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그의 삶과 예술
저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화가들의 전기를 스무편 정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90년부터 '역사 비평'에 연재를 시작하다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북한 문화유산 답사기'를 출간하는 바람에 그 작업을 잠시 중단했었습니다. 그러다 작년에 '화인 열전', 올해에 '완당 평전'을 내면서 7년 동안 중단되었던 작업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낼 때마다 많은 분들이 제 책을 읽어 주시길래, 저는 제가 글을 잘 써서 사람들이 제 책을 읽는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외국에 나갈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삼년 전 안식년을 맞아서 외국의 여기 저기를 답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영국과 미국에 있는 큰 책방을 둘러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떤 대형서점이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코너에는 두 가지 장르의 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여행에 관한 책인데 우리나라의 여행안내 책이나 지리안내 책 같은 관광 차원의 책들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제가 쓴 답사기 같은, 또 괴테의 로마기행 같은, 여러 나라의 문화와 민족에 대해서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차원의 책들이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여유 있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여행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코너는 뜻밖이었습니다. 그 코너가 바로 전기문 코너였습니다. 그 가운데 괴테와 고흐 같은 예술가들의 전기는 열 가지가 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벤자민 프랭클린,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의 전기가, 독자들의 능력과 관심에 따라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전기문학이 얼마나 빈약한가를 그제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퇴계와 율곡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여러분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이기일원론’과 ‘이원론’ 외에는 잘 모르실 겁니다. 그것도 내용은 모르고 그런 것을 주장했다는 정도만 외워서 알고 있을 겁니다. 아니면 퇴계는 천원짜리, 율곡은 오천원짜리 지폐에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겠죠. 아무튼 어느 책방에 가서 퇴계나 율곡의 전기나 평전이 있나 보십시오. 없습니다. 있다면 ‘계몽사’에서 나온 아동문고밖에 없을 겁니다. 이것이 푸대접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인문과학에 대한 상징적 현상입니다. 한 시대의 인문정신을 드높였던 사람을 당대의 사람들도 후대의 전공자도 주목을 안 하는데 누가 그 행적을 따라 가겠습니까?
젊은 사람들에게는 자기 인생의 본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제대로 읽어 볼 기회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서양의 유명한 미술사가들은 거의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 자서전이야말로 예술에 대한 안목을 어떻게 키우고, 어떻게 미술사를 연구하는가에 대한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서구에서는 사람들이 뭔가를 이루었거나, 특별난 경험을 했다면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해야 한다는 의무를 전통처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제가 쓴 답사기는 여행기이고, '화인 열전'이나 '완당 평전'은 전기문입니다. 수업시간에 할 수 없는 얘기지만 누구에게나 수긍이 가는 얘기, 또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깊이있게 바라보게 해 주는 것이 여행기와 전기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위인전기나 여행안내 책자처럼 단편적인 것이 아니라, 인문정신이 살아 있고 문화 예술이 살아 있는 중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인문정신을 깨우쳐 줄 가장 좋은 형식이라는 것이 제 소견입니다.
자서전은 아무나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전기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기로 쓰여질 만한 삶과 업적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저는 추사(秋史) 김정희를 '화인 열전'의 아홉 번째 화가로, '역사 비평'에 2년 간 연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기본적으로 화가가 아닙니다. 그 자신은 위대한 시인이었고 정치가였고 학자였으며, 우리에게는 서예가로서 이름을 남기신 분입니다. 추사 선생에 대한 전기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후 11년째 제자들이 묶어서 만든 '완당집'입니다. 이 분은 별도로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의 역사적인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에 관한 전기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삶과 행적을 일일이 조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분적으로 경학, 시, 정치적 변론, 그림에 대해서 쓴 각각의 논문들이 있는데, 그 속에는 전기적인 관점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참고할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추사 선생이 똑같은 수선화를 읊었어도, 제주도 귀양시절에 읊었던 시와 마흔 살에 봉은사에서 읊었던 시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봉은사에서 읊었던 시가 그의 인생역정 속에서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해 논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데, 추사는 수선화를 A라는 시에서는 이렇고 B라는 시에서는 이렇게 읊었다고만 한다면 그 속에서 인문정신을 밝힐 수 없는 거죠.
