번개 치며 뒤집어지며 고꾸라지며
사랑이여
이별이여
죽음이여
통곡이여
휘몰아치는 휘몰이 악장이 거듭거듭 너머가고 있다.
만취한 객석에서는
그치지 않는 박수 소리.
소낙비 3
김문억
환하고 밝기만 했던 지난 몇 년 동안
망설이고 서먹했던 우리 사이
검은 구름으로 하늘을 가려 놓고
이렇게 느닷없이 옷을 벗으면
소중했던 슬픔을 어이하려고
서럽고 미안해서 어이하려고.
비
김문억
허공에 빗금 긋고
땅 위에 마침표 찍고
다 이루었느니라--
다 이루었느니라--
편안히 드러누워서
속절없이 흘러가네.
가을 비
김문억
상처가 그리울 때
아름다운 비밀이 소리치고 싶을 때
무슨 심술이냐 너 잊었다고 생각 되었을 때 잊고 싶은 만큼 잊지 못하는 것까지 흔들어 깨우는 너 가슴 뼈 마디마다 금 간 자리 지우며 위험 수위까지 육박하는 집중 폭우로 비가 온다 가을 비 상처가 그리울 때 아름다운 비밀이 소리치고 싶을 때
기억의 맨 끝에서
포박되어 있는 너.
다시 소낙비
김문억
그러지 마
그렇게 너무 비싼 감정 치르지 마
힘껏 쓸어간다고 해서 다 쓸리는 것도 아니고
뒤 끝만 허탈한거야
패인 자국만 남는거야
싫다는 것 그렇게 억지로는 끌지 마
이름모를 풀 한 포기도 다 번지수가 있는 거야
일순간 넘치는 것보다는
기다리며 사는 거야
소낙비
초정
누구냐
삭발을 하고 기갈난 허기를 끌고
상채기 투성이로 시위를 하는 이는
휘장을 휘두르며 휘청거리며 절룩거리며 포성이 번쩍이는 不可分의 운무 속으로 장대를 휘두르며 죽창을 내려찍으며 사태 진 분노를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서로가 아무 일도 아니라면서
유감을 풀고 흘러간다.
장마 1
김문억
네가 그리운 날은
날 밝은 대낮에도 벼락같이 비가 오고
비 오는 밤이면 달을 내다 걸었다
끊임없이 연일
큐우핏 화살이 가시 울을 뚫고 꽂혀오면
뚫어진 가슴에서 선홍빛 꽃이 펑펑 피고
청록 빛 산정에서 불이 활활 탄다
아프게 바싹 타버린 잿더미에서
연소된 그리움이 물안개로 자욱한 날
산은 하루에도 몇 번 씩 떠나고 돌아오며
우리의 거리를 확인해보며
고백하는 소낙비가
참았던 말 초서로 단숨에 막 휘갈긴다
알 듯 모를 듯 판독하기 어지럽다
먼 산에 구름 가면
물 흐르는 소리
비 개이면 푸른 숲이 더 가깝게 다가오겠구나.
장마
김문억
열쇠를 잃어버린 것인가
몇 날째 하늘은 금고처럼 닫혀있다
어디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아낼 수 있겠는가
누가 와서 자물통을 열어 줄 것인가
찢어진 구름 사이로 忘中이라 써 있다
흘러내리는 눈꺼풀을 걷어 올리면서
여보---
집에 가야지
집에 가야지
길고 긴 목구멍으로 간구의 기도가 너머 가고
끝내 긴 울음으로 통곡하던 이별의 시간 뒤에서
하늘은 대책 없이 비만 퍼붓고 있다
싸우지 않고 그냥 살아도
지극하게 사랑하며 끌어안고 살아도
이별은 저절로 오는 것이구나
완강한 힘으로 끌고 갔구나
산에 너를 묻은 후
너 없는 밥상에서 밥을 먹은 후
밤마다 나는 산 속에서 잠들고
맨발로 흙을 밟는다는 일이 이렇게 송구스럽다
고맙다
책장 계속 넘기다 보면
영어의 긴 세월에서 출옥을 기다리는
빛나는 태양 하나 있을 것이며.
밤비
김문억
물이 타고 있다
밝혀서 환하게 불꽃이 되고 싶은 밤비
수시로 벙글어 오는 그리움 잠재우지 못하고
밤비의 땔감이 된 나의 잠은 깜깜한 재가 되어
추억은 낙하산 타고 빗줄기 따라 내려오지만
한 번 떠난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맨 발로 서로 갈라진 후 역류하지 못한 물은 지금
어느 하구에서 서성이고 있을까
자판기 소리를 타고 소낙비로 왔던 너
기억조차 목이 타는 밤 촛농처럼 흘러 내리며
심지뼈를 태우는 뜨거운 밤비
번개는 기억을 치고
천둥은 뺨을 때린다
봄비
김문억
종일 하늘에서 소주를 내리고 있다
만취한 나무들은 건들건들 가고 있는데
잔 권할 사람이 없어 날 장단만 치고 있다.
소낙비
김문억
소낙비가 내린다
우산 하나를 두 사람이 쓰고 간다
기둥 하나를 두 사람이 잡고 간다
여자의 몸을 가리고 가는 남자의 한 쪽 어깨가 다 젖었다
한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젖은 어깨가 따듯 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다.
남자의 어깨가 흠뻑 젖고부터
멀리 사라지고 있는 두 사람을 따라가며 소낙비가 퍼붓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따뜻한 빗속으로 들어가서
가슴 깊은 곳까지 젖고 있었다.
장마
김문억
평택평야 우리 땅에 철조망을 둘렀다
지루하다
가뭄으로 갈라져 금간 틈, 틈 사이에서
美軍은 집을 짓고 農軍은 모를 심고
예
아니오
예
아니오
단답형 쇠막대로
단답형 물대포로
한 냉 전선 난기류 집중호우 퍼부으며
범람하는 홍수경보
다듬잇돌, 반닫이, 징검다리 다 떠내려가네.
장맛비 그치고 나면
복구비나 주느냐?
소낙비
김문억
모름지기 이렇게 한 번 울어 본적 있느냐
발가벗고도 부끄럽지 않게 통곡한 적 있느냐
맨발로 저리 고꾸라지며 달려본 적 있느냐
밤비 소리에 잠을 깨다
김문억
철벅철벅 중랑천 저 아랫녁에서 누가
오고 있는 것인가
가고 있는 것인가
아무도 보이지 않네
보이는 듯 했는데
짐짓 아닌 체 하면서
너는 왜 알몸이 되어
외줄 타고 내려와서
내 잠결을 밟고 가느냐
물꽃을 만들어 놓고
울고 웃고 하느냐
집시처럼 곡예사처럼
불쌍해야만 행복했던
내 안식의 쉼표를 모아
징검다리 놓고 있다
물꽃이 환한 꽃밭을 건너오실
다리 하나 놓고 있다
소낙비
김문억
게 섯거라
게 섯거라 이 놈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준마를 몰아 쫓아가며 호통을 치지만
숨 너머 가게 호통 치지만
달아날 길을 터주고 있다
쫓는 자가 울고 있다
'아름다운글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별을 따러 간 남자 1. 2. / 장시하 (0) | 2010.05.04 |
---|---|
[스크랩] 별에 못을 박다 / 류시화 (0) | 2010.05.04 |
[스크랩] 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은 안다 - (0) | 2010.04.27 |
사랑하지 않는것 처럼 사랑하는 것 - 김종혜 (0) | 2010.04.26 |
삼킬 수 없는 것들 / 나희덕 (0) | 2010.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