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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수필.기타

강가에서/김용택

가시에 매달려 있던 고무공의 추억

김용택의 강가에서 ⑥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선숙이네 집

 

 

할머니 혼자살림 옷가지 몇 점
빨랫줄이 너무 길어 눈물이 핑

 

 

내가 하루를 지내는 방은 학교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오래된 강당을 수리해서 도서관으로 꾸미고 한쪽에 작은 방을 하나 달아내어 그곳에서 하루를 지냅니다.

 한때는 우리 학교의 모든 행사를 이 강당에서 했지요.

졸업식, 반공웅변대회, 각종 선거, 노인잔치, 독후감 대회 등 학교의 크고 작은 행사를 교실 두 칸짜리

이 강당에서 치렀지요. 우리 학교에 아이들이 한참 불어났을 때는 교실이 모자라 이 강당 가운데를

막아 두 교실로 나누어 썼습니다.

어떤 해는 내가 6학년을 맡았는데, 다른 반 선생님이 학교를 비우게 되어 두 칸을 트고 120명도 넘는

아이들과 여름 한철을 지낸 적이 있었지요. 내게는 아주 정다운 집이랍니다.

올봄부터 나는 이곳에서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책도 읽고 공부도 합니다.

 

 

내 방(교실도 아니고, 사무실도 아니고 해서 나는 이 방을 방이라고 합니다) 바로 앞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어요. 그 탱자나무 울타리는 학교 아이들이 공을 찰 때 말 그대로 울타리 역할을 해서

공이 학교 바로 아랫집으로 튀는 것을 방지해 준답니다.

그렇다고 높이 튄 공까지는 그 울타리가 다 잡지 못해서 학교 바로 앞집 지붕 위로 공이 튈 때도 있지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 고무공이 나왔지요.

고무공이 이 탱자나무 가시에 찍혀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가시에 찔려 바람 빠진 고무공을

보며 속수무책 허망했지요. 공이 지붕 위로 튀어 가면 그 집 할머니가 나오셔서

“호랭이가 칵 물어 갈 놈들이 지붕으로 공을 차고 난리 친다”고 고함을 지르셨습니다.

가만히 방 안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지붕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면 얼마나 깜짝 놀랐겠어요.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코앞 할머니 집 옆에 집이 또 한 채 있습니다.

 

 

나는 때로 그 집을 오래오래 바라봅니다.

마당이며, 화장실이며, 나무를 쟁여 놓았던 헛간이며, 소 외양간이며 돼지우리며 닭장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 집 아이들도 내가 거의 다 가르쳤지요.

그 집은 선숙이네 집입니다. 선숙이네 집 작은방에 선생님 내외가 두 아이들과 함께 살림을 할 때도

있었답니다. 그 집 선생님이 내 여동생을 가르치기도 했지요.

닭장에는 닭들이 울었고, 돼지가 새끼를 낳아 돼지 새끼들이 마당을 돌아다녔지요.

모든 새끼들이 다 예쁘고 귀엽듯이 돼지 새끼도 정말 귀엽지요.

우리 마당에서도 돼지 새끼들이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한번 안아보고 싶어 새끼를

잡으려고 해도 털이 몽글몽글해서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선숙이네 집 마당엔 돼지 새끼뿐이 아니었지요. 어미 닭을 따라다니는 병아리들이 종종거리기도 하고, 송아지가 마당을 뛰어다니기도 했지요. 정말 눈에 선합니다.

가을이면 볏단이 마당에 쌓이고, 집 안 여기저기 이 구석 저 구석에 호박이며 고구마며 온갖 곡식들이

쌓여 갔지요.

 

 

지금은 선숙이 아버님도 어머님도 다 돌아가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당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왔다 갔다 하시는 거예요. 하도 반가워 얼른 일어나

자세히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 낯이 익은 분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도 내가 가르쳤던 아이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땐 젊으셨는데 정말 많이 늙으셨어요. 세월이 무척 많이 흐른 것이지요. 무심한 것이 세월이지요.

내가 스물세 살 때쯤이었으니, 38년이 흐른 것입니다.

그 할머니가 장독대가 있는 뒤꼍에서 마늘도 가꾸고, 상추도 가꾸는 모습이 이따금 내 눈에

어른거렸습니다. 어느 날 뒤꼍에서 풀풀 연기가 나길래 내가 울타리 너머로 그 할머니를 부르며

인사를 했더니, 처음에는 나를 몰라보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나를 이야기했더니,

“아하, 진메 사는 우리 재헌이 선생이고만. 시방도 선생 허요?”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가 또 며칠간 할머니가 보이질 않아요.

그러면 나는 심심해서 할머니가 어디 가셨나 하며 할머니를 찾습니다.

슬레이트 지붕은 옛날 이은 그대로여서 이제는 다 낡고 색이 바랠 대로 바래서 우중충한 게 영 나간

집 같습니다. 전지를 했는데도 탱자나무가 자라서 지금은 그 집 마당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어느 날은 그 집 마당 빨랫줄에 팬티 하나, 몸뻬 하나, 오래된 웃옷이 하나 걸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긴 빨랫줄의 빨래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눈물이 나왔답니다. 혼자 울었어요. 울었지요.

