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nri Emile BenoIt Matisse
French Painter Sculptor 20C expression!!ism 1869. 12. 31. ~ 1954. 11. 3.
|
La musique Oil in canvas 1939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USA “우리는 어떻게 하늘에서, 나무와 꽃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을지 배워야한다. 어떻게 우리 자신의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또 힘든 하루와 빛이 우리를 둘러싼 안개로 빠져드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배워야 한다.” 현대 화가들이 공허와 무의미에 붙들려 있었던 데 반해, 마티스는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감과 기쁨을 평생을 통해 추구해갔다. 자아와 세상의 조화 속에서 즐거움으로 충만한 그림을 제작하였던 화가로 말년으로 갈수록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은 변함없이 충만 된 행복과 기쁨으로 낙관적이었다. 이 <Music> 또한 마티스의 내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빨강, 노랑, 초록 등..강열한 원색들이 마치 춤을 추듯 어우러져 밝고 즐거운 리듬감이 바로 음악이 되어 흐른다.
|
Interior in Aubergines
Gouache on canvas 1911-12
Musé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Grenoble France
“내가 화면에 놓는 모든 색조로부터 마치 음악의 화음과도 같은,
색의 살아있는 화음이 연주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양한 색채는 서로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색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
Corner of studio
1912
|
Interior with Etruscan Vase
Oil on canvas 1940
The Cleveland Museum of Art Cleveland USA
“내가 탐구하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표현이다.
그러나 표현은 인간의 얼굴에 반영된 정열로써 구성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화면의 회화적 질서 그 전체가 표현이다. 인물이라던가 대상의 위치, 그것들을 둘러싼
여백의 공간, 비례, 이들 모두가 하나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
The Blue Window
Oil on canvas 1912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NY USA
|
Pink Nude
Oil on canvas 1935
Baltimore Museum of Art Baltimore MD USA
|
Red Interior. Still Life on a Blue Table
Oil on canvas 1947
Kunstsammlung Nordrhein-Westfallen Düsseldorf Germany
“색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보다도 표현에 소용된다는 일이다.
나는 아무런 선입관 없이 색을 칠해 나간다.
어떤 색이 나의 흥미를 끌면 그 색을 제일 존중하고
다른 모든 색은 어느 틈엔지 약화시켜 놓는다.
색체의 표현력은 내게는 완전히 본능적으로 이해된다.”
그는 색을 사용하는 것에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의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색이 가진 매력을 충분하게 활용한 화가이다.
무엇보다 뜨거웠던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의 심장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태양이 되어 독특한 색채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
Blue Table-Cloth
Oil on canvas 1909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
French Window at Collioure
Oil on canvas 1914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마티스는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고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너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
그의 스승이었던 귀스타브 모로의 예언이다.
|
Oriental Rugs
Oil on canvas 1906
Musé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Grenoble France
|
Laurette's Head with a Coffee Cup
Oil on canvas 1917.
Kunstmuseum Solothurn
|
Polynesia, The Sea
Gouache on paper cut-out 1946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이 작품은 마티스가 말년에 창안해 낸 기법으로
톤이 다른 푸른색조의 사각형 색면을 교차되게 배치한 바탕에
흰색 종이를 오려 붙인 것이며, 해조류의 문양으로 테두리가 쳐져 있고,
그 안에 하늘과 바다 밑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문양들이 배열되어 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 모양과
바다 밑의 해조류의 일렁이는 모습들의 형상들이 드넓은 바다를 연상시킨다.
|
Still Life with Oranges
Oil on canvas 1913
Louvre Paris France
|
A Sitting Rifain
Oil on canvas 1912-13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Merion PA USA
|
The Red Studio
Oil on canvas 1911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NY USA
마티스의 대표작 그림 중의 하나이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로 다른 형태의 테이블 위에 꽃이며
과일들이 가득 놓여 져 있는 등 모든 것들이 평면에 꽉 차게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거나 어지러워 보이지 않고 어우러지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주조색인 빨강 속에 융합되어 흡수되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
The Bank
Oil on canvas 1907
Kunstmuseum Basel Basel Switzerland
|
The Dance
Oil on canvas 1910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어린아이가 사물에 다가갈 때 느끼는
신선함과 순진함을 보존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평생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서도
세계의 다른 사물들로 부터 에너지를 실어오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
<댄스>는 1910년 모스크바의 수집가 시튜킨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대작으로
살롱에 출품되어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다.
<댄스>는 1907년에 제작한 <삶의 기쁨>에서
화면 뒤쪽으로 보이는 원무를 다시 주제로 삼은 그림이다.
<삶의 기쁨>에는 피리 연주자와 춤추는 사람들의 뒤얽힌 몸이 묘사되어 있는데
세상의 근원을 상기시키며, 하늘과 땅 사이의 푸른 들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이 <댄스>는 극히 단순하게 묘사한 그림이지만 역동적인 리듬감이 느껴진다.
