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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장욱진

수년전 중앙일보의 호암 갤러리에서 장욱진 전을 관람한 적이 있다. 질감있는 배경에 단순화된 인물과 사물표현이 독창적인 그만의 색깔을 말해주는 작품들을 관람하고 나니 한편의 동화를 읽은 듯 마음이 따뜻하고 뭉클했었다. 그의 그림에는 새, 아이, 집, 나무등의 소재를 동화처럼 녹여낸 아기같은 순수함이 녹아 있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냉혹하게 직시하고 고민하는 사회의식이 녹아 있다.  

장욱진 그는 누구인가?

이름 :  장욱진   
출생 :  1917년 11월 26일
학력 :  일본 데코쿠미술학교
데뷔 :  1937년 전조선 학생미술전람회 최우수상 수상
경력사항 :  서울대 미술대 교수
제 7, 8, 18회 국전 심사위원
수상경력 :  1986년 제12회 중앙문화대상 예술대상

서양화가. 충청남도 연기(燕岐) 출생. 8·15 후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 등과 <신사실파-의기 충천하던 젊은 작가들이 조국광복의 새 기운을 조형세계에서도 진작시켜 보자며 미술계의 근대화를 위해 활동한 사람들, 서양에서는 후기인상파에 고갱, 고호등이 있다.>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45∼1947년 국립박물관학예관, 1954∼1960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교수를 지낸 뒤로는 덕소(德沼)·수안보(水安堡)·용인(龍仁) 등 시골로 돌아다니면서 지냈다. 철저함과 단순함을 주바탕으로 하는 그의 그림에는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와 가족들 이야기, 전설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부인이순경여사의 한때                                노로 장욱진...                                  작품활동시의 모습                           



그의 작품은?

주요 작품으로는 《공기놀이(1938)》 《자동차 있는 풍경(1953)》 《까치(1958)》《모기장 (1959)》 
《두 아이(1973)》 《가로수(1978)》 등이 있다. 한편 수필집으로 《강가의 아틀리에》가 있다.


<모기장 1959년>
늦은 밤 아이가 팔베개를 하고 모기장안에 누워 있는 모습이 매우 편안해 보인다. 호롱불과 밥그릇(물그릇처럼 보이기도...) 그리고 한켠에 자리잡은 요강이 아이의 모습처럼 순수한 화가 자신에게 필요했던 모든 것이 아닌가....



<까치 1958>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에 몰입하기 시작한 장욱진 화백은 학창시절 동안 그림을 그려 많은 상을 받았을 만큼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한다. 이 그림은 스크래치한 듯 질감이 살아있는 배경이 까치의 까만 몸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보리밭 1951>
황금 벌판이 수놓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화가의 모습은 뒤따르는 강아지와 새들이 있는 자연속에 완전 고독이라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일명「보리밭」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그림은 나의 자상自像이다.
1950년대 피난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되었다. 나의 일생에서 붓을 못들은 때가 두 번 있었는데 바로 이때가 그중의 한번이었다. 초조와 불안은 나를 괴롭혔고 자신을 자학으로 몰아가게끔 되었으니 소주병을 들고 용두산을 새벽부터 헤매던 때가 그때이기도 하다.
고향에선 노모님이 손자녀를 거두시며 계시었다. 내려오라시는 권고에 못이겨 내려가니 오랜만에 농촌자연환경에 접할 기회가 된 셈이다. 방랑에서 안정을 찾으니 불같이 솟는 작품의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감 몇 개 뿐이지만 미친 듯이 그리고 또 그렸다. 「나룻터」,「장날」,「배주네집」.「자상自像」은 그중 하나이다. 많은 그림들이 그 역경 속에서 태어났고 동네사람들이 가인이라 말하도록 두문불출, 그리기만 했던 것이다. 간간이 쉴 때에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들러본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 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畵廊 1979년 여름호>


