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는 詩의 그림자뿐이네
최하림
詩와 밤새 그짓을 하고
지쳐서 허적허적 걸어나가는
새벽이 마냥 없는 나라로 가서
생각해보자 생각해보자
무슨 힘이 잉잉거리는 벌떼처럼
아침 꽃들을 찬란하게 하고
무엇이 꽃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지
어째서 얼굴 붉은 길을 걸어
말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
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
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지
그리운 날/ 최하림
포플러 나무들이 거꾸로 서 있는
강으로 가, 저문 햇빛 받으며
우리 강 볼까, 강 보며 웃을까
이렇게 연민들이 사무치게 번쩍이는 날은.
설야(雪夜) /최하림
하늬바람 불고 눈보라 치는 밤 그이는 하마
취비강을 건너갔을까 보내는 이들이 밤을
설치며 그리는 그 얼굴 그 눈동자가
가슴에 불 붙어 타오르는데
그이는 수많은 노두를 건너서 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 무사히 자유에 발 디뎠을까
아아 슬퍼라 어둔 지방의 인내를 버리고
사나이들은 사랑을 찾아 고단한 육신으로 산과 내를 건너가는데
밤 물길을 끌고 지친 화적패처럼 건너가는데
음산한 지방을 백색으로 물들이면서
퇴색한 말을 버리고 내리는 눈 눈눈눈
눈이여 오만 가지 죄의 모습과 인육을 가리고
가는 이의 사랑을 따라나서는 길을 마련하라
구석구석이 허사로 가득한 밤
우리들은 허사에서 배어 나오는 암흑을 보며
비로소 공포 속에서 승냥이처럼 울부짖는다
울부짖음이 암흑 속으로 암흑 속으로 사라져
암흑이 되어 돌아온다 취비강가에서 피흘리던 암흑
모든 주민의 비겁을 아파하던 암흑이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눈보라 속으로 몰아 넣는다.
마음의 그림자/ 최하림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
* 빈약(貧弱)한 올페의 회상(回想) 최하림. - 신춘문예 당선작
나무들이 일전(日前)의 폭풍처럼 흔들리고 있다
먼 들판을 횡단하며 온 우리들은 부재(不在)의
손을 버리고
쌓인 날들이 비애처럼 젖어드는 쓰디쓴
이해(理解)의 속 계단의 광선이 거울을 통과하며
시간을 부르며 바다의 각선(脚線) 아래로
빠져나가는 오늘도 외로운
발단(發端)인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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