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되었다 / 석여공
이 가을 햇빛은
꼭 잘 깎은 목탁 같다
그 때 떠난 것이
잘 되었다
참 잘 되었다
가을이 내 안에서
얼굴 붉히며 익어갈 수 있으니
가만 두어도 내가 내 안에서
단풍들 수 있으니
산빛 보며 혼잣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동백 / 석여공
누가 첫 입술로 저 동백에 입맞춤했나
누가 저 동백 못 잊게 해서
들어오시라고, 성큼 꽃속으로 동백길 가자고
붉은 몸 열어 만지작거리게 했나
저 동백 누가 훔쳐 달아나 버려서
혼자라도 그리운가 아득히
동백을 보면 언제나 춘정은 몸살지게 살아
나 아직 쿵쿵 뛰는 가슴이어서
그대여 저 붉은 귀에다 소식 전하면
그 길에 누워서 죽어버려도 좋겠네
빈집 / 석여공
끝났네
지난겨울 그렇게도 춥더니
이제야 꽃샘바람 녹고 봄비 온다네
아 누가 저 비 맞고 와서
불 없는 방 바람벽에 녹슨 마음을 거실라나
오래도록 앉아서 꿈 꾸실라나
촛농 사그라진 새벽에라도 환하게
별빛 총총 깨어 있을라나
북어국 없이도 고봉밥 없이도
내내 따뜻하실라나
어쩌자는것인가 / 석여공
내안에 소리없이 켜켜이 쌓이는
저 꿈 같은것들
그대는 문 밖에서 문풍지 바람으로 덜컹거리고
나는 마음안에 빗장을 걸었다
쌓여서 어쩌자는것인가
갈길막고 올 길도 막고
마음 안의 빗장
마음 밖의 빗장
봄 오면 길 뚫릴것을
그렇게 쌓여서 어쩌자는 것인가
소스보기 / 석여공
그렇지 너를 클릭하면 너의 전력과 이미지가
촤르르르 하고 나왔으면 좋겠어
이를 테면 네가 가까이 두고 보았던 인물들과
쓰다 버린 건전지 같은 노페물과
아직 손도 타지 않은 묵은 술병과
어느 골목 몇번째 전봇대 뒤편의
허름한 구멍가게를 지나 그어 붙인 유황담배 냄새와
네가 몰래 엿보던 철대문집 흰 형광등 불빛과
텔레비젼 소리가 빠?고 동전 쏟아지는 소리처럼
촤르르르 하고 흘러 나왔으면 좋겠어
그래봐야 내가 판독할 수 있는 암호라는 게
얼룩양말 같은 바코드 몇 개
또는 지하철 깜깜한 혈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휴대폰 안테나 속의 미로지만
네가 지나간 흔적이랄지
살면서 어디에 며칠간 정박했고
어느 비 오는 날엔 낙숫물 소리 요란한 여관 잠을 잤고
해당화 닮은 여자 하나 만나 사진을 찍어주고
?아가 고백할 주소 하나 없이 빈 등짝으로 돌아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들이지만
그렇더라도 너를 클릭하면
짜릿하게 감지되는 전률이라도 부디 와서
등뼈를 타고 내리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알 수 있겠는가마는
네 왼쪽 젖꼭지 옆에다 손가락을 대고 말한다
네 전생에 부르던 노래는 어디에 있는 거냐고
새 / 석여공
나 오늘 거룩한 것 보았다
해 뜨기 전에 날던 새들
제 울음에 깃들어
해종일 나는 것을 보았다
각을 하듯 모신 말로 절간을 짓다
석여공 스님의 시집 “잘 되었다”
이대흠 시인
글씨 잘 쓰고, 차 잘 우리고, 전각 잘 하던 사내 하나가 있었다.
그와 나는 봄이면 매화차를 우려 마시고, 곡차도 한 잔씩 하면서 흥이 나면 여수 향일암까지 무작정 떠나기도 하였다.
그와의 그런 느닷없는 여행길은 퍽이나 유쾌한 것이었는데, 마을의 지명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의 생각은 가지에 가지를 뻗어 그 끝에 꽃송이 몇 달기도 하였고, 불법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옛 수행자들처럼 화두의 칼로 서로의 이마를 내리치기도 하였다.
