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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몽유도원도,,,,,일장춘몽도.

조용한ㅁ 2014. 4. 17.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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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는 조선초기(1447)에 관원화가 안견이 그린것으로, 그 주제는 왕세자 안평대군이 도원에서 노닐던 꿈/ 夢遊挑源 이야기를 듣고 이를 그린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조선의 사회 문화사 전반을 함유하는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과 관련한 사회문화적적 맥락이나 배경을 중시하지 않았을때는 제목처럼 "도원도"로 바라보게 되었으나, 정치 사회적 맥락을 알게 되고 나서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즉, 몽유도원도가 창작될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기반으로 그림을 바라보면 "이상향을 그린 몽유도원도" 라기보단, 세속의 이기심들로 인해 벌어지는 권력 쟁탈의 무상함을 풍자하는 "일장춘몽도" 처럼 느껴지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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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그려지게된 배경에 대해 약술하면, 안평대군이 어느날 꿈을 꾸는데, 무릉도원에서 박팽년등 측근들과 노니는 내용의 달콤한 꿈이었다. 그 경관이 기이해서 화원 안견에게 꿈 내용을 설명하고 그리게 했다는데, 3일만에 그렸다고 한다. 이후 그림에 대한 찬시(贊)나 찬문이 붙게 되는데, 총길이가 20미터나 된다고 한다. 찬시나 찬문은 당시 집현전에 소속된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박연,김종서,서거정, 정인지등 21명의 필적과 문장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그림은 그림으로 써만 아니라 조선 전기 서예사의 큰 보배로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안평대군의 꿈을 묘사한 몽유도원도에 붙여진 그 당시 호걸들의 찬시/찬문은 안평대군을 중심으로 한 영향력 있는 사대부들간의 권력 유지 상태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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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그려진지 6년후 안평대군의 형이었던 수양대군/세조의 정난으로 단종은 폐위되고, 동생인 안평대군은 귀양 후에 사사 되고, 측근 다수도 사사되고 만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아끼던 안견은 정란의 격류속에서 살아났다고 한다.

 

안견이 계유정난의 격류속에 휩싸이지 않은 배경은, 정난이 일어나기 2년전 어느날 안평대군이 안견을 불러 중국에서 사온 고급 먹을 꺼내 놓으며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안견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자신을 그토록 총애하던 안평대군의 고급 중국산 먹을 도포자락에 감춘다. 얼마 후 다시 안평대군이 들어오고, 먹을 찾는 소동이 벌어지는 와중에 안견의 옷춤에서 먹이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안견은 안평대군의 눈밖에 나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수양대군에 의한 계유정란의 참화를 겪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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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몽유도원도의 소재가되는 몽유도원이 언급된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간단히 살펴보자. 어떤 어부가 배를 몰다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동네에 다다르게 되는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과 얘기해보니, 오래전 전쟁(전국시대?)의 참화를 피해 도망온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사는 노인, 아이할것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몇일을 꿈과 같은 시간을 보내며 살다가 그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다시 복숭아가 만발했던 도원경으로 찾아가려고 햇으나 갈 수가 없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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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몽유도원도를 보자. 화면의 좌측 하단이 현실의 세계이고, 우측 상단이 무릉도원인데, 명색이 산수화인데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현실세계의 몇그루 나무와 도원안의 복숭아 나무만 보인다, 그래서 좌측의 현실세계와 우측의 도원을 구분짓는 것은 거친 기암 괴석/기괴한 암석의 험준한 절벽만으로 묘사된 산이다, 전체적으로도  이렇게 주로 험준한 절벽이 화면의 절반 이상을 넘게 차지한다, 현실과 이상 세계를 분리하고 구분 짓는 거칠고 험준한 절벽들, 주된 소재인 절벽으로 본다면 이상향을 그린 무릉도원도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혹시 안견의 화풍 자체가 원래 그러했기 때문에, 당시의 일반적 표현 법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안견의 그림으로 확실히 전하는 그림은 몽유도원도가 유일하기에, 그의 화풍에 영향을준 북송의 곽희 그림을 참고하면, 곽희의 산수화에선, 험준한 바위와 나무들이 서로 적절한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파악하면, 험준한 바위들을 주로 묘사해서 산수를 표현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아래의 곽희 산수화 참고)

