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잭슨 폴록의 친구들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

조용한ㅁ 2014. 3. 27. 11:49

잭슨 폴록의 친구들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입니다

오페라갤러리에서의 강의에서 소개한 내용입니다. 추상표현주의는 1940년대 중반 뉴욕에서 유행하여 1956년 폴록이 교통사고로 죽을 때까지 존속했습니다. 미국이 일으킨 첫 미술운동으로 곧 전 세계적인 미술운동이 되었습니다. 유럽에 추상표현주의에 버금가는 앵포르멜이 있었지만, 서정적인 앵포르멜에 비해 추상표현주의는 실험정신이 강한 예술가들에 의해서 매우 강렬한 표현이 되었습니다. 이후 추상표현주의의 중심지 뉴욕은 세계의 미술 수도로서 오늘날까지 그 위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어서 타나난 것이 1950년대 팝아트입니다. 팝아트에 관해선 다음 기회에 소개하겠습니다.

 

 

잭슨 폴록의 친구들로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입니다

 

마크 토비Mark Tobey(1890~1976)

서예적 글쓰기에 한해서 말하면 이를 먼저 회화적 양식으로 실행에 옮긴 사람은 마크 토비였다. 1925~27년 유럽과 근동 지역을 여행한 토비는 상하이에서 중국 서예를 배운 뒤 ‘하얀 서체 white writing’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확산된 비개성주의를 과도한 산업화와 물질주의의 산물로 본 그는 ‘하얀 서체’ 기법을 통해 현대 도시의 광기 어린 리듬을 그릴 수 있었는데, 전통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서예를 연상시키는 선과 형태로 전체론적 구성 회화가 되게 했으며 이는 개별 부분들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전통 구성을 탈피한 것이다.

 

 

 

애돌프 고틀리브Adolph Gottlieb(1903~74)

상형문자로서의 <마술을 위한 표적들 Signs for Magic>(1946)에서 시각적 요소를 본질적으로 평면적이며 고르게 배치한 건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 미술의 반복적 특징을 연상시킨다. 그의 상형문자 회화는 프로이트와 초현실주의뿐만 아니라 클레와 몬드리안으로부터 비롯된 개성적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규칙적인 격자를 즐겨 사용하여 교란적으로 불확정한 회화 공간을 만들었다.

 

 

 

아슐리 고르키Arshile Gorky(1905~48)

피카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입체주의 추상화를 주로 그린 아슐리 고르키는 기하 추상에 안주하지 않고 입체주의를 보다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의도에 적합하게 만들려고 했다. 주로 독학으로 회화를 익힌 고르키는 1930년대 중반에 피카소와 미로의 양식에서 차용한 생물 형태들에 의한 표현 형식을 구사했으며, 1940년대 초 뉴욕에 거주하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특히 마타의 영향을 받고 비로소 추상표현주의 양식에 도달할 수 있었다. 초기 작품은 여러 화가들의 작품들을 솜씨 좋게 뒤섞어 모방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말년의 작품에서는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을 보여주면서도 초현실주의와 생물 형태적 추상을 매우 독창적으로 융합함으로써 훌륭한 최후의 초현실주의자이자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인식되었다.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97)

1940년대 말 뉴욕파는 두 그룹으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는데, 폴록의 액션 페인팅 외에도 네덜란드계 미국 화가 윌렘 드 쿠닝을 주축으로 한 그룹으로 제스처 회화에 해당되는 태도를 표명하면서 회화를 완성작이라기보다는 점차 드러나는 과정의 기록, 즉 창조 과정 중에 있는 화가의 내적 정신상태가 구체적으로 펼쳐지는 것으로 보았다. 동시대 화가 중 유일하게 인물을 주제로 삼은 드 쿠닝은 처음에는 남성을 후에는 여성을 그렸다. 고르키와 그 밖의 화가들처럼 초현실주의의 환상적 측면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유기적이고 생물 형태적 형태를 들쭉날쭉한 선으로 표현한 섬세하면서도 역동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폴록과 더불어서 자발성과 액션페인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추상표현주의 비공식적 리더가 된 그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여성 주제를 발전시키면서 에로틱한 상징, 흡혈귀, 출산의 여신으로 바꾸어갔다. 인물의 모델링을 생략하고 울퉁불퉁한 윤곽선만을 사용하여 인물과 환경이 뒤섞여 흐르도록 표현함으로써 인물과 환경의 혼합체인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여인 I Woman I>에서의 여성상은 창조와 동시에 파괴의 행위자로 나타났는데, 파괴적인 요소는 그 형상들을 구현해나가는 격렬한 붓놀림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그의 여성상은 일상문화의 프리즘을 통해서 관찰된 것이다. 이 연작은 추상표현주의에 속하면서 동시에 팝 아트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는 여성 누드화를 선호하면서 누드화를 모든 면에서 공격하며 부수고, 형태와 비형태가 격렬한 상관관계가 되도록 회화와 데생을 뒤섞음으로써 작품이 미완성으로 보이게 했다.

