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라면을 끓이며

조용한ㅁ 2014. 7. 1. 23:12

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신용목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지만
아침마다 눈을 뜬다, 가장 분명한 당위는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나무들은 침묵으로 자신을 견딘다,

눈부신 높이의 부르튼 침묵 속에서

아무도
운명에 의견을 제출한 적 없다―내가 사는 곳에는 네 이름을 대신하는 기둥들이
푸른 지붕을 올리고,

흔들리는 창문으로 흔들리다 물드는 창문으로 물들다가 떨어지는 창문으로
떨어지는 잎들이

깨지는 창문으로
어른거리는 땅 속에 녹슨 유적처럼 환하게 박혀들 때,

엘리베이터는 자주 중세를 지나간다, 지하 1층에서 발굴되는 것들―아름다운 창문을 달고
툭, 꺼지는 조명처럼

나의 절망은 고대에 묻혀 있다
지하 2층

아무도 파보지 않는 깊이에

내가 사는 곳에는 새들의 지저귐이나 골목 어귀에서 나 대신 머리를 감싸 쥐고 쭈그려 앉은 젊은 남자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4층에 산다 30억 년쯤 뒤의 지층에

나무는
깨진 그림자를 땅 속에 박아놓았다―뿌옇게 번지는 빛의 뿌리들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지만 날마다 멀리 고층아파트 불빛을 바라본다
우리의 미래가 닿을 수 없는 시간을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등

 

 

 

 

 

라면을 끓이며
  

박후기


라면을 끓인다
천변 평상 위에 걸터앉아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마음을 끓인다
뜨거운 국물에
입을 댄다 기어이
입을 덴다
국물도 없는 팍팍한 세상
냄비 바닥을 뒤지며
해물 건더기나 건지고 있는
볼품없는 나무젓가락도 한때
푸른 잎을 매달고
바람을 휘어잡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돌 틈 사이로
물 흐르듯 여름이 지나가고,
쓰다 만 열망이
어딘가 남아 있을 거라고
붉게 물든 개옻나무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마흔살,
평상 위에 놓인 책이 말하는 것은
아직은 나의 미래에 관한 것
내게 필요한 것은
끝없는 인내와 약간의 운,
그리고 청춘의 부재를 설명해줄
그럴듯한 알리바이 한소절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3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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