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펄 강가에는 바람이 산다. 바람은 바닷물의 짠 내와 갯것들의 구멍에서 풍기는 비릿한 냄새와 기진개 향기를 먹고 산다. 바람이 사는 개펄에는 오래전 아주 잠깐 머물렀던 아버지의 자리가 있다. 점차 사라져 가는 기진개처럼 강가의 바람도 아버지의 자리를 잊어간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결에서 이제 아버지의 냄새는 아득하다.
개펄을 터 잡아 구순하게 자라는 식물이 있다면 갈대와 기진개일 것이다.
기진개라는 말은 내 고향 순천에서 쓰는 말이다. 마을 사람들은 개펄에 지천으로 널린 칠면초나 나문재(갯솔나무) 또는 함초(퉁퉁마디)를 통틀어 기진개라 불렀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는 강 가까이서 칠면초는 군락을 이루며 자랐다. 대신 나문재는 좀 덜 습한 개펄 둑이나 염전 근처에서 모록모록 자라났다. 가느다란 줄기에 알갱이들을 촘촘히 붙인 칠면초와는 달리 제법 덩치 큰 나문재는 잔솔 닮은 생김새로 보아 갯솔나무라는 이름이 훨씬 잘 어울린다.
집집이 아궁이가 있던 시절, 산을 갖지 못한 집들은 땔거리조차 구하기가 어려워 기진개를 땔감으로도 해 땠다. 마을 사람들은 갯가로 나와 한 짐씩 베어 가기도 했는데, 마른 쑥을 태울 때처럼 이향(異香)이 풍겨 일부러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하던 기진개였다.
고향마을 두어 리 앞에는 갯강이 흐른다. 그 갯강에서 아버지는 잠시 실장어를 잡던 때가 있었다. 바늘 크기의 투명한 실장어는 성긴 그물대신 촘촘한 모기장 그물로 잡거나 밤이면 횃불을 들고 뜰채로 건져 올리기도 하였다.
실장어는 하나하나 마릿수를 세어 팔아서, 실 뭉치 같은 뭉텅이가 그물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횡재하는 날이었다. 아직 겨울 색이 성한 이른 봄이었을까. 밀물이 몰려드는 늦은 밤, 아버지는 허리춤의 조롱박처럼 나를 달고 양동이와 뜰채를 챙겨 갯강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띄운 조각배는 살짝만 기우뚱거려도 엎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갯강의 밀물은 그런 배에서 그물을 걷는 아버지를 집어삼킬 듯 혀를 날름거리며 벙벙하게 차올랐다. 아버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휘휘한 강물의 두려움을 어찌 견뎌내셨을까. 마땅한 술적심도 없이 자식들이 허영허영 넘기는 무밥을 볼 때마다 당신의 목구멍에서는 허연 성엣발이 들솟았을지 모른다.
자신의 위중한 병보다 자식들 굶주린 배가 더 절박하였을 존재가 아비라는 이름이었던가. 누렇게 뜬 자식들 낯꼴이 부잣집 외동아들로 자랐다는 당신에게는 엔간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깊은 강물을 따라 먼지처럼 떠다닐 실장어를 잡겠다며 병색이 완연한 몸으로 어둠을 나선 참담한 심정이 아직 그곳에는 고스란하다.
아버지가 그물을 터는 동안 나는 강둑 너머에서 차가운 강바람을 피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강둑 너머는 염전 흔적이 그대로 남은 메마른 벌판이었다. 저 건넛마을 불빛에는 따스한 아랫목이 어룽져 흔들리는데 어스름 달빛 사이로 무서움이 으슬으슬 몰려왔다. 아버지가 종종 내 이름을 불러 안심을 시킨다고는 하지만 서걱대는 갈대숲에선 누군가 섬뜩섬뜩 노려보는 듯하였고, 이태 전 멱 감다 죽었다는 옆 동네 아이가 등 뒤에서 나를 잡아당길 것처럼 옴쏙하였다.
나는 주변의 오솔한 느낌을 떨치고자 나문재를 뽑아 모닥불을 피웠다. 푸석푸석한 개펄에서 나문재를 뽑기란 쉬운 일이었다. 바싹 마른 나문재는 불을 붙이자마자 타닥타닥 정적을 깨트리며 일었다가 또 금세 사그라졌다. 바람이 불면 불붙은 나문재가 도깨비불처럼 사방으로 굴러다녔다.