이 분에 대한 글을 쓰다가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제가 이 분에 관한 책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제가 아직 젊기 때문입니다. 이 분에게 20년간을 매달릴 만큼 큰 의미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일등 대접을 받아 본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 바로 추사 선생일 겁니다. 퇴계나 율곡은 2, 3백 년이 지나서야 후대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았지만, 추사의 경우에는 동시대에 그랬습니다. 이 얘기는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일본인 철학자 후지스카 치카시라는 사람이 한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을 우리가 연구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또 그런 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 자체가 참 부끄러운 일이죠.
추사를 평가하는 데는 한 개의 문장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실사구시를 모토로 청나라를 고증한 연구의 제 일인자는 추사(秋史) 김정희였다.’ 이것이 그 사람의 결론입니다. 후지스카 치카시는 중국철학 중에서 청나라 경학에 대해 연구한 일본의 철학자입니다. 그에 의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청나라의 학자들과 조선의 북학파 학자들 사이에 왕성한 학문적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는 청나라를 연구하다가 1923년에 경성제국대학을 만들 때 동양철학과 교수로 부임해 왔습니다. 이 때부터 인사동을 돌아다니며 북학파 자료들을 삽니다. 추사(秋史) 김정희, 연암(燕巖) 박지원, 초정(楚亭) 박제가와 자하(紫霞) 신위 등의 편지고 글이고 나오는 대로 다 샀다고 합니다. 그 유명한 ‘세한도’도 이 사람의 소장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 논문은 모두 추사와 그 주변을 연구한 글들이었습니다. 이 분이 마지막으로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도 추사 김정희에 관한 논문입니다. 나중에 대동문화연구소 소장을 지냈던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해서 74년에 책을 낸 것이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출간되었지요. 일본인 학자가, 그것도 일제 시대에, 추사 김정희를 연구했다는 것은 추사 선생의 국제적인 활동이 얼마나 왕성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추사를 논하기 가장 힘든 이유는 추사체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점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엉망진창으로 쓴 글씨가 추사체입니다. 희한한 것은, 우리가 쓰면 엉망진창인데 추사가 쓰면 멋있거든요. 돌아가신 청명 임창수 선생께서 추사의 글씨를 평하신 글을 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다섯 글자를 쓰면서 윗줄은 맞춰 놓고, 아래쪽에 긋는 획을 자유스럽게 흐트러지게 해 놓을 수 있는 파격을 구사한 분은 추사 김정희 밖에 없었습니다. 서예라는 장르에서 저런 파격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분은 천오백 년 동양 서예사 속에서 그 분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추사 선생의 제자 유채진이라는 분도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그것을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다.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해서 그 미학의 실마리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원래 글씨의 묘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글씨만이 아니라 매사에 해당하는 일일 겁니다. 우리들이 글씨를 엉망진창으로 쓰는 것은 법도에 구속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추사 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칠십 평생 벼루 열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 붓으로 만들었다. 또 서예가란 모름지기 팔뚝 아래에 삼백 아홉 개의 옛날 비문 글씨를 완전히 익혀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즉, 옛날에 잘 썼다는 고전 글씨체가 삼백 아홉 개가 있는데 그것을 다 깊이 익히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분은 완벽주의자였습니다. 석파(石坡) 이하응이 흥선대원군이 되기 전, 추사 선생께 난을 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북천으로 귀양을 다녀와서 추사 선생께 시첩을 주는데, 선생이 그것을 우리나라에서 평했습니다. ‘나에게 난초 그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차라리 석파에게 난초 그림을 받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이것이 완성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푼까지 이르렀다 하더라도 마지막 일 푼을 이루지 못하면 미완성이다. 또한 마지막 일 푼은 구천 구백 구십 구푼을 이룬 노력 가지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력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더 노력하라고 했다는 거죠. 추사체의 비밀은 ‘괴(怪)’입니다. 괴상할 ‘괴’자인데, 그것을 이렇게 얘기합니다. ‘근자에 들으니 내 글씨가 세상 사람들의 눈에 크게 괴이하게 보인다고 하는데 혹시 이 글씨 또한 괴이하다고 헐뜯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비웃건 꾸지람하건 그건 그들에게 달린 일이외다. 