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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헹구어 주는 것들 - 정채봉

조용한ㅁ 2014. 6. 5. 00:02

 
나를 헹구어 주는 것들 - 정채봉  
여름 한나절, 만원 버스 속에서 머리 가르마가 선명한 연인이 든 싱싱한 상추 다발은 
권태에 취해 있는 나를 상춧빛으로 헹구어 준다. 
깊은  산, 바위그늘 깊어 더욱 촘촘해진 이끼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찬물을  
청미래 잎사귀로 받아먹을 때. 
그 초가을 햇살 같은 맑은 물이 심장의 어디쯤을 적시고 가는지 
유리관을 들여다보는 듯 환하게  느껴질 때.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하기 어려운 낭떠러지에 깊은 바닷물 빛깔로  피어난 
도깨비꽃하고 눈이 맞았을 때. 
소나기가 한줄기 지난 다음  창을 열어 보면 성큼 다가서는 앞산, 
그리고 한 켜 더 쟁여진 풀빛하며. 
토란밭 언덕을 지날 때였다. 
무엇인가를 잊고 가는 것 같아서 뒤가 자꾸 돌아보였다. 
어른대는 것을 확인하려고 발을 멈춘 순간, 토란  속잎 저 안으로 숨는 것이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그때 아아, 들켜버린 알몸이 부끄러워서 이쪽을 향해 쏘아대는 
이슬방울로부터의  무지갯살을 대했을 때. 
유년 시절이었다. 
감꽃을 줍기  위해 수탉 울음소리에 일어났다. 
그리하여 눈을 비비며 토방에 내려섰을 때 '출렁'하고 발목을  적시던 새벽 달빛. 
감꽃을 주워 올리면 달빛 또한 따라 올라와서 밀짚 그릇을 남실대던 새하얀 사기 빛깔들. 
간밤에 꿈꾸다가 눈 오줌 자국을 바랜다고 
무지개가 떠오는 장독대 위로 올라가서 엉덩이를 치켜들고 있던 
네 살배기 누이에 대한 기억. 
그렇다. 
남녘을 돌아오는 순환 열차를 탔을 때 남원쯤에 이르면 
검정  유리창에 고등어 등빛처럼 언뜻언뜻 묻어나던 섬진강 쪽  먼동하며, 
앞자리에 앉은 단발머리 소녀의 하얀 블라우스 앞섶에서 판 박힌 코스모스 생 꽃자국도. 
어쩌다 공동묘지에 들렀을 때 누구의 무덤인가,  
빛바랜 신문지 위에 놓여 있는 종이 잔이 보이고, 
종이 잔에 남아 있는 소주 속에서 맴돌고 있는 흰 구름 한 점을 발견했을 때. 
돌덩어리를  들어냈다가 우연히 보는 늦가을 씨앗의 실낱같은 어린 발. 
오솔길의 솔가리에 내려 있는 서리.  
외딴 두메 옹달샘에 번지는 메아리 결. 추석 무렵, 
재 너머 마을에서  들려오는 농악대의 은은한 징소리. 
모든 것이 무정한 비무장지대에서 그래도 하늘에만은 금이 없어 무지개가 나뉘지 않고 
뜨는 것을 보았을 때. 
그리고 "아"하고 소리친 나의 소리가 저들의 산을 돌아서 
"아"하고  메아리 되어 돌아왔을 때. 
한겨울 며칠이고 눈이 쌓여서 비상 도로마저도 끊기고 만 어느 날. 
우연히 참호 근처 눈 위에서 발견한 까만 토끼 똥 몇 알. 
음력설이 가까워졌을 때 무 구덩이에 파낸 무들의 노오란 순. 
아침 이른 시간의 어시장 풍경 또한 나를 헹구어 준다. 
태평양을 거스르고 다닌 상어의  늠름한 지느러미며, 
동해의 늘 푸른 비린내를 뻐끔뻐끔 내놓고 있는 동태들. 
가을이 설핏 물러가는 초저녁. 갑자기 겨울을 느끼게 하는 찬  바람이 
겨드랑 밑을 파고 들 때. 
폭풍이 몰려오기 직전의 아침노을. 
건장한 청년의 어깨 근육처럼 꿈틀거리는 먹구름 사이로 깜짝깜짝 내비치는 번개. 
무서리가 내린 새벽 정거장에 막 도착한 열차가 뿜어내는 우유 같은 증기. 
목욕탕에서 나오는 소년의 빨간 뺨. 
깊은 산 속 연못에  들어앉아 있는 쪽빛 가을 하늘. 
외딴 두메 마을 공소. 홀로 계신 성모상 앞에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소주병에 꽂혀 있는 산나리꽃 한 송이. 
나를 헹구어 주는 것은 이 푸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