칼바람이 몰아치던 당신의 마지막 밤, 아버지도 기진개처럼 활활 타다가 사그라지기를 되풀이하며 끝내 티끌세상을 접었던 것이다. 다만 아버지에게는 기진개가 타면서 풍기던 이향은 없었다. 몇 달이 지나, 마을 뒷산에서 작작히 피던 진달래에는 아버지가 밤새 자반뒤집기를 하며 토해낸 검붉은 선혈이 낭자하게 밴 것 같았다.
달넘이가 되어서야 그물을 다 턴 아버지와 나는 마을로 돌아왔다.
실장어가 적게 잡혀 아무 말 없이 걷던 아버지를 총총 뒤따르면서 나는 당신을 몹시 짠하게 여겼던 것 같다. 당신의 침묵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슬프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어린 눈에도 새득새득 시들어가는 아버지의 삶이 엿보였는데 매사 갈급령을 내거나 부아를 내는 일이 잦았던 그때였다. 세상이 곤히 잠든 밤, 아버지의 헛고생이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달처럼 못내 아쉬웠다. 밀물이 다시 들어오는 어슴새벽이면 서리찬 바람을 맞으며 아버지는 혼자 또 갯강으로 나갔다.
널따란 고무통 안에는 실장어가 아지랑이처럼 곰실대며 유영을 하였다. 고무통을 검실검실 채워가야 할 실장어들이 뜰채로 건져도 쉬 안 잡힐 만큼 며칠이 지나도록 희미하게 어른거릴 뿐이었다. 실장어가 죽어 해읍스름하게 뒤집힌 채 떠 있는 고무통을 들여다보면 나는 자연 시무룩해졌다.
그 고무통이 자꾸 아버지의 힘을 빼가는 것 같았다. 한동안 아버지는 실장어가 잘 잡힌다는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결에서 서리 맞은 풀잎처럼 드러누웠다. 실장어에서 본 실낱같은 희망도 허옇게 배를 뒤집는 순간이었다.
바싹 메마른 기진개를 보면 나는 가난이 떠오른다. 꾸역꾸역 밀어 넣어봐야 걸신들린 아궁이 같아서, 기진개 한 짐을 땔감으로 해와도 그저 헤프기만 하였다. 허기를 때우듯 겨우 솥을 데워 밥이나 해낼까, 불김이 허약해 방고래의 구들장을 달구지는 못했다. 밥숟갈을 놓고 돌아서면 꺼지던 우리 배처럼, 불잉걸도 금세 사라져버린 기진개 아궁이에서는 밤새 꼬르륵꼬르륵 배곯는 소리가 새나왔지 싶다.
지금 나도 그 헛배 부른 기진개를 닮았다. 아버지도 그 기진개처럼 가난하였다. 밭부침 한 뙈기 없었거니와 농사일에는 손이 서툴러 지게를 진 당신을 볼 수 없었다. 마땅한 벌잇줄 없이 가끔 사사로이 해주는 치아 시술에서 근근이 들려 온 벌이들은 우리 뱃속에서 기진개처럼 화르르 타버렸다. 잉걸불로 남아 가족을 뭉근하게 데워 줄 벌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몸을 비척거리며 양동이와 뜰채를 챙겼을지언정, 아버지는 나처럼 빈자소인(貧者小人)은 아니었다. 날마다 상빈(傷貧)하였을지라도 품위를 잃거나 굽죄는 일이 없었으며, 자식들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믿음 또한 지켜주었다. 그래서 어린 우리는 가난을 예사롭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아버지처럼 가난한 탓일까, 한때 무능한 아버지라며 희번덕거리던 마음을 이제야 부끄럽게 닦는다. 움푹움푹한 세상에서 허방을 짚듯 살아온 세월이 정녕 당신 탓은 아니려니…. 허우대는 멀쩡해 보여도 오랫동안 속병을 앓는데다 부등가리살림으로 더 덧났을 당신의 자존심, 누구에게도 참속을 내비치지 못한 채 어떤 날은 치욕을 안으로 삭히느라 간장이 설설 끓도록 술을 마셨으리라 헤아린다.
그렇더라도 중천(重泉)의 마음은 내가 좀 더 잘 살아내기를 바랄 것이다. 한데 요즘 노모를 잘 모시지 못한 데다 굽죄는 일이 잦아 그 또한 부끄럽다. 머리는 조아려도 가슴조차 조아리면 안 된다는 무의식적 심지가 날이 갈수록 허약해지는 것이다.
4월의 문이 소란스럽게 열린다.
잎샘 바람이 흔들어대는 하얀 목련 꽃떨기가 남의 일인 듯 멀기만 하다.
* 수필가: 이승훈 「수필界」발행인, 해드림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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