해명해서 조롱을 면할 수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괴이하지 않으면 내 글씨가 안 되는 것을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그분에게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추사의 일대기를 쓰면서 귀감으로 삼고 싶었던 글을 찾던 중 연암의 손자인 박규수 선생의 글을 찾아냈습니다. ‘추사의 글씨체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번 변했다.’는 이 문장 하나에 제가 얼마나 감동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젊어서는 그 당시 모더니즘적이었던 동기창의 글씨를 따랐었고, 중년에 중국에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의 글씨를 열심히 써서 쓸데없이 기름지고 두껍다는 흠이 있었다. 그러다 중년을 지나면서 중국의 구양순을 비롯한 여러 대가의 글을 다 익히더니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여러 대가의 장점은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하였다.’는 선생의 이야기로 사실 추사에 대한 글은 끝났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 시대에는 예술이든 사상이든 목표가 있습니다. 당시 동양 서예의 목표는 어떻게 하면 고전 서체를 완벽하게 익히고, 거기에 자신의 필체를 가미해 보다 독창적인 서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중국 서예사에서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은 한 문장으로 중국의 서예사를 이야기했습니다. 청나라의 양헌이라는 사람인데, 삼백년 주기로 끊어보면 그 복잡한 중국의 서예사도 일정한 리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5, 6세기 진나라 때의 대표적인 서예가는 왕희지입니다. 서성(書聖)이라고 하는 왕희지의 글씨는 신운이 감도는 ‘운’으로 썼습니다. 7, 8세기 당나라 때로 들어가면 구양순이 그러한데 그는 ‘법’으로 썼습니다. 이때 서법을 완성한 거죠. 10, 11세기 송나라에 들어오면 소동파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의’로 썼어요. 글씨 획에다가 ‘의’를 집어 넣었어요. 자기의 뜻을 집어 넣어서 글씨 획이 굉장히 거칠어요. 13세기 원나라 때는 조맹부, 명나라 때는 동기창, 이 사람들은 ‘태’ 즉 모양으로 썼어요. 그래서 글씨가 모양은 예쁘지만 신운이 감돌거나, 서법이 있거나, 글씨 쓰는 사람의 의지가 반영되는 경향은 약해졌지요. 그리고 청나라 사람들이 글씨나 그림에서 찾은 것은 개성으로서의 ‘괴’입니다. 이 ‘괴’를 쓴 청나라의 대표적인 화가가 양주에 살았던 여덟 명의 괴짜예요. ‘양주 팔괴’, 나양봉이니 금동이니 정판동이니 전부 개성입니다. 그런데 이 ‘괴’를 그냥 구현하면 괴상하게 되니까 이 사람들이 고전으로 들어가서 새것을 찾아내는 ‘입고출신’으로 개성을 찾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찾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추구한 ‘입고출신’으로서 가장 훌륭한 서예가는 추사 김정희였습니다. 그는 1500년의 동양 서예사 속에서 열 손가락에 들어갈 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중국 얘기를 많이 했던 것도 중국을 상대로 자기의 이상을 폈기 때문에 그랬던 겁니다.
글로벌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오늘날, 어떻게 자신을 구현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사람이 추사 김정희 선생입니다. 제 책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제가 추사를 연구하면서 그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는 1786년 6월 3일 예산에서 태어났다.’로 전기를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학계 풍토에 전기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카(E. H. Carr)보다 더 역사가로 대접받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분이 쓴 첫 번째 저작이 도스토예프스키 전기입니다. 제 자신도 감히 안다고 얘기하기는 힘듭니다만, 이제까지 사람들이 연구해 놓은 것은 한 편도 다 빼놓지 않고 소화해서 쓴 것이 '완당 평전'입니다. 제가 '문화유산 답사기'에 대해서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제 글에는 미술사적인 지식에 대해 하나도 잘못된 게 없습니다. 지금까지 연구한 어떤 미술사가도 제 글이 틀렸다고 안 합니다. 그런 면에서 ?완당 평전?은 1, 2권으로 쓰고도 모자라서 3권에 ‘자료해제편’이라는 것을 별도의 책으로 냈습니다. 이 책이 사실을 증거로 쓰여졌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묶음집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책은 살 필요가 없지만 추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사야 할 겁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조상들의 무형문화에 대해 너무나도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아, 제가 전공하는 범위 안에서는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결국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그런데 추사가 아무리 시인이고 사상가였다고 주장을 해도 그는 서예가였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서예가로서였고, 그의 진면목도 서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추사의 전기는 당연히 미술사가가 쓸 수 있는 겁니다. 다른 분야에서 봤을 때는 부실하다고 하겠지만 할 수 없는 거죠. 그것을 보완해서 여러분 중 누군가가 완벽한 전기를 쓰실 수 있겠죠.