 

더우기, 꿈의 근간인 도화원기의 무릉도원을 찾아온 속인과 도원의 거주민들은 어디에 있나? 좌측?엔 배한척( 사진 자료로는 확인불가), 우측엔 집이 2채만 보일뿐 배를 타고온 사람도, 도원의 거주민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몽유도원도의 배경이 되는 도화원기는 전란을 피해 태평성대의 꿈과 같은 생활을하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주체가 사라지고 배경만 남아있다, 허전해도 너무 허전하다, 사람들은 어디로 간것일까?

 

그 사람의 모습이 다른곳에 숨어있다. 바로 산악의 틈새  속에서 괴기스럽고 음산하며 그로데스크한 모습으로 숨어 있다. 대충 인상적인것 몇개만 발췌?했는데, 부지기수로 사람/얼굴이 숨어?있다. 거칠고 험준한 절벽에 사람의 모습이 숨겨있기에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도 안락한 도원의 생활을 만끽하는 거주민의 모습으로 보이지도 않으며, 이상사회인 무릉을 찾은 세속인의 희망어린 모습도 보이질 않고, 다만, 튀어나온 코와 벌어진 입 그리고 눈의 이그러지고 뒤틀린 인간 군상으로만 보인다.

 

  

매부리코에 두건을 스고 덥수룩한 수염을 그린 모습이 김명국의 달마도와 비슷한데,

어떤 공포로 인해 입을 벌리고 탄식하며 망연자실해 하는 측면 얼굴은 분위기상 전혀 다르다. 

 

다소 무덤덤한 얼굴.

 

검은색 피부의 다소 음흉하게 미소짓는 모습.

 

윗 입술이 툭 튀어나와 탄식하는 모습

 

우측의 흰 여백이 입을 벌리고 시선을 위로 향한 모습.

 

문드러진 코 검은 눈썹, 입에서 무언가 뱉어내는 듯한,,

 

묵직한 코로 입을 벌리고 초잔 뉸욿 우 상단을 바라보는,,,

 

검은 얼굴 큰코 조그만한 입,

 

그리고 이건 마치 남근(penis/fella)처럼 보인다. 발기한 남근의 일부가 손상된 형태로, 남근은 권력에 대한 욕망의 상징으로 보면, 욕망이 잘려나감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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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 그림은 북송대 곽희의 산수화이다.

계산추제도, 원경의 산세와 근경의 수목묘사, 느낌상으론 이게 이상적 풍경에 닮아있다.

 

굴석평원도, 기암괴석의 묘사가 특징적이나 바위나 산세의 표현은 부드럽다.

 

조춘도. 전경 부위가 다소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일반적으로 산수화는, 눈에 보이는 형사의 묘사에 충실한 북종화와  눈에 보이지 않는 시정(정서)이나 사의(의미)를 표현하는데 중점을 두는 남종화로 나뉜다. 그래서 '관원화가들 중심으로 된 묘사 위주의 북종화'와 '묘사보다는 내용을 드러내는 남종 문인화'로 분류된다.

 

안견은 북송에서 활동한 곽희 산수화의 준법(일종의 묘사방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곽희는 북송의 화가로, 형사에 기반한, 즉 묘사 중심의 북종화가이다. 그의 산수화 몇점을 보면, 얼굴의 형상이 보이긴 하나 안견의 묘사처럼, 산세의 절벽이나 산줄기의 표현이 그리 날카롭지 않고 전반적으로 좀더 부드러운 곡선의 형태로 보인다. 

 

조춘도의 원경 부분.

