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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 아버지와 화가 아들의 인생평행선

조용한ㅁ 2014. 7. 2. 00:43

  

(1) 사업가 아버지와 화가 아들의 인생평행선
   - 연합뉴스 2003년 02월 21일 임형두기자


 

지난 1월 31일 밤, 서울의 한 의료원 병실. 팔순을 넘긴 노인이 삶의 끝자락에서 가쁜 숨


 

을 내쉬며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딸, 사위, 손자, 손녀의 손을 차례로 잡아


 

나가는 그의 얼굴에는 84년 인생이 남긴 회한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다음은 아들 부


 

부 차례. 아버지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죄책감으로 시달려온 아들은 오열하며 속죄의


 

손길을 내밀었다. 생명이 사위어가는 아버지의 손마디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으나 맥박


 

은 희미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원망의 눈길을 힘없이 보내던 아버지. 아들 내외의 손


 

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리고서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내


 

희망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구나" 아버지는 이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졌


 

고, 그로부터 닷새 뒤 세상을 떠났다. 생사의 갈림길에서조차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 돌이켜보면 이들은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그으며 40년 넘는 세월을 엇갈림 속에


 

살아왔다. 아버지의 외면은 기대를 저버린 아들에 대한 실망과 야속함의 표시였다. 화


 

가 전광영(59)씨. 그는 병상의 아버지와 헤어지던 날 작업실로 돌아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 가슴에 남은 상처가 그토록 컸더란 말인가. 나는 정녕 끝내 용서받지 못


 

할 죄인인가. 아내 역시 문을 걸어잠근 채 나오지 않았다.


 

1남3녀의 외아들로 태어난 전씨는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이었다. 게다가 2대 독자였다.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이 아들을 중학교 때부터 서울로 유학보냈다. 고향


 

인 강원도 홍천에 붙잡아두기에는 아들이 너무 귀하고 똑똑했다. 무학의 아버지는 일찍


 

부터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판.검사를 하거나 가업을 이어받아 자신이 반석


 

에 올려놓은 가문을 찬란히 빛내주리라 믿었다. 그는 강원도에서 최초로 연탄공장을 운


 

영했고, 사슴농장에도 뛰어들어 사업가로 성공했다. 국내의 선구적 건축자재회사를 차


 

린 것은 1958년이었다. 가세가 쭉쭉 뻗어나가는가 싶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묘한 분위기


 

가 감지됐다. 서울로 간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환쟁이'가 되겠다며 그림에 빠


 

져든 것이다. 이에 대해 전씨는 "미술의 길은 내게 숙명과도 같았다"고 회고한다. 가고


 

싶어서 가고 말린다고 해서 가지 못하는 길이 아니라는 얘기다. 아버지와 아들의 길이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 이후 부자는 서로 마음을 닫은 채 긴긴 세월을 지나왔


 

다. 아버지는 설득과 노여움으로 아들을 자신이 원하는 길로 이끌어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미술의 길이 '업(業)' 때문인 것같다는 아들은 도무지 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


 

울이려 하지 않았다.


 

고집과 고집의 숨막히는 대결. 아들은 대학 입시원서를 홍익대 미대에 냈고 대학원 전


 

공도 회화를 택해버렸다.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지원을 뚝 끊었다. 전씨는 미국의 대학


 

원에 진학한 뒤 13년 동안 그곳에서 눌러 살았다. 그 사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것은 딱


 

두 번. 아버지는 국제전화로 "지금도 안 늦었다. 와서 가업을 계승하면 용서하겠다"며


 

'통첩성' 애원을 했으나 아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가고 사업이 어려워질수


 

록 아들에 대한 미움은 산처럼 커갔다. 아버지는 모든 것이 '몹쓸 아들놈' 때문이라고 여


 

기며 꿈을 뭉개버린 자식을 증오했다. 그러나 아들은 매정하게도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 사이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작가로 성공하겠노라


 

고 큰소리는 쳤지만 막상 화가의 길은 멀고 험했다.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을 때


 

자신이 설 자리는 화단에 없었다. 학맥과 지연 등 이러저러한 인연의 사슬로 얽히고설


 

킨 한국사회는 그를 더욱 절망하게 했다. 대관화랑마저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뛰어다니


 

며 사정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미술의 길은 아득하고, 아버지의 채근은 그칠 줄 몰았다. 당장 급한 것은 생활고에서 벗


 

어나는 일. 호구지책으로 서울 강남에서 입시학원을 운영해 22명의 강사를 둘 정도로 성


 

공했으나 이는 그가 가려는 방향이 아니었다. 학원 한 켠에 작업실을 차려놓고 붓과 씨


 

름했지만 대가의 길은 50고개가 넘도록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전씨는 1995년 시카고 아트페어에 출품하면서 일약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랐


 

다. 이때가 50대 초반. '빛' '집합' 시리즈로 이어지는 한지 오브제 작업은 외국에서 호평


 

받으며 그에게 비상의 날개를 달아줬다. 행운은 계속됐다. 외국 아트페어의 단골이 됐


 

고, 국내 초대전도 줄을 이었다. 2001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국립현대미술관 개인


 

전을 열었고, 이 덕분인지 외국 유명미술관과 갤러리의 초대장이 쇄도했다.


 

미술계에서 샛별로 떠오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국립현대


 

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전을 비롯해 20여 차례의 개인전이 열렸으나 아버지는 한번도 전


 

시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생전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씨 부부는 아버


 

지가 손길을 뿌리친 데 대한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홍천의 선영에 안


 

장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시간상의 이유만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이유를


 

바닥에서부터 회의하고 죄책감으로 몸부림치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소망한 길을 갈 수


 

없어 하루에도 몇 번씩 절망한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순순히 도와주었더라면 오늘의


 

성공이 있었을까도 가상해본다. 나아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과연 효도일까에 대


 

해서도 자문해본다. 한편으론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남편을 믿고 따라와준 아내와


 

'그림 그리는 우리 아빠 멋쟁이'를 외치는 자식들의 응원은 처진 그의 어깨를 일으켜 세


 

우는 힘임을 깨닫는다. 전씨는 지난해 가을 경기도 분당의 한 야산 자락에 큼직한 작업


 

실을 하나 지었다. 무려 300여평의 작업공간 두 채다. 물론 아버지는 여기에 모셔보지


 

못했다. 작업실 이름은 '2002-2032'. 앞으로 30년 동안 힘차게 활동하겠다는 것이다. 마


 

라톤으로 치면 아직 반환점도 안 돌았다고 자신한다. 왕성한 건강은 태산같은 일들을


 

성취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의 시선은 한국에 머물지 않고 이미 세계로 나가 있


 

다.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 속에 새로운 웅비를 꿈꾸는 '불효'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