추사 선생은 부족함이 없었던 분입니다. 증조 할아버지가 영조대왕의 사위였습니다. 왕가의 친척이었던 명문 집안에 태어나 과거에 합격했고, 규장각 대교와 병조참판을 지냈습니다. 그랬던 분이 정치적 분란에 휘말려 55살에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갑니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했던 거지요.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재산을 다 뺏기고 강변에서 초라하게 살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북청으로 귀양을 갑니다. 돌아 왔을 때에는 이미 늙고 병들어, 지금의 과천 경마장 뒤에 있는 산밑에서 봉은사나 오가면서 살았습니다. 몰락한 귀족이 가지고 있는 비애의 감정은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비애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추사는 그런 엄청난 시련 속에서 보편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이지적이고 중국적인 서체를 뛰어넘어 잘 되고 못 되고는 가리지 않는 서예의 경지에 이릅니다. 그래서 노년에는 아주 어린애가 쓴 것 같은 소탈한 글씨를 남긴 거지요. 그렇게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았던 분이, 밑바닥 인생이 가지고 있는 삶의 보편적 의미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 더 큰 가치로 승화시켰던 겁니다.
그런데, 문화는 결국 생산자가 만드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만드는 겁니다. 한 시대의 문화를 얘기할 때 우리는 그 시대의 유명한 예술가를 언급하는데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김홍도가 유명한 것은 김홍도 같은 화가를 활동하게 해 줬던 정조 시대의 문화가 위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단원의 천재성과 창의력을 찬양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그런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했던 당대의 문화 능력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민중사적인 접근이라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그렇게 뛰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앞 시대에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담헌(湛軒) 홍대용, 연암(燕巖) 박지원, 초정(楚亭) 박재가 등 청나라의 고증학과 교류를 해 왔던 50년 이상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선배들의 시행착오까지 포함한 전대의 경험을 추사가 몸속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중국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가지면서 국제성을 얻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평지돌출의 천재는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1780년 6월 3일 김정희가 태어나던 때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소치(小癡) 허유가 그린 추사의 초상을 보면 참 준수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추사는 젊어서 마마를 앓아 곰보였습니다. 추사의 아버지는 김노경이었고 어머니는 기계 유씨였습니다. 유씨 부인이 추사를 회임한지 24개월만에 낳았다고 12년 전 공식적인 추사 전기로 나와 있는 '완당선생 소전'에 쓰여 있습니다. 날짜를 잘못 세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24개월만에 낳았겠어요. 그런데 추사의 어머니가 예산에 와서 출산 준비를 하는 동안 주변 산들에 있던 소나무들이 전부 비실비실 말라 죽어가다가 추사가 태어난 6월 3일 이후에 다시 살아났답니다. 추사가 예산 땅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일화겠죠. 추사의 고조 할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냈고 증조 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의 사위였습니다. 그 때 그 일대의 땅을 왕이 김한신에게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조선의 왕가에서 친족들에게 그런 혜택을 줄 때는 그 이상의 제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에 나가지 못한다는, 종친불사의 제약입니다. 그래서 김한신이 35살에 세상을 떠났을 때 화순옹주가 남편을 따라가려고 단식을 하다가 15일 후에 세상을 떠납니다. 조선왕조 500년이 낳은 유일한 열녀였죠. 그런데 영조는 열녀문을 세워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을 안 듣고 속 썩였다고. 그래서 손자뻘 되는 정조가 할머니를 생각해서 열녀문을 세워주었습니다.
추사는 김노경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7살 무렵에 큰집으로 양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양자로 들어간 김정희가 8살 때 생부께 쓴 편지가 있습니다. ‘엎드려 제대로 살피지 못한 가운데 더위가 심합니다. 어찌 지내십니까. 소자는 사모하는 마음 구구합니다. 저는 어른 모시고 책읽기에 일념이니 안심하십시오. 큰아버님께서 지금 행차하시려고 하는데 바야흐로 비가 내리려고 하고 아직도 날이 더워서 번민스럽고 번민스럽습니다. 동생 명희와 여동생 역시 잘 있겠죠. 제대로 갖추지 못합니다. 아들 정희 올림.’ 이게 8살 먹은 애가 쓴 편지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런 글씨체로 백송나무가 있는 월성 이궁 앞에다 ‘입춘대길’이라고 썼습니다. 그때 영의정으로 있던 반암 최재봉이라는 사람이 들어왔어요. 들어와서는 밖에 있는 글씨를 누가 썼냐고 물었답니다. 8살 먹은 우리 집 아들이 썼습니다 했더니 저 애가 크면 서예가로 대성할 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인생은 굉장히 고달플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예술에 신경 쓰지 말고 학문에 전념하면 세상을 울리고도 남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떠났답니다. 예언은 거기까지만 나와 있습니다.