 

굴석평원도 근경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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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의 몽유도원도는  "꿈속에 노닐던 복숭아 꽃 만발한 이상향"이라는 내용이 주는 뉘앙스처럼 "몽환적이고 이상적이리 만치 부드러워야 함"에도 묘사방식/준법이 날카롭다. 또한 묵의 농담이 얼굴의 형상과 유사한 부분에서 눈에 두두러지게 강해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 양식의 산세들은 좌측하단 현실세계보다 점점 우측, 도원으로 갈수록 산세가 험악해지고 도원이 있는 우측 중상단도 상하좌우 사방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이 답답하게 둘러 쌓여 있어 시각적으로 다소 불편하게 보이며, 현실 세계와 이어진 화면은 좌측으로 트여있으며 그 뒤의 원경도 시원스럽게 탁 트여있으나, 우측의 복숭아 나무가 심어진 도원은 공간도 협소하고 우측도 마치 울타리처럼 꽉막혀 답답하게 보인다. 그래서 여백으로 탁트인 하늘과 바위/험준한 산세에 둘러쌓이지않은 현실의 세계가 더 편안하고 포근하고 안락하게 보인다.

 

또한 그림을 보는 순서도 현실에서 이상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이상 세계에서 현실로 나오는 순서이다, 즉, 그림은 한자를 기록하거나 읽는 순서 처럼,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고, 읽는 순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림 또한 좌측부터 말아 감아 보관하는 두루마리 방식이니, 그림을 보려면 우측부터 보게되는 셈이다, 그러니 그림을 보는 순서도 무릉도원의 풍경을 감상한 후 점차적으로 배가 놓여진 도원과 현실의 경계 다음으로 현실을 보게되는 셈이다, 두루마리 그림의 풍경을 감상자가 경험하는 시간적인 순서는 도원에서 시작해서 현실로 나오는 방식이다,

 

안견은 비록 그림 속에 생각을 글로 남기진 못했으나. 그림 고유의 문법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암호로 남긴듯 하다. 이는 "현세에서 무릉도원/유토피아를 꿈꾼다는것은 이기심과 욕망의 인간들로 가득찬 숲을 뚫고 가야하며 도착한 도원도, 그런 인간의 시선에서 벗어날수 없는 악몽과 같은 곳이다. 그러니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부귀와 영화로 가득찬 도원보다는 소탈한 현세에 자족하라"는 암호문이 아닐까? 그래서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한낱 봄날의 꿈과 같다는 일장춘몽이라는 어귀가 떠오른다, 한낮의 짧은 단꿈, 꿈에서 깨어나면 도원경,이상세계는 물거품 사라지고, 여기에서 사라져 없어진다.  유토피아란 "여기에 없다"란 뜻인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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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의 찬시(그림을 찬미하며 지은 시)중 집현전학사 출신 김수온의 시를 소개한다.

 "산수병풍에 붙여// 산과 물의 솜씨 신과 같고, 온갖 꽃 풀 봄날 같네. 반드시 모두 꿈인 것을, 누가알랴 그대와 나 모두 진여가 아님을."  <題山水屛/ 제산수병// 描山描水摠如神/묘산묘수총여신  萬草千花各者春/만초천화각자춘 畢境一場皆幻境/필경일장개환경  誰知君我亦非眞/수지군아역비진>

 

春,,一場,,幻境.....一場春夢. 시 전체 분위기도 불교적인  인생무상(김수온의 친형은 출가한 승려였다고 한다)을 드러내고. 찬시에도 일장춘몽이란 어구가 숨어 있다. 내가 보기엔 안견의 심중을 가장 적절히 파악해 감상평을 쓴셈이다. 김수온의 행로는 , 세조 집권기에도 관직을 지내며, 예종과 성종기를 거쳐 70 넘게 장수를 하며, 시와 문장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문장은 교과서에도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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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의 개인소장 그림중, 조선의 것은 30여점 모두 안견의 그림이었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던 안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유정란이 일어나기 6년전에 자신을 총애하던 안평의 꿈을 남달리 표현하고, 2년전에 먹 절도 사건을 일으킨 것은, 대부분의 권력 쟁탈이 그러하듯, 조선은 역성혁명으로 세워졌고, 태종의 경우도 왕자의 난으로 개국공신들이 짧은 봄날을 보냈다. 그리고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의 승계 문제도 그렇거니와,,,,,이러한 권력 쟁탈의 잠재된 아비규환 속 궁중을 거닐었던 화원의 눈에, 앞으로 벌어질 거대 권력의 암투가 빚어낼 피비릿내를 이미 예측했기 때문일까?

