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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 박완서

조용한ㅁ 2014. 6. 20. 00:28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 박완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만

얼마큼 적으냐

- 김수영

 

한창 기억력이 좋을 나이엔 백 수 가까운 시를 외고 있었다. 주로 김소월, 박인환 등의 시와 번역시도 꽤 포함돼 있었다. 시 독특한 운율과 멋있는 구절에 대한 그 나이 독특한 감수성 때문에 그럴 수 있었을 뿐이지, 시와 참맛에 대해 뭘 좀 알고 있었던 것 같진 않다. 또 그럴 나이도 아니었다. 얼마 전 책을 정리하다가 「解放前後詩人選集」인가 하는 데서 박인환의 시를 다시 읽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멋있는 구절에 대한 감수성마저 둔화 되고 보니 한때 그 시를 욀 수 있었던 게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지금은 외고 있는 시가 거의 없다. 김소월의 시 서너 수 정도를 완전히 욀 수 있을 정도다. 이것들이나마 곧 잊혀질 것이다. 자주 떠올리지 않으므로.

 

이런 이른바 애송시와는 상관없이 나의 일상에 자주 떠오르는 시가 있다. 떠오른다기보다는 가로 걸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고상한 게 남의 구질구질한 일상을 간섭하는 것도 뭣한데 더군다나 문지방처럼 가로 걸려서야 시의 품위에 관한 문제하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 시의 품위에 관한 문제이기보다는 차라리 나 자신의 품위에 관한 문제로 돌리고 싶다.

김수영의 시에 이렇게 시작되는 시가 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되고 내가 욀 수 있는 것도 거기가지다. 중간은 왼다기보다는 이야기의 줄거리처럼 대강대강 기억하고 있고 건너뛰어서 마지막 구절을 외고 있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김수영의 시는 감수성도 기억력도 한창 쇠퇴해 갈 나이에 접했건만 <꽃잎> 등 몇 수는 거의 완전히 욀 수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는 이렇게 잘 외지는 김수영의 시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나는 이 시가 김수영의 여러 시 중에서 잘된 시인지 그저 그런 시인지 잘 모르겠다. 더 솔직히 말한다면 김수영이란 시인이 훌륭한 시인인지 그저 그런 시인인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되는 그의 시를 통해 그를 나와 매우 친했던, 서로 약점까지 속속들이 알아서 점잖고 싶을 땐 슬쩍 피하고 싶게 친했던 사람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나야말로 얼마나 하찮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고작 불쌍한 안내양한테 분개하고, 1 백 20원짜리 연탄이 80원짜리 연탄보다 화력이 약하다고 분개하고, 동평화시장에서 산 홈웨어에 달린 열 개의 단추가 하나도 안 빼고 차례차례 모조리 떨어져서 다시 달고 나서 분개하고, 객식구가 비산 참기름을 헤프게 썼다고 분개하고 일기예보가 안 맞아서 분개하고, 꿀 같은 낮잠을 깨운 불청 방문객들을 증오한다. 고작 그 정도가 나의 분개의 분수이다. 그 정도의 분개의 경력을 가지고 엉뚱하게도 정의파를 자처하고 싶을 때마다 이 싯귀가 떠오르면서 나는 그만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움찔하고 만다. 그렇다고 그 싯귀가 주는 게 준엄한 경고나 가차없는 비난이란 소리가 아니다. 냉소적인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연민? 그건 필시 시인의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으련만 그것이 읽는 사람까지를 비웃는 듯 위로한다. 마치 동변상린처럼.

 

그러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떠오르는 이 싯귀는 나를 참담하게 낭패시키고 만다. 젖 빨던 시절로부터 축적한 용기에다가 뱀의 지혜까지를 빌어다 자신 있게 완성한 작품이 실은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는 」나의 일상의 옹졸한 분개의 한도에서 한 발자국도 못 벗어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애꿎은 연탄재나 힘껏 쓰레기통에 미어부딪쳐 본다. 그리고 그 분분한 먼지 속에서 중얼거린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참으로 자신과, 자신의 분노와, 지신의 작품이 하찮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새해의 소망을 내 분개가 큰 것에 미치도록 크게 해달라고 빌진 않겠다. 더군다나 분개로부터 아주 벗어나게 해달라고 빌지도 않겠다. 어쩌면 나는 하찮은 일에나마 분개하지 않을진대 차라리 나를 죽게 하옵소서, 라고 빌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적마다 가슴이 뛰노는 일이 어렸을 적부터 어른 된 지금가지 변함이 없는데 만약 그렇지 않게 될진대 차라리 죽게 해달라고 워즈워드의 소망에 비해 그건 너무도 삭막하고 비시적(非詩的)인 소망이다. 그런 걸 모르진 않더라도 어쩌랴. 한번 정정당당하게 분개하지 못하고 그걸 비켜나서 하찮은 일에 속을 끓이는 옹졸함과 비굴함이 오직 내가 설 수 있는 떳떳한 자리의 말석에서의 일이니 어쩌랴. 이건 역설도 아니고 말장난도 아닌 곧이곧대로의 고백이다.

그래서 내가 <어느 날 古宮을 나오면서>를 정말로 좋아하는 까닭은 그 첫구절에 있지도 않고 마지막 구절에도 있지 않다. 실은 중간쯤에 있는,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길

이 구절 때문에 그 시가 좋다. 그 구절엔 옹졸함에 대한, 비굴함에 대한 한결같은 자조(自嘲)와 연민에 문득 떳떳한 긍지 같은 게 드러나 보여서다.

그러나 보다 자주 처음 구절을 떠올리면서 나는 내 일상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