왜 예술을 하면 인생이 고달프고, 학문을 하면은 세상을 울리는 덕성을 갖출 수 있을까요? 그 답은 여러분들이 찾아보십시오. 다음 해에 또 ‘입춘대길’을 썼더니 박제가가 들어와서는 자기가 이 아이를 키우고 싶다고 했답니다. 박제가는 당시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그런 분이 추사의 선생이었죠. 그러나 추사의 어린 시절은 굉장히 고달팠습니다. 12살에 양할아버지와 양아버지가 같이 세상을 떠났어요. 12살 먹은 애가 일년에 10번 있는 제사에 주손이 되어서 향을 피워야 했죠. 그것도 2, 3백 명이 모이는 제사에서요. 거기다 15살에 한산 이씨와 결혼을 했는데 금방 사별을 했어요. 16살 때는 자애로운 어머니 유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부터 19살 때까지 줄초상을 당해 상복을 못 벗었습니다. 그러다 19살에 생부 김노경을 다시 모시고 살았죠. 그 와중에 박제가 선생도 귀양살이를 갔다와 추사가 20살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21살에 예안 이씨와 재혼을 합니다. 24살에는 과거시험을 봐서 합격합니다. 그때 추사의 아버지는 동지부사가 되어서 해마다 동짓날 중국으로 갑니다. 달력을 받으러 가는 거죠. 하느님과 통방할 수 있는 것은 천자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천자가 있는 중국으로 달력을 받으러 가는 겁니다. 추사는 그 동지 부사가 떠나는 길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갑니다. 자제군관 제도란 외교관으로 떠나는 자가, 자기 아들이나 동생, 조카를 데리고 갈 수 있었던 제도입니다.
이 때 추사는 두 사람의 선생을 만납니다. 중국의 완원(阮元)과 옹방강(翁方綱)이 그 분들입니다. 추사는 귀양살이 시절에 그린 자기 초상화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평생에 두 사람의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을 잊을 수가 없는데 한 분은 완원이고 다른 한 분은 옹방강이다. 완원 선생께 배운 것은 남이 그렇다고 한다고 해서 나 또한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고, 옹방강 선생께는 평생 경을 떠나지 않는 것이 경학이라는 것을 배웠다.’ 이 분들은 당시 박제가를 통해서 추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추사를 만나자마자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책 ‘연경실집’ 1, 2, 3권을 줍니다. 그리고 완원은 추사를 제자로 삼고 싶어서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줍니다. 돌아오기 삼일 전에는 옹방강을 만납니다. 당대 경학의 대가였고 글씨에서도 사대 대가 중의 한 사람이었던 옹방강은 대동에 이런 영물이 있냐고 말하면서 ‘경술지학 해동제일’이라는 글씨를 써 주고 아들들에게 ‘성묵서루’를 다 보여주라고 했답니다. 추사는 ‘성묵서루’에 있는 것을 이틀 동안 다 보았어요. 그리고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을 다 선물로 줍니다. 그렇게 교류를 하다가, 떠나기 전날 그 동안 친해진 여덟 사람이 모여 추사 선생 송별회를 열어줍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그들과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당대의 중국 대가와 국제적인 학문교류를 지속적으로 했던 거죠. 그런데 더 위대한 것은 북한산 비봉에 올라간 것입니다. 북경에서 고증학자들이 옛 비문을 연구하니까 그는 여기에 와서 이 땅의 비문을 연구한 것입니다. 진정한 학문의 교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죠. 서울 비봉에는 전설적인 비가 하나 있습니다. 무학대사가 수도를 정하려고 와 보았더니, ‘무학이라는 놈이 잘못해서 여기 왔다’는 비문이 쓰여 있더라는 거예요. ‘무학오착개신비’라고. 그래서 놀란 무학대사가 왕십리에 갔다가 근정전을 잡았다는 전설적인 비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바람에 마모가 심해서 한 글자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매일 앉아서 하나씩 읽고 밝히다 보니, 그것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함께 올라가 탁본을 떴던 조인영에게 '이것은 진흥왕 순수비다.'라고 편지를 씁니다. 그래서 다음 해에 김경연이라는 친구와 탁본을 아주 잘 하는 사람을 데리고 올라갑니다. 그 때 밝혀진 일흔 두 자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진흥왕 순수비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경주에 가서 진흥왕릉을 찾습니다. 그 당시에는 왕릉이 그냥 흙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것은 언덕이 아니라 사대 능이고, 저 중의 하나가 진흥왕릉일 것이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그것이 진흥왕릉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입니다.