<가족 1973>
화가가 주로 그리는 소재들이 모두 드러나 있는 가족의 그림에는 나무와 사람, 집과 새가 있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부부 사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장욱진은 부인 이순경에게 옛날 만공선사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들려주곤 했다고 하는데 "머리를 깍여 불자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네가 하는 공부나 우리가 하는 공부나 모두 같은 길이니라.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 고 말이다. 장욱진은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늘 그리기만 하고, 전시회를 열어도 작품을 팔기보다는 정말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거저 달라고 하면 그냥 집어주길 좋아했다. 화가로 생활해 나가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였기에 아내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던 장욱진은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던 만공선사의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어 미안함을 전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장욱진은 불기 하나 없는 한 겨울의 덕소 화실에서 일주일간 밥을 굶어가며 아내 이순경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아내의 법명을 따서 제목을 정한 <진진묘(眞眞妙)>였다. 그림을 완성하고 화가는 3개월간 앓아 누웠다고 한다.

<진진묘1970>
1970년 1월 3일 불경을 외우는 아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그린 아내의 초상화 그림이다. 아내의 모습에서 불성을 발견한 것이겠지만 그냥 보아서는 불화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림이 참 묘하다. 표정하며 자세하며 아내같기도 하고, 보살같기도 하고.....그래서인지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화가는 몇 개월동안 앓아 누웠고, 이를 불길하게 여긴 화가의 부인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여긴 화가는 이를 두고두고 아까워했다고 한다. 화가 자신이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되는 작품이다.

장욱진이 평생을 두고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었다. 슬하에 2남 4녀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예술 작품은 인간의 생명처럼 무한한 고독"이라고 말했던 그에게 가족은 더할 나위 없는 방패였고, 버팀목이었다. 아내가 그러했고, 그의 자녀들이 그랬다. 장욱진의 가족은 화목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나이 오십이 다 될 무렵 얻은 막내 아들은 화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만들었다. 뒤늦게 얻은 맏둥이 자식인지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석달이 지날 무렵 아이가 정신지체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 자식이 병을 앓기 시작하자 화가는 사찰을 찾아다니며 더욱 불교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강가의 아뜰리에> 수필집에서의 독백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몇 년 뒤 자신의 화실을 덕소에 꾸리게 된다. 화가의 작업실인 아뜰리에에 이르는 동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곤 면장집 하나뿐인 시골,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자연을 벗삼아 살아야 하는 오지에서 장욱진은 혼자 살았다. 화가는 훗날 회상하며 말하길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입버릇처럼 늘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은 거짓으로 겸손한 척 하기보다는 정직한 교만 쪽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그의 평소 생각이기도 했다.

"여름의 강가에서 부서진 햇빛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면 위에 떠도는 아지랑이를 타고 동화가 들려올 것 같다. 물장구를 치며 나체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천진했던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 서글프게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태양과 강과 태고의 열기를 뿜는 자갈밭, 대기를 치스치는 여름 강바람- 이런 것들이 나 역시 손색없는 자연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다. 자연의 침묵이 풍요한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럴때 나는 물이 주는 푸른 영상에 실려 막걸리를 사랑해 본다. 취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의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아름다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

 "그렇다, 취하여 걷는 나의 인생의 긴 여로는 결코 삭막하지 않다. 그 길은 험하고 가시덤불에 쌓여 있지만 대기의 들장미의 향기가 충만하다. 새벽 이슬을 들이마시며 피어나는 들장미를 꺾어들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인생의 벌판을 방황하는 자유는 얼마나 아프고도 감미로운가! 의식의 밑바닥에 잔잔히 깔려 있는 허무의 서글픈 반주에 맞춰 나는 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 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멀리 노을이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강가의 아뜰리에 전문, <1965. 8. 현대문학>  

종종 장욱진 화백의 그림은 박수근, 이중섭 화백의 그림과 비교되지만...

그러나, 이들에 비해 장욱진 화백의 그림은 따뜻한 가족의 사랑이 반영되고 자연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표현 방법이 박수근과 이중섭화백의 그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림은 화가의 생각과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작업이므로 삶이 고단했던 박수근이나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이중섭화백에 비해 장욱진 화백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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