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 1944, 캔버스에 유채,호암미술관 소장
화가 이인성(李仁星)이 마지막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던 1944년의 역작 ‘해당화’입니다. 그가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다다랐을 향토성의 본질을 짐작케 하는 작품입니다. 해당화가 핀 바닷가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는 세 여인의 모습은 연출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 자연스러운 느낌을 갖게 합니다.
정원, 1930, 캔버스에 유채,
온일,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어촌 덕적도 풍경, 캔버스에 유채,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중반, 종이에 수채,
여름 실내에서, 1934, 캔버스위에 수채,
경주 산곡에서, 1935, 130.5 x 195.6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가을 어느날, 1934, 96 x 161.4cm, 캔버스에 유채, 호암미술관 소장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일제 치하인 1912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가난해서 열살이 되어서야 대구의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대구화단의 선구자 서동진의 눈에 띄어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 1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2년뒤인 1929년 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7세의 나이로 입선하며 화단에 입문하였습니다.
주위의 후원으로 1931년 도쿄로 유학을 떠나, 낮에는 화랑직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태평양 미술학교 야간부를 다녔습니다. 물론 졸업장은 없습니다. 유학시절 조선미전 수상뿐 아니라, 일본의 제국미술전람회 입상, 일본 수채화회전 최고상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수채화에서 탁월한 예술성을 발휘하여, 강렬한 원색과 강한 대조, 그리고 불투명의 짧고 단속적인 붓터치로 유화의 수준에 비견될 만큼 독특한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는 조선미전에서 데뷔한 후 8년간 '카이유'(1932년 가을)와 '가을 어느날'(1934년)을 비롯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한 '경주의 산곡에서'(1935년) 등 무려 12점의 입선작과 6점의 특선작을 내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1935년 귀국한 그는 대구 남산병원장의 딸 김옥순과 결혼해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며, 1949년에는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 됐으나, 이듬해 순경과 사소한 언쟁끝에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아깝게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관전(官展)을 발판으로한 출세지향적 작가라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으나,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한 가난한 이인성에게는 관전이 활동무대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화집을 참조하면서 홀로 독학한 이인성은 서구의 인상주의, 특히 후기 인상주의 화풍을 나름대로 발전시켜 향토적인 서정주의의 한 전형을 이뤘습니다. 그가 '한국의 고갱'으로 불리는 까닭은 그의 그림들을 보면 한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인성은 조선미전에서 6회 연속 특선 후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고, 1937년엔 불과 25세의 나이로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는 등, '조선의 지보(至寶)', '화단의 귀재'로 불리며 신화적인 명성을 날렸던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그와 동시대의 화가인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등이 1950-1960년대에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하기 시작하여 1970-1980년대 이후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과는 뚜렷이 대비됩니다.
이인성의 대표작은 '경주의 산곡에서'(1935년)으로, 1998년 월간미술이 평론가 13명에게 의뢰해 선정한 '한국 근대유화 베스트 10'에 김관호의 '해질녘'과 함께 공동 1위로 선정됐던 작품입니다. 그 외에도 '카이유'(1932년), '가을 어느날'(1934년), '아리랑고개'(1934년), '여름 실내에서'(1934년), '복숭아'(1939년)', '해당화'(1944년)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