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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시인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삶의 비밀을 알아버렸기에 신의 노여움으로 불우한 생을 일찍 마감한 시인들. 이른바 "요절시인"의 운명적 죽음을 그들이 남긴 시와 삶의 행적을 통해 돌아본 글이 발표됐다.

계간 문예지 「시인세계」 여름호에 실린 기획특집 "시인의 요절과 마지막 시"는 박정만(1946-88), 김남주(1946-94), 고정희(1948-91), 기형도(1960-89), 진이정(1959-93)씨의 시세계와 마지막 모습을 지인의 글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박정만씨는 알려진대로 전두환 정권 때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됐다가 고문후유증으로 불행하게 삶을 마감했던 인물이다.

시인 김영석씨는 "곡기를 끊고 술로 버티며 미친 듯이 시를 써 갈기던 그는 벌써 저승과 교신을 하고 있었다"면서 "끝내 부인도 떠나고 그는 홀로 남아 오로지 시와 술에 한사코 매달렸다"고 회고했다.

죽음을 앞둔 박씨는 김씨에게 "형, 시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밤낮이고 끊임없이들려요. 어떤 때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죽어라고 그걸 받아 적어야만 해요. 그걸 받아 적지 않으면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아요"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세상을 떠나기 한달전에 몇백 편의 시를 썼다.

그가 남긴 마지막 시는 "나는 사라진다/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종시(終詩)"전문>였다.

지리산 등반도중 실족사한 고정희씨는 "환절기의 옷장을 절리하듯/애증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내가 가야 할 저만치 길에/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크고 넓은 세상에/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시신이/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면서 "오 하느님/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하는데/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독신자" 일부>라며 지리산 뱀사골의 계곡물에 휩쓸려 세상을 떠나야 했던 자신의 죽음을 무서울만큼정확하게 예언했다.

시인 하재봉씨는 서울 시내 허름한 극장에서 의문사한 기형도씨에 대한 추억을적고 있다. 사흘간 밤낮없이 빈소에 머물며 그의 죽음을 애달퍼했던 하씨는 후배 시인 권대웅씨가 "형, 이제 형이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얼굴에 주먹을날렸던 일, 그것이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의 난투극으로 비화한 사연을 들려준다.

하씨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장님처럼 나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고 노래한 "빈집"을죽음을 예감한 기씨의 마지막 시로 제시했다.

시인 김준태씨는 김남주씨의 시를 1980년대 민족문학의 정점으로 파악하면서도"자유와 투쟁을 노래한 시이든, 통일을 노래한 시이든, 민족과 민중을 노래한 시이든, 광주학살에 분노한 시이든, 자기변혁을 노래한 시이든, 아니면 고향의 풀꽃들을노래한 서정시이든 그의 모든 시들은 흙과 대지 위에 두 다리를 탄탄하게 세우고 있다"며 그를 "대지의 시인"으로 평가했다.

시인 차창룡씨는 진이정씨의 시를 "재미있으면서도 슬프고, 발랄하면서도 깊다"면서, 시를 통해 "참자아"를 찾아나섰던 진씨의 삶을 회고했다.

한편 문학평론가 정효구씨는 "요절한 시인들이 보여준 죽음의 방식과 그 의미"라는 글에서 박정만씨를 "정치적 폭력에 짓밟힌 개인"으로 파악했다. 이어 김남주씨는 "이상주의자가 받은 형벌", 고정희씨는 "역사와의 대결에서 실족한 비극", 기형도씨는 "밀려오는 어둠 속에서 질식한 생", 진이정씨는 "허무로부터 벗어나는 길"등으로 시인들의 삶과 죽음의 방식을 규정했다.

ckchung@yna.co.kr(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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