빨랫줄이 너무 길어서 그냥,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살다 보면 왜 그럴 때가 있잖아요.

 

 

 

바람에 몸 맡긴 나무를 보면…
삶이 때로 찬란하고 눈부시다

 

 

그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 탱자 꽃이 하얗게 피어났을 때 나는 탱자 꽃을 처음 자세히 보았습니다.

탱자 꽃은 한 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봄에 피는 꽃잎들이 대개 낱장입니다.

벚꽃도 낱장으로 다섯 장이고, 매화꽃도 낱장이고 살구꽃도 낱장입니다.

땅에 핀 작은 꽃잎들도 거의가 다 낱장으로 꽃 이파리가 다섯 장이나 넉 장이지요.

낱장으로 된 꽃잎들이 한 장 한 장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아름답지요.

꽃잎이 운동장 가득 날리던 어느 날 집에 가서 거울을 보았더니 글쎄 내 머리 위에 꽃잎이 한 장

얹혀져 있어서 혼자 놀라고 기뻐 웃었답니다. 세상에 머리에 꽃잎이 내려앉아 집까지 따라오다니요.

탱자 꽃은 그냥 동백꽃처럼 똑똑 떨어지더라고요.

푸르고 긴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에 핀 흰 꽃은 정말 예쁩니다.

 

 

그 탱자나무 울타리 옆에 엄청나게 큰 벚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그 벚꽃나무는 우리 학교 다른 벚나무보다 늦게 꽃이 피는 대신 아주 희고 곱지요.

그리고 그 벚나무와 서로 등을 기대고 선숙이네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글을 쓰다가 그 벚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지요. 벚나무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잎들이 초록으로 짙어질 때쯤이었지요.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글쎄 그 흔들리는 나뭇잎들 속에서 소리가 나는 거예요.

가만히 귀를 모으고 들어보았더니 그 소리는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치며 나는 소리였습니다.

나뭇잎들이 부딪치면 소리가 날 만큼 크고 두꺼워진 거지요.

아! 나는 그 부드러운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에 깜짝 내 정신을 놓았습니다. 그때 그 나뭇잎 부딪치는

의성어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나뭇잎에 바람이 불면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지요.

흔들리는 나뭇잎은 눈이 부십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커다란 나무 아래 서서 바람 속에 온몸을 다 맡긴 나무를 바라볼 줄 아는 이는

살 줄 아는 이지요. 때로 삶이 그렇게 찬란하게 눈이 부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지요. 정말로 살고 싶지요.

흔들리는 수많은 나뭇잎들이 따로따로 또 때로 함께 흔들리는 보습을 보며 눈부셔하는 사람은

행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 김용택 시인

박새 딱새 바쁘게 들락거리고
뒤꼍에 피어오르는 밥짓는 연기

 

 

바람 부는 날 한 그루 나무 아래 서서

삶을 찬양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마음을 줄 줄 아는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마음을 얻으면 그게 너그러움이 되지요.

평화지요. 사랑입니다. 감동이지요.

삶의 장엄을 얻는 일이지요.

흔들리는 것들은 다 가볍습니다.

비운 몸이 아름답게 흔들리지요.

 

 

 

내가 날마다 눈여겨보는 창문 밖 나무들은 꽃이 피었다가 지고 새잎이 나고 그리고 버찌와 감과 탱자가 열렸습니다.

탱자나 버찌나, 매실이나, 살구나, 감이나 다

그 열매들이 처음에는 푸른색입니다.

감이 푸른색일 때는 땡감이라고 하지요.

 

‘땡감도 떨어지고 익은 감도 떨어진다’며 감을

가지고 인생의 부질없고 덧없음, 그리고 무상함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열매들이 푸른 잎 속에서 다른 색으로 서서히 몸을 드러냅니다.

이제 탱자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구슬만해졌습니다. 나날이 잘도 커갑니다.

버찌나 오디가 엊그제만 해도 연두색이더니 지금은 붉은색입니다.

조금 있으면 아주 까맣게 익겠지요.

그 벚나무 속에 많은 새들이 날아와 놉니다. 사실은 노는지 일하는지 싸우는지 우리들은 모르지요.

아무튼, 그만그만한 작은 박새와 딱새와 참새들이 감나무 벚나무 탱자나무를 오가며 귀가 시끄럽게

울어댑니다. 하도 시끄러워 창밖을 내다보니 탱자나무 속에서 작은 박새가 푸른 벌레를 입에 물고

왔다 갔다 합니다.

박새를 보다가 선숙이네 집으로 눈길이 갔는데, 아! 그 집 작은 굴뚝에 파란 연기가 솟아납니다.

그리고 솥뚜껑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출타를 했다가 할머니가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푸른 나무 속에 둘러싸인 허름한 농가 굴뚝으로 오랜만에 오르는 푸른 연기와 솥뚜껑 여닫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출처-마음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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