 

몽유도원도의 시문을 남긴 22명의 명사중, 김종서(金宗瑞) - 이현로(李賢老) 2인은 계유정란의 과정 속에 살해되며,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 이개(李塏)등 3인은 세조 2년 단종의 복위를 꿈꾸다 사육신으로 참형을 당하고, 고득종(高得宗)은 세종기에 몰/자연사하며,  이적(李迹) -  만우(卍雨) - 최?(崔?)의 행적은 왕조실록에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고, 나머지  12명 신숙주(申叔舟) - 정인지(鄭麟趾) - 김수온(金守溫; 상기 찬시의 작자) - 최항(崔恒)-하연(河演)[2011년 하연 부부 초상과 관련해서 강조] - 송처관(宋處寬) - 김담(金淡)  - 강석덕(姜碩德) - 박연(朴堧)  -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서거정(徐居正) 등은 세조 등극의 공신이 되거나, 세조의 집권기에 관직을 제수 받는데,  왕세자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그림 실력이 특출했던 안견의 기록이 정란 이후 세조실록에서 업급이 없다, 다만,  이후 성종 시기에 안견의 아들이 관직을 제수 받는 것과 관련해서 왕조실록에 언급된 것을 감안하면, 안견은 세조의 왕권 찬탈 이후, 세조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것 같다, 

 

 계유정란 발생 6년전 무릉도원을 이상세계보다, 현실세계를 더욱 중시하는 일장춘몽도 처럼 그렸으며, 정란 2년전에는 안평대군의 휘하?에서 일부러 피해버린 것은 이미 대세가 수양대군/세조에게 기울었음을 간파해서 일어난 안견의 의도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회피였을까? 아니면 마치 몽유도원도가 암시하는 그림적 문맥의 이야기처럼, 이상향인 도원에서 벗어나 현실로 되돌아가듯,  화원으로써 지내온 불안한 궁중생활보다, 현실속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사는 것이 안빈낙도라 생각했기 때문에 궁중을 벗어나 것일까? 아니면 화원의 관직에서 머물며 많은 산수화를 남겼으나 잣은 전란의 와중에 다수가 소실된 것일까? (그렇다면, 세조가 봉안한 탱화에 안견의 필적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또는 화원들의 세대 교체 과정에서 궐 밖으로 밀려난 것일까?  

 

서지학자 이양재 선생의 글을 보면, 대표적으로 알려진, 안견의 어릴적 이름과 호를 일정한 문맥으로 풀어 쓴 내용 중, 현동자/玄洞子라는 호에 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이양재 선생은 현/玄은 천자문의 '천지현황'처럼 하늘을 꾸며주는 수식어이며, 동/洞은 '공허하고 광활함'을 뜻하며, 자/子는 십이간지의 시작인 쥐 또는, 방위상으로 북쪽, 천문과 관련해 북극성을 뜻하며, 공자, 노자, 묵자 등, 본받을 만한 위대한 학자들의 경칭으로 자/子자를 붙이듯이, '넓은/洞 하늘의/玄 으뜸인/子 화가'라고 풀이 한다.( http://kr.blog.yahoo.com/onekorea/5  << 서지학자 '이양재' 선생의 안견 관련글, 저작권 관련 사항에 위배된다면 댓글 남겨 주세요, 확인 즉시 삭제하겟읍니다. )

 

 아무튼, 안견은 예술가로선 굵고 짧게, 인간으론 가늘고 길게 살다 간 셈인가?

 

 

[몽유도원도는 근대에 사츠마 번주의 소유였으며, 625 전란의 와중에, 국내에 매물로 내 놓은 적이 있었고, 현재는 일본 텐리대학에 중요문화재로 모셔져?있다, 위의 글은 자그마한 도판 몇개를 보고 판단한거라 실제의 실물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줄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몽유도원도의 내력은, 작고한 오주석 선생의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 1"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몽유도원도와 안견의 그림, 참고 링크 >>>  http://blog.daum.net/eyei2/15075258

출처 : 사이길
글쓴이 : 그림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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