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뼈 / 이영옥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 이영옥
돛배 제작소 / 이영옥
새벽 강구항 / 이영옥
민박집에 세워진 과녁 / 이영옥
생일전야 / 이영옥
산낙지 / 이영옥
사라진 입들 / 이영옥
관계 / 이영옥
삼나무 떼 / 이영옥
빈집 / 이영옥
다음 정류장은 주식회사 기린 / 이영옥
단단한 뼈 / 이영옥
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
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
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
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
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마지막 봄날에 대한 변명 / 이영옥
낯익은 집들이 서 있던 자리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누군가 가꾸어 둔
열무밭의 어린 풋것들만
까치발을 들고 봄볕을 쬐고 있다
지붕은 두터운 먼지를 눌러 쓰고
지붕아래 사는 사람들은
이제 서로의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떠난 자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있는
오래된 우물만 스스로 제 수위를 줄여 나갔다
붉은 페인트로 철거 날짜가 적힌
금간 담벼락으로 메마른 슬픔이 타고 오르면
기억의 일부가 빠져 나가버린 이 골목에는
먼지 앉은 저녁 햇살이 낮게 지나간다
넓혀진 길의 폭만큼
삶의 자리를 양보해 주었지만
포크레인은 무르익기 시작한 봄을
몇 시간만에 잘게 부수어 버렸다
지붕 위에 혼자 남아있던 검은 얼굴의 폐타이어가
돌아오지 못할 시간들을 공연히 헛 돌리고
타워 크레인에 걸려있던 햇살이
누구의 집이었던
쓸쓸한 마당 한 귀퉁이에 툭 떨어지면
윗채가 뜯긴 자리에
무성한 푸성귀처럼 어둠이 자라나고
등뒤에서는 해가 지는지
신도시에 서있는
건물 유리창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있었다
(2002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밥상 위의 명태 한 마리 / 이영옥
그는 침침한 백열등 밑에서 저녁을 먹는다
굳어버린 혓바닥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밥상이 곤두박질 칠 때 마다
늙은 아내는 깨진 것들을 천천히 쓸어 모았다
그를 지탱하던 의식들은
이빨 나간 그릇처럼 쓰레기 통에 처박히고
치욕은 아내의 손톱 밑에 파고 든 양념찌꺼기 같았다
한바탕 울분 뒤에
몰아쳐 오는 적요는 언제나 쓸쓸하다
그는 잘 씹히지 않는 명태를 우물거리며
바다 속의 깊은 적막을 우려낸다
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명태 한 마리의 온전한 고독이 필요할테지
관자놀이의 힘줄이 불끈 일어선다
내 영혼은 얼마나 더 능멸당해야 잠들 수 있나
꿈에서 조차 그는 말을 더듬는다
그는 마른 명태처럼 딱딱해진 생각들
탕탕 두둘겨
북북 찢어 놓고 싶었다
환멸에서 생비린내가 났다
백양나무가 바람든 뼈를 끌고 방안으로 들어 왔다
누런 이파리들의 밭은 기침에서 튀어나오는
죽음의 파편들
그는 온몸에 어둠을 퍼담고 고즈넉하게 저물어 간다
처마 밑의 마른 명태는
먼지를 한겹 두른 후 하루 더 희망을 품기로 했다
2004년 제3회 계간 <시작> 신인상 당선작
돛배 제작소 / 이영옥
그의 좁고 어두운 창고는
바다를 낀 비탈길에 매달려 있다
작업대 위에는 선풍기 한 대가
성능 떨어진 스큐르처럼 꺽꺽 거리고
가끔 죽은 생선을 입에 문 갈매기들이 힐끔거렸다
저녁이면 그는 절벅거리는 석양에 전신을 담그고
초판 인쇄본인 낡은 해부학 책을 탐독한다
그가 읽은 해부학 책의 대부분은
휘어진 척추와 절망에 눌린 늑골을
잘라내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노련한 마도로스가 되고 싶었던 그는
통나무를 파낼 때마다 깊어지는 허공을 밟고 내려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
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
번번히 출항이 연기되었던 이유는
자로 잴 수 없었던 용기의 오차 때문이었고
환기통을 찾지못한 공기들은 녹슨 바람 소리를 냈다
그는 드라이버로 세상의 귀퉁이에
임시로 꽂혀있던 자신을 풀어낸다
완전한 조립은 언제나 해체를 의미하는 걸까
톱밥같은 날들을 훌훌 날려보내고
그의 돛배는 오늘밤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통마무에서 밀려나온 나무껍질은
