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연주곡

아리랑

조용한ㅁ 2013. 12. 28. 00:20

12:43


 

아리랑 : 아리랑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숙한 민요다.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지만 전국 어디를 가도 아리랑 정도는 누구나 노래할 수 있고, 심지어는 해외에서도 널리 퍼져 이른 바 , 등이 있으니 이를 보아도 아리랑은 가히 우리민족 전체의 노래임이 틀림없다. 특히 외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진 오늘날에 와서는 아리랑은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적 의미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우리민족을 대표하게 된 아리랑이지만, 그 유래나 또는 언제부터 부르기 시작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아쉽게도 지금껏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주장들이 있는데, 우선 이들을 통해 그 연원을 추측해 보고자한다.
아리랑이 언제부터 우리민족에게 애창되었는가에 대한 견해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삼국시대에 이미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며, 둘째는 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공사를 시작한 1870년 즈음에 아리랑이 형성되었다는 설이다. 셋째는 이와는 달리 정확한 시기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밀양의 영남루에 얽힌 아랑(阿娘)의 전설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다.
삼국시대부터 아리랑이 불리워졌다는 주장은 역사적인 사실 또는 옛 지명을 국어학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통해 그 기원을 찾고자 하였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서 아리랑의 기원을 찾는 것은 신라의 왕비인 알영(閼英)과 관련이 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비(妃)인 알영은 알영천이란 우물에 살던 용의 옆구리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알영은 왕비가 되어서도 왕과 함께 국내를 다니면서 농작과 양잠을 장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알영의 행위를 백성들이 칭찬하고 노래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이때의 알영을 칭송하는 노래가 오늘날에는 아리랑으로 변하여 전승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알영'과 '아리랑' 사이의 음의 유사성을 그 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반면 국어학적 분석으로 아리랑의 유래를 밝힌 사람은 양주동 박사이다. 그는 전국의 지명에 나타난 '아리랑 고개'의 예를 찾아 아리랑은 곧 '아리령(嶺)'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때 '아리'는 '밝음·광명'의 으로 북방에서 한반도로 이주해 오던 우리 조상들이 높은 산을 넘어오면서 세상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고개를 '아리嶺'이라고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령'을 넘어 오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로 담아 부른 것이 곧 오늘날의 아리랑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어쨌든 이러한 주장들에 따른다면 아리랑의 유래는 신라 시대를 넘어 고대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아리랑의 역사를 근대로 잡는 경우도 있으니, 이들은 한결같이 아리랑의 유래를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공사와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대원군은 국위를 선양하기 위하여 임란 때 불탄 경복궁의 중건을 계획하고 고종 2년(1865) 4월 13일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국가 재정은 극히 빈약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백 배에 해당하는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기도 하였고, 전국의 부호를 조사하여 이들에게 강제적으로 헌금을 징수하였다. 한편 헌금을 낼 수 없는 백성들은 강제로 부역에 동원되었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그래서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차라리 내 귀가 먹어서 아무 것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아이롱(我耳聾)'이란 말이 식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당시 부역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의 처량한 신세와 맞아 떨어졌고, 그 결과 '아이롱'으로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오늘날의 아리랑으로 바뀌어 전승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편 아리랑을 '아이랑(我離娘)'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즉 매일같이 반복되는 노동에 시달린 백성들은 오랜 고독으로 인하여 고향에 두고 온 처자를 몹시 그리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妻)와 떨어져 살기 힘든 자신"들의 심정을 '아이랑'으로 표현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아리랑으로 변하여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경복궁에 동원된 백성들이 가정을) 떠나 있기가 어렵다"는 의 '아난리(我難離)'가 "아라리가 났네"의 '아라리'로 변하여 전승되었다는 설도 있다.
밀양의 아랑전설과 관련지어 아리랑의 유래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한 젊은이에 의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밀양 사또의 딸인 아랑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아랑아랑"하고 부른 것이 오늘날의 아리랑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많은 수의 이 영남루의 아름다움과 아랑각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출처
http://www.pungmuak.com/frametotal/dic/dic8.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