 

 

 

바넷 뉴먼Barnett Newman(1905~70)

드 쿠닝, 폴록과는 달리 표현적이지 않은 추상표현주의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있었으며, 이런 계열의 화가 중 바넷 뉴먼과 애드 라인하르트가 두드러졌다. 뉴먼은 회화에 있어 미국의 지방주의와 사회적 사실주의뿐만 아니라 입체주의, 구성주의, 초현실주의의 자연스러운 발전과정은 끝났으므로 급진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며, 1948년 1월 단색조의 어두운 카드뮴 빛 빨강 캔버스에 밝은 카드뮴 빛 선 하나가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작품을 제작하여 비약적 결과를 성취했다. 그는 관람자의 시야를 압도하는 커다란 화면을 사용해 크기에 질적 중요성을 부여한 선구자로도 꼽힌다.

뉴먼은 1950~51년에 <숭고한 영웅 Vir heroicus sublimis>을 그렸는데, 그 자신 ‘집스 Zips’라고 명명한 것으로 거대한 하나의 색면에 폭이 좁은 수직 줄들이 있는 작품이다. 깊이를 자아내는 가식적 표현이 모두 사라졌다. 그림은 단지 대조적인 색조의 줄무늬로 생기를 띠는 색면일 뿐이지만 화면이 커서 관람자의 지각을 압도한다. 색채만이 뉴먼이 제공하는 경험인 것이다. 이 작품은 1960년대의 미니멀 아트를 예고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70)

뉴먼의 영향을 받은 마크 로스코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에 캔버스를 두 개 또는 세 개의 직사각형으로 분할하고 강렬한 색채를 엷게 칠한 뒤 그 위에는 좀 더 크기가 작고 윤곽선이 모호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은 불명료한 모서리를 지닌 직사각형의 색채 덩어리들을 그린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었다. 구름과 같은 이런 형태는 점차 단순해지고 분리된 색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좀 더 큰 직사각형으로 다듬어졌다. 그의 색채는 마치 내부의 빛으로 충만한 듯한 특별한 광휘를 지니는데, 그 효과의 대부분은 인접한 색조의 면들이 만나도록 되어 있는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민감한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광휘를 띠는 채색과 재료의 부드러운 접합으로 자유로운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구현했다. 밀도와 표면 그리고 가장자리는 관람자의 명상에 순수한 대상을 이루는 두드러진 구성요소가 된다. 이리하여 그는 이미지를 거부하는 정신성을 창출하며 미술과 성스러움의 결합을 되살려냈다. 한낱 화가의 도구에 불과했던 색이 초월적 실체의 경험에 이르는 매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로스코는 색의 공간, 즉 색면이 신화적 힘을 지니고 그 힘은 관람자에게 전달된다고 보았다.

로스코의 회화는 뉴먼의 것에 비해 신비성에 대한 감각을 더 두드러지게 드러냈는데, 화면에 나타난 투명과 반투명의 환상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는 빨강, 노랑, 오렌지 계열보다는 갈색, 회색, 짙은 파란색, 검은색을 즐겨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다가가기 어렵고 우울하며 더욱 신비로운 색채를 띠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를 거치면서 색채는 심리적 우울을 반영하는 듯 더 흐려지고, 변화나 활발한 상호작용이 감소되었다.

 

 

 

클리퍼드 스틸Clifford Still(1904~80)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이 얇고 조절되지 않은 물감을 사용한 것과 달리 클리퍼드 스틸은 두텁고 표현적인 임파스토 기법을 보여주었으며, 캔버스를 가로질러 뻗어나가는 날카롭고 불꽃같은 추상 형태들을 그렸다. 잭슨 폴록과 마찬가지로 유럽의 모더니즘을 거부한 스틸은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하는 것을 통해 미국 정신의 독자성을 표현하려고 했으므로 그의 작품에서 프랑스 회화의 영향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지중해적 색을 발견할 수 없었다. 비자연주의 색에 대한 개발은 당시의 유럽 회화와 그 전통 속에 가득 차고 흔한 주제들의 부류와 고려로부터 탈피하는 수단이었다. 그의 태도와 일치했다. 그의 회화는 치밀하고 불투명하여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려는 관람자의 시도를 좌절시킨다. 그는 정념을 전적으로 배제했다.