시멘트 바닥에서 알몸을 검개 말았다
신춘문예 당선시집 (2005년 문학세계사)
새벽 강구항 / 이영옥
강구항에는 그날 따라 해가 뜨지 않았다
골목 안에 숨어 있던 겨울 바람만이
받침 떨어진 여인숙 간판을 할퀴며 지나갔고
그때마다 낡은 간판 불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강구항의 불빛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그것은 내가 먼 곳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는 항구에는
장기 숙박하고 있는 눅눅한 바람만이
여인숙 창문을 들락거렸고
털실 뭉치같은 안개에서도 비린내가 났다
커다란 전구를 매단 통발선 한 척이
색색의 깃발을 꽂고 항구로 들어왔다
잠을 못 잔 선주의 눈알만 붉어져 있었고
해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 삶을 건져보기 위해
먼 바다에 나가 통발 한번 힘껏 던져두지 못했다
이곳에 와서도, 강해지거나 무디어지지 않고
몸을 녹이려고 낯선 방에 들어섰다
형광등 불빛이 빤히 내 감정을 들여다본다
접혀 있던 군용 담요를 펼치자
젊음을 탕진해버린 노름꾼 같은 야윈 화투짝들이
아직 냉기 돌고 있는 내 삶의 웃목으로 후두둑 떨어진다
밖으로 나가자 어둠이 물러선 자리에 늙은 선주가 서있고
주름이 깊게 패인 그가 빈배로 돌아왔다며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대답했다
나는 침묵에 길들여진 넙치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쭈그리고 앉아 아침해를 기다렸다
민박집에 세워진 과녁 / 이영옥
눈 그친 민박집으로
하얀 입김을 불며
파도와 갈매기가 맨 처음 찾아왔다
그 집의 담벼락은 파도가 칠 때마다
오래된 틀니처럼 흔들거렸다
화장실로 가는 좁다란 통로에는
널반지로 만든 과녁이 세워져 있고
칠이 벗겨진 숫자들은 원판안에 멈춰 있었다
여름 한철 동안 피서객들이
인형이나 담배에 배팅하며 활을 당겼을
화살과 활이 떠난 과녁은
바람이 들락거리는 구멍들을 안고 혼자 서 있다
미닫이 사이로 파도의 시린 발목이 보인다
비닐장판 위에 지져진 담배자국은
검은 몽돌처럼 침묵했고
그쳤던 눈발이 다시 사나워졌다
나는 내 안에 조준된 화살을 힘껏 쏘았다
결과는 경게의 안이거나 바깥일 것이다
과녁에 뚫린 수많은 구멍들도
알고보면
한때 온몸의 정신을 집중하여
생을 관통하려 했던 흔적임을 알겠다
2005년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생일전야 / 이영옥
남자는 달려오는 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급한 순간에는 어떤 기억도 저
항하지 못한다 남자의 몸이 파닥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남자의 주변으
로 살비듬같은 햇살이 잠시 푸슥그렸다 호주머니 속에서 끌려나온 유서는
창백했다 세상의 고통들은 왜 똑같은 모서리를 가질까 남자의 절망은 여러
번 접혀진 채 천천히 닳아왔을 것이다 휘갈겨 쓴 모음과 자음들이 더듬거리
며 남자를 변명했다 생일전날 날짜가 맞아 떨어진 것은 순전히 남자의 수학
적 강박 때문이었다 TV를 켜자 아홉시 뉴스앵커가 알맞게 경직된 하루를
부검하고 있다 어두운 터널은 놀란 동공처럼 아득히 뚫려 있고 남자의 반
지하 단칸방에는 미역이 양푼을 검게 부풀리고 있었다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산낙지 / 이영옥
온몸이 동강난 낙지 한마리
횟집 접시 위에서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꿈틀거린다
몇몇 토막난 육체들은
뻘 속으로 몸을 숨기던 버릇이 남아
잠시 밑으로 기어들어 보지만
토막난 기억들은 수습되지 않고
잘려진 순간들이 서로를 밀어낸다
제각기 다른 부위로 투쟁하여
다시 한몸으로 살아보자던 절박한 약속
끊임없이 미끌거리며 젓가락을 빠져나온다
악착같이 입천장에 들러붙어
버팅기는 생의 집요함
이젠 아무것도 빨아들일 수 없는
흡반이 슬픔으로 벌름댄다
접시 위에서 외롭게 저항 할
낙지의 정신을 아는
갯벌 위의 수많은 구멍들은
애써 눈물을 참는 듯
따가운 눈까풀을 실룩거린다
현대시학 2004년 12월호
사라진 입들 / 이영옥
잠실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 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 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잡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 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 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메러 왔다