대상의 구성과 배열 등의 치밀하게 계획된 구도 위에
반복적인 밑그림 작업을 통해 불필요한 대상을 지워나가며 단순화 시켰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은 평면적이고 극히 단순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역동성이 화면에 그대로 나타난다.
|
Large Red Interior
Oil on canvas 1848.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이 작품은 1946년부터 2년 동안 몰두한 '실내 풍경' 시리즈 중 마지막 작품이다.
그림의 무대는 마티스의 실제 아틀리에라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벽과 바닥의 구분이 없고 오직 검은 선으로 처리한
테이블과 의자의 경계를 통해서 최소한의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그림 왼쪽에 창문처럼 보이는 사각형 그림 액자로 인해 공간감을 조성한다.
이 그림의 특징은 화려한 색채 감각과 평면성이다.
|
Spanish Still Life (Seville II)
Oil on canvas 1911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색채에는 각기 고유의 아름다움이 있다.
음악에는 소리를 보호하려고 애쓰듯, 우리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잃어서는 안된다.
구성은 색채의 아름다움과 신선함을 살리는 일이다.”
마티스는 1910년의 뮌헨 '근동미술전'에서 받은 인상과 함께,
1911∼1913년 두 번에 걸친 모로코 여행으로
이전의 포브(fauves) 시대와 다른 장식적인 현란한 색채를 사용하여
특히 아라베스크나 꽃무늬를 배경으로 한
평면적인 구성이나 순수색의 병치(竝置)로 독특한 작풍을 창조하였다.
그는 항상 색채를 마치 쏟아내듯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주저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조용하게 다양한 통일을 추구하였다.
|
Destiny Le destin Plate XVI from Jazz
Gouache on paper cut out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만큼
평면적이고 자유로운 색채가 강조되었다.
그는 색채도 혼합하여 마치 가위를 연필처럼 사용해서 색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 효과는 방법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직접적이었다.
마티스는 색종이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 명확한, 그리고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적이라 할 만큼의 질서감과 절도감을 보여주었다.
|
The Black Table
Oil on canvas 1919
Private collection
마티스의 성숙한 화풍이 갖고 있는 중요한 특징은
형체를 단순하게 하고 원색을 대비시켜 매우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또한 평생을 바쳐 추구한 가치는 생명력을 색채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색채는 넓은 영역에 걸쳐, 평면적이지만 밝게 칠해져 있으며
그림자는 사실상 완전히 제거되었다.
묘사된 공간은 극단적으로 평면화 되어 원근법의 규칙이나 입체감을 내기 위한
관습적 생략기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한 장식미술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하고 자유분방하지만,
그림 전체의 효과는 이슬람의 양탄자나 직물 및 도자기의 무늬를 연상시킬 수도 있다.
그의 소재 선택과 그 처리 방법에서 낙천주의와 쾌락주의를 엿볼 수 있으며,
이들 소재는 지성과 관능을 동시에 암시해준다.
옷을 입은 여인뿐만 아니라 많은 습작물들이 있지만
판에 박힌 관습적 정취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The Vegetables
Gouache on paper cut-out 1951
|
The Piano Lesson
Oil on canvas 1916
The Museum of Modern Arts New York NY USA
“예술가는 최선의 자아를 오직 그림 속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비극일 따름이다.
작가가 분석하고 개발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Still Life with Vase, Bottle and Fruit
Oil on canvas 1903-1906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
Woman with a Hat
Oil on canvas 1905
Private collection
야수파(Fouvism)
파리의 젊은 화가들은 기존의 모범이 되는 양식을 버리고
강렬한 색채와 대담하고 격정적 정서를 특징으로 하는
급진적인 새로운 표현주의 양식을 발전시켜 갔다.
즉 감정의 폭발을 표현하기 위해 튜브에서 바로 짜낸 화려한 원색들을
도발적이고도 직접적인 수법으로 구사하며
회화의 주제에 대한 강렬한 표현적 감흥이 담았다.
이러한 경향이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05년의 연례 가을 살롱 전으로
마티스는 <모자를 쓴 여인>과 <창>을 사롱 도톤느에 출품했다.
이 전시회에는 색채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도발적이고
다양한 초기의 야수파적 경향을 보였는데
당시 관람객들은 큰 충격을 받아 비난하며 불쾌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마치 포브(fauve-야수)같다!”
충격적인 이들의 색채를 보고 보수적인 예술비평가 루이 보셀이 악평을 하여
‘야수파’라는 용어가 그때부터 탄생된 것이다.
당시 이러한 야수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화가가
바로 현대미술의 거장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는 앙리 마티스이다.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간 화가.
자신이 선구적으로 개척한 길을 고수하면서
자신이 그리는 외부세계와 내면의 정서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균형을 형상화했다.
“포비즘(야수파)은
어디까지나 표현수단의 순수한 것을 재발견하는,
용기의 고취이며 추진에 지나지 않는다.”
드랭·블라맹크 등과 함께 시작한 이 운동은
20세기 회화의 일대 혁명이며, 원색의 대담한 병렬로 강렬한 개성적 표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야수파는 조직적인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단명한 운동이었고,
화파를 형성한 후에도 공식화된 강령을 갖춘 적이 없었다.