액션페인팅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그린버그는 뉴먼, 로드코, 스틸의 색을 넓게 칠하여 새로운 공간을 창조한 회화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색을 통해 얻어진 자율성을 특징짓기 위해 1962년 그들의 회화에 대해 컬러필드(색면)란 명칭을 부여했다.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1910~62)

프란츠 클라인은 1950년경부터 붓놀림의 독립적인 의미를 지닌 표의문자로 변화시키고, 기원은 다르지만 동양의 서예를 상기시키는 흰색 바탕 위에 넓은 검정색 패턴을 대담하게 사용하여 매우 독창적인 표현적 추상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의 회화는 종종 동양의 서예에 비유되지만, 그의 작품이 제작된 동기는 이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1940년대 말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의자를 그린 소묘를 집어 들고 호기심에서 그것을 벨-옵티콘 불투명 프로젝터를 사용하여 캔버스 틀 가장자리까지 포개질 정도의 크기로 빈 캔버스에 투사해 보았다. 그 결과 강렬한 추상의 이미지로 나타났다. 그때부터 그는 <플랑드르를 위한 습작 Study for Flanders>(1961)에서 보듯 작은 것을 확대한 듯한 추상 이미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그는 종종 회화를 상황에 비유했으며, 캔버스에 첫 번째로 가해지는 붓질을 ‘상황의 시작’이라고 했다. 폴록과 마찬가지로 회화를 활동무대, 즉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로 여겼으므로 폴록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에서 가시화된 행위가 읽혀질 수 있었다. 또한 클라인은 마크 로스코와 마찬가지로 구속받지 않는 감정에 역점을 두었다.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1913~67)

1950년대 애드 라인하르트의 완숙된 양식은 미술과 생활이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그의 일관된 신념에서 발전되어 나왔다. 그는 “미술은 미술로서의 미술이며, 그 밖의 것은 그 밖의 것이다 Art is art as art, everything else is everything else”라고 했다. 훗날 개념주의 예술가 조셉 코수스가 “미술은 개념으로서의 개념이다 Art as Idea as Idea”라고 말한 건 라인하르트에 경의를 표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라인하르트는 빈 형태, 공허, 반복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엄격하고 철저하게 추구함으로써 다가올 1960년대의 미니멀 아트를 예견했다. 1950년대에는 색채를 어둡게 하고 색채의 대비를 억제하기 시작하여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형태를 배경 색과 약간의 명도 차이만 있는 색채로 칠하여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한 모노크롬 회화에 가까운 그림을 제작하기도 했다. 1952년경에는 화면을 대칭적으로 삼등분 한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각 부분을 거의 분간할 수 없는 ‘완전한 검은색’ 양식으로 나아갔다. 1960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동일한 크기의 사각형 그림만을 그렸는데, 여기서는 간신히 알아볼 수 있게 검은색을 입힌 십자형에 의해 화면이 삼등분되었다. 회화의 목적을 반복하면서 동시에 모든 재현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회화를 순화하는 방법을 사용한 데서 그의 작품은 말레비치와 로트첸코의 초기 모노크롬과 마찬가지로 환원적이었다. 그에게 회화는 도덕적 완전무결함을 필수적으로 갖추는 것이었다.

 

 

 

로버트 머더웰Robert Motherwell(1915~91)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논문으로 정신분석 이론에 관한 것을 썼으며 평생 이 주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인 로버트 머더웰은 1940년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며 마이어 셔피로의 지도를 받고 그때부터 자동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1941년 마타와 함께 멕시코를 여행한 후 본격적으로 회화에 몰두했다. 1958년에는 헬렌 프랭컨탤러와 결혼하고 1962년부터 『파티잰 리뷰 Partisan Review』의 미술 편집장을 지냈다.

1940년대 초 머더웰이 회화와 콜라주 작품에서 표방한 기본적인 추상 이미지와 형태는 그의 작품 활동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1949년에는 유명한 연작 <스페인 공화국에 부치는 비가 Elegy to the Spanish Republic>를 제작하기 시작하여 1976년까지 150점에 달하는 회화 연작을 내놓았다. 스페인 동란에서 받은 감정적 충격이 계기가 된 이 작품들은 선명한 흑백 회화로 거칠게 그려진 수직 띠가 허공에 떠있는 달걀 형태를 양쪽에서 막고 있는 것이다.

머더웰을 포함하여 추상표현주의자들이 점차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작품의 크기는 점점 거대해진 반면 초현실주의적 주제에 부여했던 중요성은 감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은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 자체가 내용이라고 주장했고, 회화 재료의 감각적 성질과 그것을 다루는 기법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