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흑매
<들찔레의 편지 258> 봄이 아프거든 이곳으로 원행(遠行)을 하여
꽃의 붉은 마음 따오십시오, 아름다운 꽃을 보며 아픔을 치유하십시오
꽃의 붉은 마음 따오십시오, 아름다운 꽃을 보며 아픔을 치유하십시오
배강열 칼럼니스트 (2009.04.07 11:42:27)
◇ 화엄사 흑매 I ⓒ들찔레 |
화엄사 각황전 오른편에는 오래된 매화나무 한 그루 서 있지요.
해마다 봄이 오면 그 나무를 생각합니다.
섬진강 물 따라 거슬러온 바람이 강가의 여린 매화꽃 먼저 피우고
노고단 자락으로 오르다 한번 숨 고르고 가는 땅,
바람만큼 오래된 옛 나무 등걸에 고운 손길 어루만져 피워내는 꽃,
이끼 낀 등걸은 ‘부끄럽다 부끄럽다’ 말은 못하고
붉다 못해 검붉은 꽃 피워냅니다.
◇ 화엄사 흑매 II ⓒ 들찔레 |
오래된 임이 있어 찾아가는 길, 떨어진 꽃잎 밟고 찾아가는 길,
들 길 칠백 리, 물 길 삼백 리, 고갯길 백 리,
들길따라 강 따라 산 너머 찾아가는 길,
몸을 푼 강처럼 데워진 바람처럼 찾아가는 길,
임은 아직 먼 길에 있고 서툰 잰걸음으로 다가가는 길,
해는 아침부터 내려앉아서 봄비에 임 향기 꽃비 타고 전해 오는데
강하나 더 건너고 고갯마루 올라서니 부끄러이 발걸음 떼지 못한
임의 붉은 빛 얼굴에 설핏 고인 눈물자욱 아득합니다.
◇ 화엄사 흑매 III ⓒ 들찔레 |
꽃내음 가득한 임의 등걸에 찬 손 얹어 쓰다듬으면 오히려
보드라운 푸른 이끼의 감촉으로 내 손에 꽃내음 가득합니다.
겨우내 몸속에만 가두어두었던 그리움이란 그리움 모두가
봄비를 부르고 꽃으로 피어서는 꽃비가 되고 꽃바람을 일으켜
고운 봄 편지 강물에 띄워 보냈나 봅니다.
◇ 화엄사 흑매 IV ⓒ 들찔레 |
지난 밤 지새며 뒤척이던 몸부림에 새벽길 떠나 찾아온 임 곁에서
날이 저물도록 밀어를 속삭이고 또 쓰다듬고 하였습니다.
화엄사 각황전 오른편, 오래된 매화나무 한 그루는 빗속에
붉다 못해 검붉은 꽃 피워서 바람에 그 향기 얹어 나를 안아 줍니다.
◇ 화엄사 흑매 V ⓒ 들찔레 |
매화는 심은 사람이나 이유 혹은 지명에 의해 고유명사의 이름을 갖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귀하게 대접받은 나무이지요. 그런 이면에는 겨울을 이기고 봄소식을 전해주는 매화의 품위 있는 꽃 모양과 외유내강의 정신이 존중되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대표적인 것으로 산청지방에 있는 삼매(三梅), 즉 남사마을 원정매(元正梅), 단속사지 정당매(政堂梅) 와 산천재의 남명매(南冥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모두 각각의 선비의 품성이 매화나무에 깃들어 있다는 생각으로 심겨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대개 상춘(常春)의 도를 넘지 않는 답사객들의 이름에 오르내리는 매화로 유명한 세 곳의 것으로는 제일 먼저 핀다는 금둔사의 홍매화, 선암사의 청매화, 그리고 화엄사의 흑매화를 듭니다.
◇ 화엄사 흑매 VI ⓒ 들찔레 |
홍매화가 지고 만 지난 늦은 봄이었습니다. 비 내리는 금둔사에서 이미 푸른 과육을 단 매실을 보며 안타까워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금둔사 홍매화를 봄으로서 비로소 봄이 옴을 안다고 할 정도니 언젠가는 꼭 보아야 할 숙제 중 하나였으나 올 해 그 숙제를 끝내었습니다.
두 세 해 동안 봄, 가을로 선암사를 다닌 탓 중 하나도 봄 매화와 가을 은행잎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원통전 뒤의 오래된 매화가 보여주는 봄 풍경과 대웅전 뒤로 떨어지는 가을 단풍의 멋스러움은 절과 깊은 조화를 이루어 내는 풍경으로는 단연 으뜸입니다.
◇ 화엄사 흑매 VII ⓒ 들찔레 |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단 한 그루의 매화나무로 으뜸인 것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화엄사 각황전 옆 흑매를 들고자 합니다. 조선 숙종 때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짓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계파선사(桂波仙師)가 이 매화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300년이 훨씬 넘은 나무입니다. 따라서 이 나무를 장육화(丈六花)라 부르기도 하지만 대개는 특유의 짙은 붉은 색을 상징하여 흑매(黑梅)라 부릅니다.
흑매는 우선 나무 등걸이 고풍스럽고 자연스레 휜 모습이 마치 옛 그림에서 봄직 합니다. 다른 매화들이 다 피고 난 뒤에도 아직 꽃을 피우지 않고 우리더러 시간을 참고 기다려라 일러주는 꽃이기도 합니다. 섬진강의 매화가 다 피고 져 가는데도 말입니다.
◇ 화엄사 흑매 VIII ⓒ 들찔레 |
이 매화를 보기 위해 저도 몇 번이나 다녀가면서 아직도 완전히 만개한 모습을 보지 못하였는데 오랫동나 기다리던 그리운 님 보듯 만나고 왔습니다.
만개하여 피어 있는 꽃을 보면 다섯 장의 싱싱한 붉은 꽃잎이 뭇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아침이면 아침대로 좋을 것이며 석양이 질 무렵 또한 아름다울 것입니다. 언젠가 봄이 아프거든 이곳으로 원행(遠行)을 하여 꽃의 붉은 마음 따오십시오. 아프도록 아름다운 꽃을 보며 아픔을 치유하십시오. 언제든 봄 길에 기쁨 나눌 일이 있다면 이곳을 들러 같이 나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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