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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정지용: 향수(鄕愁)

 

 
 

 

             

      정지용: 향수(鄕愁)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집필 의도 및 감상


    고향이란 인간의 원초적(原初的) 생(生)의 뿌리이고, 어머니의 품과 같은 영원한 안식처이다 .
    그러므로 시인이 고난과 시련의 현실에 놓여 있을 때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과거의 고향을
    그리워하게 마련이다.

    이 시는 정지용이 일본 동지사(同志社) 대학 재학 시절에 쓴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국 땅에서 낯선 환경 속에 생활하며 유년 시절에 겪은 여러 추억과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이 시를 쓰게 한 배경이라 할 것이다.

    토속적인 어휘와 창가조(唱歌調)의 구성 형태를 취하면서도 표현에 있어
    감각적 심상을 사용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감정의 노출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모든 정서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처리한 것은 이 시가 한국 시사(詩史)에 있어 한 단계 발전했음을 보여 준다.
    정지용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지만 시 <향수>의 고향 배경은
    외갓집이 있었던 충북 옥산면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옥천’에는 넓은 벌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튼 시 <향수>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고향의 근원적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작품이다.


    기본 이해 항목

    주제 : 고향에 대한 그리움.

    성격 : 감각적, 향토적(토속적), 묘사적.

    심상 제시 방법 : 묘사적 심상.


    시상 전개 특징 :

    1) ‘밝음’과 ‘어둠’의 이미지를 반복·대조시키고 있다.
    2) 확대된 공간과 축소된 공간이 중첩되어 있다.
    3) 내부 풍경과 외부 풍경이 대비적 묘사로 되었다.


    단락 구성 :

    제1단락 ㅡ 고향 마을의 평화롭고 한가한 정경. * 서경적
    제2단락 ㅡ 늙으신 아버지의 삶과 애환. * 서경적
    제3단락 ㅡ 꿈과 신비에 찬 유년 시절의 내면 공간. * 서정적
    제4단락 ㅡ 누이에 대한 사랑과 측은한 아내의 모습. * 서경적
    제5단락 ㅡ 가난하면서도 단란한 식구들과 고향집. * 서경적

    참고 : 시 <향수>는 정지용이 일본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재학할 때 지었는데,
    이 때 미국의 시인 Trumbull Stickney (1874~1904)의 시 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에 시 전문을 소개하여 비교문학적 입장에서 ‘정지용’의 시 연구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It 's autumn in the country I remember.
      How warm a wind blew here about the ways!
      And shadows on the hillside lay to slumber
      During the long sun-sweetened summer-days.

      It's cold abroad the country I remember.
      The swallows veering skimmed the golden grain
      At midday with a wing aslant and limber;
      And yellow cattle browsed upon the plain.

      It 's empty down the country I remember.
      I had a sister lovely in my sight:
      Her hair was dark, her eyes were very sombre;
      We sang together in the woods at night.

      It 's lonely in the country I remember.
      The babble of our children fills my ears,
      And on our hearth I stare the perished ember
      To flames that show all starry thro' my tears.

      It 's dark about the country I remember.
      There are the mountains where I lived. The path
      Is slushed with cattle-tracks and fallen timber,
      The stumps are twisted by the tempests' wrath.

      But that I knew these places are my own,
      I 'd ask how came such wretchedness to cumber
      The earth, and I to people it alone.
      It rains across the country I remember.



      지금은 가을에 젖은 고향, 나는 기억하네.
      길모롱이에 따스한 바람결 스치고
      감미로운 태양 비치는 긴 여름날을
      산마루 그림자 선잠 자던 곳.

      지금은 추위에 떠는 고향, 나는 기억하네.
      한낮 비스듬히 부드러운 날개로
      금빛 보리밭을 미끄러져 나래치는 제비들.
      그리고 들판에 풀 뜯던 누런 황소.

      지금은 텅 빈 고향, 나는 기억하네.
      내가 보기에도 사랑스런 누이가 있었네.
      머리칼은 검고 우울한 눈매를 지닌 누이
      밤이면 숲속에서 함께 노래 불렀지.

      지금은 쓸쓸한 고향, 나는 기억하네.
      내 귓전에 어린 자식들 재잘거리고
      벽난로에 꺼져버린 재를 보니
      눈물방울 스며 모든 별빛인 양 불꽃이 반짝이네.

      지금은 어두워진 고향, 나는 기억하네.
      나 살던 곳 산들이 있었네.
      오솔길엔 녹슨 달구지와 떨어뜨린 목재가 덮여 있고,
      폭풍우의 노여움으로 뒤틀린 그루터기들.

      그러나 이 곳이 내 것인 줄 알고 있었네.
      괴로움으로 이렇게 비참해진 몸으로 어떻게 왔는가 물었을 텐데.
      이러한 땅에 어찌 나 홀로 이 곳에 와 살았는가.
      지금은 비 뿌리는 고향, 나는 기억하네.

      (번역 : 김원호, 경기 55회)

      참고 : 시 <향수>는 원문의 표기 그대로임을 밝힌다.
      출전 : <조선지광> 65호 (1927. 3.)




    시어 및 구절 풀이


    제1단락 ㅡ 원경에서 근경으로 고향 마을의 모습이 묘사됨.

    넓은 벌 ㅡ 이 시의 고향은 그 배경이 농촌임을 알 수 있다.

    옛이야기 ~ 회돌아 나가고

    1) 청각적 심상.
    2) 마치 할머니가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듯이 친근감과 다정다감한 느낌을 준다.

    회돌아 ㅡ 휘감아 돌아.
    해설피 ㅡ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저녁 무렵.
    즉 해가 설핏한 저녁 무렵의 시간적 배경이 다음에 나오는 ‘금빛’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있다.

