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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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 입력시간 : 2010-06-14 20:31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기형도
가라, 어느덧 황혼이다
살아 있음도 살아 있지 않음도 이제는 용서할 때
구름이여,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린 잠시 늦게 타다 푸시시 꺼질
몇 점 노을이었다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곧 어둠 뒤편에선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차가운 풀섶 위에
맑은 눈물 몇 잎을 뿌리면서 落下하리라
그래도 바람은 불고 어둠 속에서
밤이슬 몇 알을 낚고 있는 흰 꽃들의 흔들림!
가라, 구름이여,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
이제는 어둠 속에서 빈 몸으로 일어서야 할 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이 뜨면
아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 우리는
서로 등을 떠밀며 피어오르는 맑은 안개더미 속에 있다.
-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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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6월13일 한 친구가 죽었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나 중앙초, 경북중, 경기고를 거쳐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1982년부터 계명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신현직이다. ‘교육기본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독일 Bonn대학교 객원교수, 교육부 교원정책자문위원 등을 지냈으며, 교육기본권 확립을 통한 교육개혁과 열정적인 시민운동으로 참세상 만들기에 20여 년 몸을 바쳤던 그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번민하다가 그날 새벽, 소주로 다시 채웠을 인삼주 한 병을 연료로 길바닥에 몸을 날려 스스로 죽었다.
시민운동가에도 천재란 수식이 가당찮은지 모르지만 그의 죽음을 언론에선 ‘천재 시민운동가의 죽음’이라고 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갈등하다 죽었다는 것도 주변과 언론의 진단이다. 대단한 원칙주의자이면서 자신에겐 엄격하고 불의에는 강인했지만 주위사람들에겐 싫은 소리를 못하는 더없이 따뜻했던 그가 A4용지에 ‘정말 끝낼까? 그것만이 답이겠지' 낙서 같은 글을 남기고 정말로 거짓말처럼 끝을 냈을 때, 내가 읽었던 시가 기형도의 <빈집>이었고 바로 이 시였다.
그때만 해도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로 다만 ‘지우다만 어느 창백한 생애’를 위로하는 척 했을 뿐 나와 상관없는 고통이라 여겼다. 사학비리에 저항하다가 폭행을 당하고, 동료교수들이 무더기로 해임을 당해 괴로워할 때도 나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가 묻힌 성주 용암 산자락 볼록한 봉분 위에 ‘맑은 눈물 몇 잎’ 뿌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9년이 흐른 지금 ’왜 죽어야만 했고 그토록 서둘러 절망했을까‘ 비로소 나의 고통에도 침투하고 있음은 왜일까. ’그 후에 별이 지고 세상에 새벽은‘뜨지 않은 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 ‘만 내 가슴속에 가물거려서인가. - 기사 입력시간 : 2010-06-14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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