때로는 그가 쓴 글이 향기로워 시로 옮겨 보란 얘기도 하였고, 와편에 각을 하는 그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항상 그는 나보다 높은 곳에 서 있었고, 나보다 먼저 인생 뒷장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해 겨울 훌쩍 산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역시 그는 나보다 한 발 앞섰다.
산문에 들기 전 그의 전공은 묵은 절간에서 깨어진 기와 조각 몇 주어와 거기에 부처의 몸을 새기거나 부처 자체인 불법의 송문을 새기는 것이었는데, 새기고 새긴 그것들이 결국은 제 몸에 새겨져 그 몸을 속세에 두기에 버거웠던가 보다.
그렇게 그가 떠난 지 몇 년이 지났다.
나는 더러 그의 소식을 들었는데, 절집으로 들어간 후 그의 정진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학승이 되어 대학 과정을 마친 것도 보통이 아닌데, 그 와중에 와편각 조각전을 5회 이상 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제 가슴에 새긴 문장을 말로 풀어 시집을 묶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떡 하니 지어놓은 집 한 채를 보니, 기둥은 물론이요, 대들보도 튼실하다.
전각장이였던 전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단어 하나 쓰는 데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 글자 한 자씩 와편에 새기듯 말을 모셔온 듯하다. 거기다가 서까래 하나까지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이 말의 사원은 천년 풍파도 견딜 수 있겠다.
가야 하리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벌레처럼 몸 구부리고
엎드려야 하리
일주문 지나 이마를 씻는
나무에게도 안부하고
나에게 너에게
바람에게 꽃에게
절해야 하리
절 속에는
위도 없이 아래도 없이
흰 고요가 사는데
내 안의 씨방에 홀로 앉으면
법랍 많은 동백나무가
허리를 비틀어 춤을 추리
꽃술 같은 별빛들이
꽃 창살에 눈 깜박이면
풍경소리 꿈결처럼 잠겨오리
그대 또한 금빛 뺨을 가진
부처가 되리
- ‘앉으라, 고요’ - 전문
그가 산문에 들어 처음으로 낸 시집이라서인지, 이번 시집에는 유독 ‘간다’ ‘떠난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또한 ‘끊는다’나 ‘요절’ 등의 단어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연을 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속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과 같다. 본디 맺은 것이 없으니, 끊을 것도 없다는 것이 불가의 진리 아니던가.
끊는다는 것은 내 것이라 믿었던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경지로 가는 것. 내 아내, 내 아이, 내 몸이라고 믿었던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때 그는 비로소 승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승과 속 사이의 거리는 멀다.
하지만 가야할 길이라고 왔으나, 인연의 길이 그리 쉽게 지워질 수 있는 것이던가.
그래서 화자는 앞의 시에서도 ‘가야 하리’라고 스스로 다짐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스스로를 다그치며 정진을 하여도 괴롭히는 것은 있다.
세속을 끊고 절로 간 사내에게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외로움이다.
이전의 인연은 없고, 새로 만난 사람들이 있다고 하여도 다들 인연을 끊으려고 온 스님들 뿐이다.
나를 지워야 할 판에 다른 이와의 인연 맺음에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지니고 있으니, 생래적인 외로움이야 어찌 다 내려놓았다 할 수 있으랴.
부처는 부처하고 놀고
중생은 중생하고 놀고
혼자 있어도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붉은 홍시 하나
겨울 창문 틈에 박힌
피멍 하나
- ‘홍시’ 전문
아무도 오지 않는 겨울 절간은 그대로 섬이 된다.
섬도 외따로 떨어진 섬이라서 연락선 한 척 오지 않고 뱃고동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섬이다.
눈이라도 펑펑 내려 세상이 바뀌기라도 했다면 덜 했을지 모르지만, 나뭇잎 다 진 초겨울 절간은 을씨년스럽다. 거기에 스님(화자) 혼자 방 안에 있다.
누가 올 리 없으니 문을 열어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바람이나 들어오라고 창문을 슬쩍 열어 두었나보다.
그 틈에 홍시 하나가 박혔다. 까치밥이 분명한 홍시이지만, 스님(화자)의 눈에는 인연으로만 보였을 것이다.
화자의 감정이 이입된 홍시가 피멍으로 몸을 바꾸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 절에 반가운 손님이 왔다. 사람이 아니라, 눈이다.