태종 무열왕과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더 이상은 군사문화가 필요 없다고 해서 자기가 쓰고 있던 투구를 벗어 폐기한 절이 투구 무, 감출 장, 해서 무장사(?藏寺)입니다. 거기에 쓰여 있는 글씨가 '김생' 글씨라고 전해지던 것을, '김생' 글씨가 아니라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라고 밝힙니다. 그래서 그것을 옹방강과 함께 고증합니다. 또한 예산의 고택 뒷산에는 화암사라는 경주 김씨 원당 사찰이 있는데 여기에 ‘시경’이라고 쓰인 글씨를 새겨 놓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사의 글씨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추사의 글씨가 아닙니다. 송나라 때 애국시인 육방옹이 광동성에 새겨 놓은 것을 옹방강이 탁본해서 추사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것을 추사가 예산 화암사에 새겨 놓은 거지요. 추사의 글씨는 화암사 옆에 있는 ‘천축고선생댁’이라고 하는 글씨입니다. 아직 추사체로서 성숙하기 전의 글씨입니다. 추사의 글씨는 글 자체에 뉘앙스가 많이 잇습니다. ‘천축고선생댁’은 석가모니 집, 절집이라는 뜻입니다.
이 분이 귀양살이 할 때 13촌 조카를 데려다가 양자로 두었는데, 그 아들이 37살에 첫 아들을 낳았어요. 얼마나 좋았는지 그 아이가 이 다음에 커서 공부할 ‘동몽선습’이라는 책을 정자로 다 써서 묶고는, ‘내 아들을 위해서 이 책을 묶었다’고 썼습니다. 이 글씨는 추사의 글씨 중에 가장 정본에 가까운 교과서체입니다. 그 글씨 보면 다른 사람 글씨와는 달리 송곳으로 철판을 누르는 것 같이 강한 기세로 쓰여 있습니다.
그러다 정변이 일어나서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갑니다. 일찍이 아버지가 고금도에 귀양살이 갈 때, 추사는 성균관 벼슬을 버리고 길바닥에 엎어져 꽹과리를 치면서 왕에게 호소를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아버지를 풀어줄 수는 없지만 추사를 벌주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격정의 조선사 속에서 양반이 꽹과리를 치면서 소원한 사람은 추사뿐입니다. 아버지가 평양감사가 되었을 때는 아버지 근무처에 인사를 갔다가 수선화를 하나 받아 왔습니다. 그 수선화를 화분에 심어 양수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한테 보냈습니다. 추사보다 25살이 많은 다산이 그것을 보고 평양에서 내 친구 김정희가 수선화를 보내 줬는데 그 화분이 고려자기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살이를 가서 보니 수선화가 논밭에 지천으로 깔려 있어 마소만 그것을 먹더랍니다. 그것을 보고 ‘사물이 장소를 잘못 만나면 어떤 고통을 당하는가를 여기 와서 보는구나’라는 시를 썼답니다. 이와 같이 얘기를 해야 추사가 쓴 시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지, 앞뒤 삶의 과정을 다 빼버리고는 시를 이해할 수 없는 거죠.
귀양살이를 가기 직전인 55살에 추사는 동지부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30년만에 북경으로 가게 된 거죠. 한창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정변이 일어나 귀양살이를 갑니다. 가기 전에 추사는 일종의 신문인 국문을 받습니다. 그래서 추사가 그 당시 법무부 장관으로 있던 친구 권돈인에게 그림을 보내주면서 이런 얘기를 해요. ‘국문을 받아서 몸이 망가지는 것처럼 괴로운 것이 없고, 조상을 욕되게 해서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것이 없는데, 나는 두 가지를 다 겪으면서 떠납니다.’ 이렇게 썼어요. 그때 조인영이 상소를 합니다. 국문을 받고 있는 추사 김정희를 구제해 줄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 거죠. 그래서 목숨은 건지고, ‘멀고 험한 대정에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넣어라’고 명이 내려 대정으로 귀양을 갑니다. 다산은 임금이 강진 땅에 정배시키라고 해서 강진 땅의 어디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추사는 대정에 있는 그 집안에만 있어야 했어요. 똑같이 귀양살이를 했지만 그 형태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세상을 발견할 수 있었고, 추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제 나름대로 해석합니다.