섶 위의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언니가 누에의 캄캄한 뱃속을 들여다보며 풀어낸 희망과
그 작고 많은 입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른고치를 흔들어 귀에 대면
누군가 가만가만 흐느끼고 있다
생계의 등고선을 와삭거리며
종종걸음 치던
그 아득한 적막에 기대
<현대시학> 2006년 2월호
관계 / 이영옥
이가 꽉 물린 식용유 병 하나가 있다 치자
뚜껑과 몸체는 온 힘을 다해
내용물을 보호했고
병 속의 어린것들은 행복했다
시간은 모든 물질에 틈을 벌린다
시간의 집요함이란
빛나는 다이어몬드에도 흠집을 내지 않던가
몸체와 뚜껑의 사이가 점점 벌어지자
서로의 합의하에
귀찮아진 내용물을 쏟아냈다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나온 것들은
운 좋게 다른 병으로 옮겨지기도 했지만
프라이팬에서 뜨거운 세상을 맛본다
홀가분해 진 뚜껑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굴러서라도 떠나는 게 뚜껑의 근성이다
무엇을 채워도 든든해지지 않는 빈 통은
집안이 떠나가도록 점점 시끄러워졌다
- 2005년 겨울 계간 "시작"[천년의 시작]에서
삼나무 떼 / 이영옥
한때 모든 길들은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삼나무 떼들이 떠나려는 길의 양켠을 붙들고 있었다
뜬금없이 머리채 잡힌 삼나무 사이로
바람의 일행들이 절뚝거리며 지나갔다
술 취한 아버지가 삼나무 옆구리에 자전거를 박았다
큰언니가 가방을 꾸려 객지로 떠나던 날
내 안에서 우는 마른 바람소리를 들었다
흔들고 있던 손바닥이 삼나무 잎처럼 버석거렸다
떼를 지어 막아도 잡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모두 한때라고
나는 우두커니 서서 흘러가는 것들을 지켜보았다
삼나무들은 그림자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키를 줄였다 늘이면서 제 외로움을 견디고 있었다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소식 없던 작은언니 꿈을 꾸었다
삼나무는 밤새 한 뼘이나 키를 더 키웠다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간 다음에는
곤두세우고 있던 검은 머리채를
삼나무는 어디로 둘 건지 궁금했다
하루에 두 번 완행버스가 지나가면
변함없이 온몸을 일으켜 달려가는 것은 흙먼지뿐이었다
흘러간 것들은 망가져 돌아오거나 아예 오지 않았다
늘 떠나기만 하던 길들도 가끔 다리쉼을 했다
그때마다 삼나무 떼들은
평생을 키워온 짙은 그늘을 말없이 내려주었다
빈집 / 이영옥
바람벽의 광대뼈가 불거져 있는 빈 농가
감나무 야윈 품안에 시린 낮달이 얼굴을 묻는다
허리를 비틀던 흙담은 기어이 주저앉아 버렸다
간신히 서있는 세탁기 속으로
후줄근한 바람이 몸을 구겨 넣자
겨울 해의 마지막 동력이 녹슨 플러그에 접속된다
일시 정지된 동작들이 기억을 짜 맞추고
숫자가 희미해진 타이머는 오래된 예약시간을 깨닫는다
이삿짐에도 따라가지 못한
한쪽 다리가 부러진 빨래집게가
눅눅한 어스름을 물고 늘어진다
이불 홑청 같은 저녁이 까슬까슬 말라간다
탈수가 끝난 세탁기가 빗물을 찔끔 내보낸다
탈탈 털어 낸 달빛이 삶은 기저귀같이 새하얗다
달려온 바람의 눈동자가 창호지를 뚫자
놀란 문풍지들이 소스라치게 울어댄다
이빨 나간 독 안에 채워진 달빛이 넘친다
적막한 마음들이 흘러내린다
빈집은 조용조용 젖어 가는데
방문은 늘 해오던 일이라는 듯이
고단한 뼈들을 가지런히 윗목에 뉜다
다음 정류장은 주식회사 기린 / 이영옥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식은 식빵처럼 웅크리고 앉은
그 정류장 뒤쪽 배경은 늘 맛이 바뀌지 않는 단팥빵 같았네
낮게 엎드린 지붕 위로 따뜻한 연기가 몽글몽글
뜯어먹기 좋도록 몸을 부풀리고 붉은 굴뚝들은 하나같이 작달막했네
공장 담벼락 밑으로 숨죽여 지나가던 늙은 완행열차가
황급히 기적을 올리며 달아나던
적색 식용색소가 첨가된 석양이 가끔 묽어져 있던 곳
잔업시간이 길어졌거나 퇴근 버스를 놓친 사내들이
군데군데 곰팡이 핀 얼굴을 가슴에 묻고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눅눅한 시간
산다는 게 갓 구워낸 비스킷처럼 바삭거리지는 않았네
구수한 바게트를 대형오븐에 수천 번을 구워냈을 숙련공도
제 생의 온도조절에 실패해 속을 까맣게 태우던
그때를 떠올리며 빈 빵 봉지처럼 웃고 있었네
옛날의 그 맛이 아닌 건빵처럼 쓸쓸한 저녁이
어김없이 정차했다가 출발하는 다음 정류장은 주식회사 기린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