눈 오네
좋네
추와도 겁나 좋네
누가 저 눈길 더듬어
차 먹으러 오면
눈발 아래
좋겠네
빵모자 쓰고
눈사람처럼 서 있을라네
허공에 찻잔 훈김 쏟으며
언 입으로 반길라네
어눌해도 좋아라
차 먹고 일어나면
짐짓 핑계대고
구들목 뜨신데 자고 가시라
소매 끌어 앉힐라네
아직 떨어지지 않는 잎새처럼
차 향 가시지 않은 찻이파리 같은 손으로
가야 돼, 거절하며
실은 눈발 휘날리는 속으로
허위허위 사라지는 뒤태
그 부처 보고 자픈 것이지만
눈 오네 펄펄
- ‘불각사佛刻寺의 밤’ - 전문
눈 펄펄 오시는 날, 사람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겠다고 기약한 사람도 없었고, 눈 많이 온 날이라 누가 올 것 같지도 않은 날이다.
그래도 스님(화자)은 ‘눈 내리는 날 차향을 함께 나눌 벗 하나 없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구들까지 따뜻이 덥혀 놓았으니, 다반을 마주하여 이야기꽃을 피우면 하룻밤쯤은 훌쩍 지나갈 것 같다.
그렇게 오는 손님의 소매를 끌어 앉히고 싶은 것이 화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이내 화자는 본래의 자리를 찾아간다.
인정이야 따뜻한 아랫목에 손님을 재우고, 더러 말벗 이라도 하는 게 좋겠지만, 산문에 든 이에게 아랫목 같은 게 다 무어란 말인가.
붙잡고 싶지만, 정작 화자가 바라는 것은 화자의 바람을 털어버리고, 그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안주하지 않고 툭 털고 일어설 손님의 뒷모습을 부처의 뒤태라 한 것이다.
경전에 나오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대목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눈 오는 날 손님 하나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가, 그 손님과 차를 마시고, 그 손님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은 그 손님을 붙잡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 손님이 화자의 호의를 툭 털고 일어나 제 갈 길을 가길 바란 것이다.
여기에서의 손님은 단순한 손님이 아니다.
손님은 화자(스님)의 도반일 수도 있고, 스님(화자) 자신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손님을 화자 자신의 그림자로 본다면, 화자(스님)는 이 마음과 저 마음을 나란히 놓았다가 한 마음을 들어 낸 것이다. 그는 인정에 끌렸다가 다시 본래의 마음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본래 본처가 어디 있겠는가만, 승에게는 분명 승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야만 보이는 게 따로 있다. 다음과 같은 시는 그가 마음 잘 닦고 나서 얻은 작품 이라 여겨진다.
지난겨울 어떻게 살았느냐고
차꽃 필 때 동백꽃 필 때 매화꽃 필 때
꽃향 머금고 좋았노라고
지난겨울 또 어떻게 살았느냐고
차꽃 질 때 동백꽃 질 때 매화꽃 질 때
그때마다 겨울 산에 등 기대고
먼 산 보았노라고
꽃 진 겨울 이마에 생 바람 불어도
참 맑았노라고
한철 꽃 피고 꽃 지는 마음아
이 세상 어찌 살 것이냐 묻는다 해도
꽃 핀다 꽃 진다 할 뿐
- ‘꽃 핀다 꽃 진다’ 전문
시집을 읽다보니, 내 마음이 자꾸 절로 향한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석여공 스님은 시집을 낸 것이 아니라, 절집 한 채를 지어 놓았구나.
속세의 인연으로 만난 사이였으나, 산문에 먼저 든 그가 튼실한 절 한 채 지어 놓고 불이문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었구나.’
뒤늦게 불이문에 당도하여 절집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다 잘 되었다.’
이 가을 햇빛은
꼭 잘 깎은 목탁 같다
그때 떠난 것이
잘 되었다
참 잘 되었다
가을이 내 안에서
얼굴 붉히며
익어갈 수 있으니
가만 두어도
내가 내 안에서
단풍들 수 있으니
산 빛 보며 혼잣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 ‘잘 되었다’ 전문
그래, 그래 잘 되었다. ‘혼잣걸음’으로 걸어간 스님의 뒷모습 보고 있자니, ‘잘 되었다. 참 잘 되었다.’
잘 된 절집 하나 가까이에 두게 되었으니, 나도 잘 되었다.
마음 눅눅한 날 펼치면, 또랑또랑 물 흐르듯 부처님 말씀이 나를 씻기겠구나.
석여공 시인 /와편전각가. 승려.
시집 < 잘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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