한번은 추사 선생이 해남 대흥사의 일지암에 초의선사를 만나러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 대웅보전의 현판글씨는 18세기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동국진체로 쓰여진 가장 한국적인 글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글씨를 흉내 내는 바람에 국제적인 감각을 잃어버리는 거라고 추사 선생이 말했답니다. 그래서 그 현판을 떼고 그 옆에다 쓸데없이 기름지고 획이 굵은 글씨를 써서 붙입니다. 그랬다가 귀양살이 7년째에 예산 화암사에서 절을 새로 짓게 되는데, 그 때 무량수각을 지으면서 현판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그 때 써준 글씨는 기름기 싹 빠진 글씨였습니다. 제주도 귀양살이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거죠. 8년 3개월 귀양살이 동안 부인이 세상을 떠나지요. 그 애처가가 부인을 위해 쓴 애도문을 읽으면 눈물이 납니다. 추사는 기회만 있으면 편지를 보냈습니다. 추사가 편지를 쓸 때 첫 문장은 꼭 시로 썼습니다. 그 중에서 문학적으로 느껴지는 구절들이, ‘어제는 오늘과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왜 작년과 오늘은 다른가요.’나, ‘들에는 꽃이 피고 산에는 새가 우니 천지 반만에 봄이 온 것을 알겠는데 그대는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내 대정의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서 맨날 하늘에 대고 듣는 것은 종달새 소리 아니면 까치소리였으니 이 어두운 눈과 귀를 무엇이 깨워주겠는가. 그대의 서신을 받으니 내 문맹이 다시 일어나는 것 같네.’ 같은 것들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치우고 ‘세한도’를 읽어 보면, ‘지난해도 만학집, 대운집을 보내주더니 변함없이 또 책을 보내줬다. 세상 사람이 잘 나가는 사람 붙잡고 늘어지기 바쁜데 나처럼 외로운 처지를, 전이라고 더한 것 없고 지금이라고 덜한 것 없으니, 공자님 말씀 ‘세한연후 송백지후조야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고,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까지 푸르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니, 네 마음이 그렇구나. 아, 쓸쓸한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상적이 그것을 가지고 중국에 가죠. 중국에 가서 16명의 시를 받아 가지고 옵니다. 이것이 돌고 돌아서 후지츠카에게까지 갔었던 거죠. 그것을 소전 손재영이라는 사람이 소장하고 싶어서 현해탄을 건너 동경에 있는 후지츠카에게 갑니다. 후지츠카에게 ‘‘세한도’를 사러 왔다.’고 말하니 후지츠카가 ‘내가 팔 사람같으냐, 돌아가라.’고 했답니다. 한 달 동안을 매일 가서 백지 수표를 줄 테니 ‘세한도’를 팔라고 하는데도 후지츠카는 팔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한달 후에 아들을 불러 놓고, 자신이 죽거든 ‘세한도’를 소전 선생한테 넘겨드리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손재영은 당장 팔라면서 물러서지 않고 매일 찾아 갔습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했더니 선생의 정성에 졌다고, 가지고 가시라고 비단 보자기에 싸서 주었습니다. 한 유물의 이동 역사는 그 자체가 미술사입니다. 그 속에 세계사가 다 들어 있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면 되는가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세한도’ 하나만 갖고 책을 써도 다시 한 권은 쓸 수 있을 겁니다.
추사 선생은 그렇게 쓸쓸히 제주도에서 귀양을 살다가 63세에 서울로 올라옵니다. 올라오다가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에게 전에 자신이 떼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이 아직도 있냐고 물었답니다. 있다고 했더니, ‘그때는 내가 글씨를 잘못 봤으니 내 것을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 달라.’하고는 서울에 올라와 용산에 있는 정자 밑에서 쓸쓸하게 삽니다. 춥고 배고픈 것이 문제가 아니고, 때만 되면 오는 제사 음식을 걱정하면서 지냅니다.