    금빛 게으른 울음

    1) 청각의 시각화로 된 ‘공감각적 심상’.
    2) ‘금빛’은 따스하고 둔탁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3) ‘게으른’은 여운을 나타내는 효과로, 고향을 생각할 때 황소 울음 소리가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ㅡ 이 시의 후렴구로,

    1) 시상(詩想)의 단락을 구분하기 위한 효과.
    2) 시의 이미지의 통일성 확보.
    3) 시의 음악적 구조와 관계된 형식(sonata 중 Rondo 형식의 테마 멜로디와 유사한 구조).
    4) 이 시의 주제를 암시함.

    <참고> 신석정의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의 반복은 3)과 일치하는 구절이다.

    질화로, 짚벼개 ㅡ 토속적 분위기를 나타낸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1) 촉각적 심상.
    2) 시간의 흐름, 즉 밤이 점점 깊어 감을 의미한다.
    3) 계절감을 암시한다.

    뷔인 밭 ㅡ 추수가 끝난 늦가을의 계절감을 나타낸다.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1) ‘밤바람 소리’는 원관념, ‘말을 달리고는’은 보조관념이다.
    2) 청각적 심상.
    3) 텅빈 밭을 황량한 바람이 휩쓸고 가는 소리.
    4) 밖의 거칠고 요란한 소리를 통해, 상대적으로 아버지가 계시는 방의
    평화롭고 안온한 분위기를 나타내고자 하는 효과가 있다.

    엷은 조름 ㅡ 아버지가 선잠에 든 모습.
    엷은 조름에 ~ 고이시는 곳
    농사꾼으로 늙으신 아버지가 쇠잔하여 졸고 계시는 안쓰러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금은 그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겠지만, 고향 집에 가면
    아버지가 거처하시던 방에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고
    장죽을 재떨이에 떠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고향에 대한 그리운 느낌을 잘 나타내고 있다.

    ㅡ 다의적(多義的) 시어로,

    1) 시적 자아의 고향은 시골(농촌)이다.
    2) 시적 자아는 농사꾼의 자식이다.
    3) 인간의 원초적 고향 의식(意識)을 뜻한다.

    내 마음 ㅡ 이 시 전체에서 유일하게 시적 자아가 나타난 표현이다.
    ‘내 마음’은 시적 자아의 유년 시절의 내면 공간을 뜻한다.

    파아란 하늘 빛 ㅡ 시적 자아가 유년 시절에 동경(憧憬)하던 세계를 암시한다.

    함부로 쏜 활살 ㅡ 목표나 표적(標的)이 없이 쏜 화살로,
    이것은 미지의 이상에 대한 도전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화살은 쏜 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유년 시절의 기억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이것은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남아 있게 된다.

    풀섶 ~ 휘적시든 곳 ㅡ 촉각적 심상.

    전설(傳說) ㅡ 신비감을 나타내어 ‘어린 누이’의 성격과 연관짓기 위해 제시된 시어이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ㅡ 누이의 검은 귀밑머리의 움직임을
    동적(動的) 이미지로 형상화하기 위한 표현이다.

    귀밑머리 ㅡ 앞 이마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 땋아 귀 뒤로 넘긴 머리.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 ㅡ 어떤 사람을 신체적 특징으로 그리는 것을
    ‘인상적(印象的) 표현법’이라 한다.
    누이 ㅡ 시에 등장하는 ‘누이’는 대체로
    ‘이상적 여인, 영원한 여자, 연인’ 등의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누님’은 남동생에게 있어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한다.

    아무러치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ㅡ 인생에 대한 달관(達觀)의 자세가 나타난 표현이다.
    부부는 오래 함께 살면 상대방을 타인으로 의식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 지체(肢體)를 의식하지 않고 살 듯이.
    그러나 그 지체가 상처 입거나 상실됐을 때
    그 아픔과 필요성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이 큰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인생을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쓸 수 없는 뛰어난 표현의 구절이다.

    사철 발벗은 안해 ㅡ 일제 식민지 시대의 궁핍한 민족의 삶을 상징한다.

    따가운 햇살을 ~ 이삭 줏던 곳

    1) 늦가을의 계절감을 나타낸다.
    2) 촉각적 심상.
    3) 외부인의 입장에서는 아름다운 전원적 풍경이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양식 한 톨이라도 보태려는 현실의 궁핍한 모습을 나타낸다.
    따라서 시적 자아는 현실 생활에 지친 아내의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하늘에는 석근 별 ㅡ 저녁 무렵 해가 지고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듬성듬성한 성긴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 ㅡ 어린 시절의 동경의 세계로, 과거의 추억과 연관성이 있다.
    1920년대 농촌 아이들은 물가가 놀이터였다. 물에서 미역도 감고 고기를 잡았으며,
    개울가에서 병정놀이도 하고 모래로 성(城)을 쌓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아이들은 하나씩 집으로 돌아가고, 시적 자아 혼자 남았을 때,
    그 쓸쓸함과 무서워지는 느낌을 생각해 보면 시적 자아가 집을 향해 막 달려가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서리 까마귀 ㅡ 서리 내릴 무렵 늦가을에 나타나는 까마귀. 해가 지고
    새들도 자기 둥우리를 찾아 날아가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초라한 집웅 ㅡ 가난한 삶을 영위(營爲)하는 자기 집 모습.

    흐릿한 불빛

    1) 안개처럼 흐릿한 추억 속.
    2) 가난한 집안 모습.

    도란도란거리는 곳 ㅡ 가난하지만 단란하고 정겹게 살아가는 집안 식구들 모습.
    이제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고향 생각에 젖을 때마다 시적 자아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