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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아버지의 자리

유년 시절 나는 아버지 손을 잡고 덕수궁에 가곤 했다. 중화문을 지나 석조전 앞에 이르면 시원한 분수가 우리를 반겼다. 물개 입에서 뿜어내는 물줄기는 내리쬐는 햇살에 튕겨 물보라를 일으켰고, 때로는 덤으로 무지개까지 보여 주었다. 내 눈망울이 커지자 아버지가 제안했다.“ 한번그려볼래?” 말이 끝나기도 전, 내 마음의 채색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물개 분수와 석조전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가 있었다. 따가운 햇살을 가려 주는 넝쿨나무 그늘과 벤치였다. 그 풍광의 열기에 빠져 그리다 보면 구경꾼들이 내 주변에 모여들었다. 흙색과 녹색의 파스텔이 밀고 밀리다 보면 어느새 물개 분수가 스케치북 위에 드러났다. 지켜보던 어른들은“쪼그만 애가 어쩜 저렇게 잘 그리지? 저것 좀 봐, 물개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잖아!”했다. 싫지 않았다.

우쭐해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구경꾼들 사이에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아버지가안 보였다. 실망이 앞섰다. 집에 갈 생각에 화구를 챙겼다. 그때 어깨너머로 “영남아, 다그렸니?”  다정한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자, 한번보자. 와! 멋지다, 참멋지다.”  내 마음과 몸은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발을 돌려 중화문 쪽으로 몇 걸음 걷다가 분수대 풍광을 돌아보았다. 내 눈망울은 다시 한 번 커졌다. 한 장 더 그리고 싶어졌다. 앉아 그리기 시작했다. 붓질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아버지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내내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그랬다. 작곡가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작곡하지 않았다고. 가르침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예술의 한계점을 지적하는 말로 들린다. 인간의 느낌은 설명하고 예측하기도 힘들며 불확실하다.    그래도 우리 인간의 몸과 마음을 움직일 수 있고 감동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느낌'아닐까?   아버지 역시 나에게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덕수궁에 풀어 놓았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그저 지켜보았다. 그림이 다 끝나갈 땐 어김없이 나타나 큰 격려와 박수만 보냈다.   항상 아버지의 목소리는 내 등 뒤에서 들렸다. “ 영남아 참 좋다. 너무 멋지다.” 아버지는 내 조망의 세계가 싹이 나길 바라며 그토록 격려의 토양만 쌓고 또 쌓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한 아름다운 6월의 풍경이었다.

박영남 님 | 화가

-《행복한동행》201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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