저는 추사를 정말 좋아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분이 인간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쓴 글 중에 ‘일독 이호색 삼음주 (一讀 二好色 三飮酒)’라는 글이 있는데, 첫째는 독서고 둘째는 섹스고 셋째는 술이랍니다. 어떤 사대부가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 후 추사는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를 배후에서 조정했다고 해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갑니다. 북청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글을 가르치는데 친구이자 후배인 윤정현이 함경감사로 옵니다. 그는 추사 선생께 ‘황초령 순수비’를 찾아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두 가지 논문을 쓴 것이 진흥왕의 두 순수비에 대한 고찰입니다. 이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 추사의 대표적인 논문입니다. 그리고 과천으로 돌아와 쓸쓸하게 지냅니다. 초의선사가 차를 보내주어서 그것에 붙여 시를 씁니다. 그러다 돌아가시기 5개월 전, 본 적도 없는 호운대사가 편지를 보내옵니다. 편지 속에는 해공대사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는데, 찬을 써 달라는 부탁의 편지입니다. 마지막 힘을 다해 해서체로 글씨를 써줍니다. 그 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지요. 그 분이 마지막에 처한 모습은 제 책 2권 709페이지에 적혀 있습니다. 그 글은 제가 또 그 분의 일생을 얘기할 때 참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첫 문장만 읽으려 하는데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가능성이 있다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나는 천성이 노는 것을 즐거워하여,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늘 좋은 의리를 만나거나 좋은 벗을 만나면 낮 놀이가 부족해 밤까지 계속했으며, 처자나 집안일 따위에 마음 걸릴 것 없이 오직 대나무 하나 돌덩이 하나 풀 한 포기에 마음 붙일 수 있다면 거기서 세상을 마쳐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지요. 하물며 이른 봄과 늦봄 사이, 각 마을 경치는 더욱 아름다워 꽃은 비로소 봉우리가 터지고 새들은 다 둥지로 날아가며 하늘은 엷은 청색을 띄고 물은 짙은 초록을 지으며 만 그루 복사꽃은 붉고 천 그루 배꽃이 희게 다투어 벌어지고 백 리 들판에 보리는 푸르게 펼쳐졌는데 나는 이따금 홀로 그 속을 거닐며 짐짓 들까치를 설레게 하고 왕왕 소리내어 노래 부르며 흰 구름을 뚫고 가곤 하지요.’
추사는 과천에서 이렇게 살았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그 분을 닮지 못하는 것은, ‘낮에는 역사책을 읽고 새벽에는 경전을 공부하며’ 하는 이 부분을 제가 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살 수 없나 봅니다. 그렇게 유유자적하다가 봉은사에서 떠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 춘풍대아능용물 추수문장불염진(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인데, 해석을 하면, ‘두부에다 야채 넣은 오리가 최고가는 요리이고, 아들, 손자, 며느리 모인 것이 가장 우아한 모임이다. 이것은 필부의 낙이다. 상다리 부러지는 잔치상에다 황금 도장으로 결재 도장 찍을 줄은 알지만, 이 필부의 낙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라고 봉은사 판전(板殿)에 써 준 글입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가 평범성의 가치를 어떻게 끌어 올렸는가를 잘 알 수 있죠. 일흔 한 살, 병중이자 돌아가시기 삼일 전에 쓴 봉은사의 판전 글씨를 보면 8살 때 쓴 편지 글씨 같습니다. 그렇게 인간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면, 그 삶은 가치있는 인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돌아가시고 8개월 후에, 권돈인이 추사 영실을 만들어 놓고 제자 이안철에게 초상화를 그리라고 해서 그 곳에 안치를 합니다. 그 때에 추사는 복권이 되지요. 그래서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땅속에 있는 그대, 그대가 이제 명예를 찾게 됐는데 알겠느냐.’는 글을 씁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사 선생의 아들에게 전해주고 갑니다. 추사 선생의 무덤 앞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복솔이 있었어요. 그것을 지키지 못해서 10년 전에 설해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열두 그루 중 아홉 그루가 부러져 나가고 지금은 세 그루만 남아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찬시들이 있었습니다. 초의선사가 쓴 제문을 읽으면 강의 듣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여기서는 아카데믹하게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추사 김정희의 짧은 일생에 대한 글을 읽는 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철종 7년 10월 10일 전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학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해서 글씨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묘하게 깨달았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잘 했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비판 할 수 없었으며 그의 작은 아우 김명희와 더불어 훈지(壎?)처럼 서로 화답하여 울연(蔚然)히 당대의 대가가 됐다. 젊어서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화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유배 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르러 송나라의 소동파와 같다고 하더라.’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쓰인 추사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들은 옛사람들에 비해 정서적으로 보나 삶의 자세로 보나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나름대로 제가 얘기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화했으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건너뛴 것은 책으로 대신하길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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