야수파에 속했던 화가들은 곧 각자의 기질에 따라 표현주의나 입체파,
또는 일종의 신전통주의 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마티스는 야수파의 대표적인 화가이고 야수주의가 쇠퇴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야수파의 화법을 유지, 발전시키면서 그만의 예술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그의 이러한 현대적인 화풍과 예술 이론은
본격적인 모더니즘 미술이 꽃피는데 크게 기여했다.
|
Coup de Soleil (Sun's Ray)
Oil on canvas 1917
|
Morning
Gouache on paper cut-out
|
The Algerian Woman
Oil on canvas 1909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
The Window (Interior with Forget-Me-Nots)
Oil on canvas 1916
The Detroit Institute of Arts Detroit USA
|
Zulma
Gouache on paper cut-out 1950
Statens Museum for Kunst Copenhagen Denmark
|
Dishes and Fruit on a Red and Black Carpet
Oil on canvas 1906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
Red Fish in Interior
Oil on canvas 1912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Merion PA USA
|
Young Woman in a Blue Blouse
(Portrait of Lydia Delectorskaya, The Artist's Secretary)
Oil on canvas 1939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마티스의 사랑
이 그림의 모델은 다름 아닌 마티스의 비서였던
리디아 델레츠토르스카야(Lydia Delectorskaya)이다.
유복한 의사의 딸이었던 리디아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모를 잃고
러시아를 떠나 프랑스 니스로 온 가난한 아가씨였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1932년 리디아는 임시직으로 마티스의 스튜디오 비서로 일하면서
마티스와 마티스 부인의 집안일도 맡아 하게 된다. 마티스의 비서로 일한지
3년째 되던 해인 1935년, 마티스는 리디아에게 모델을 서줄 것을 요청하고
리디아는 마티스의 요청에 응해 모델을 서게 된다.
리디아는 검은 머리에
짙은 눈동자를 가진 여느 프랑스 여성과는 전혀 다른 외모로
마티스의 눈에는 금발에 푸른색 눈동자,
백설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가 특별해 보였을 것이다.
그 때 리디아의 나이는 25세, 마티스는 65세였다.
마티스는 리디아에게 손도 대지 않고 옷을 벗으라는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부드럽고 정중한 태도로 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리디아는 마티스에게
길들여지게 되고 마티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5년부터 6개월 동안 리디아는 마티스를 위해 모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마티스 부부에게 위기를 가져오고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에(Amélie)는 마티스에게 최후통첩을 한다.
고민하던 마티스는 아멜리에를 선택하고 리디아를 해고 하지만
성난 아내의 분노는 사그러들지 않았고 1939년 초,
아멜리에는 41년간의 오랜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남편 곁을 떠나고 만다.
마티스가 70세 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리디아는 마티스를 돕기 위해 파리에 있던 마티스의
스튜디오를 찾아오고 독일의 선전포고가 있었던 직후라 두 사람은 피난길에 오른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프랑스를 떠돌면서도
그녀는 끝까지 마티스의 곁에 머물며 그를 돌본다.
마티스의 스튜디오를 찾는 사람들은 화가로서, 또 남자로서
마티스가 리디아에게 의지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초췌한 늙은 화가에게 젊은 그녀는 생활의 활력이었고
동시에 화가인 마티스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1954년 11월 3일 마티스가 사망하기 전날,
한 여인이 마티스가 입원해 있던 병실을 찾았다.
마티스는 볼펜으로 그녀를 스케치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주인공은 바로 리디아였다.
|
Still Life with a Head
Oil on canvas 1916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Merion PA USA
|
Luxe, calme et volupté(사치, 평온, 쾌락)
Oil on canvas 1904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마티스가 신인상주의와 야수주의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그린 대작이다.
폴시냑의 점묘주의 방식으로 그린 그림인데
이후 <생의 기쁨>을 그리면서 야수주의 기법으로 변하게 되는 과정의 작품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사치, 평온, 쾌락>이라는 타이틀은 현대 시의 혁명가로 알려진
‘악의 꽃’의 시인 보들레르의 시 구절에서 연유된 것으로 옮겨 본다.
Invitation au Voyage(여행에의 초대)
내 아이여, 내 자매여
그곳에 가서 함께 사는 감미로운 꿈을 꾸자꾸나
널 닮은 나라에서 한가로이 사랑하고, 사랑하다 죽고
안개에 젖은 하늘에 축축해진 태양은
내 영혼을 위한 아름다움을 지녔으니
그토록 신비스럽게 그들의 눈물을 지나와
너의 그 눈 속에 반짝이도록
거기에 모든 게 호사롭고
조용하고 관능적인 질서와 아름다움 뿐
우리의 방을 장식하는 긴긴 세월에 닦여 윤기 나는 가구들
줄기의 그윽한 내음과 섞인 가장 희귀한 꽃들의 향기
풍요로운 천정들 깊숙한 거울들 동양의 찬란함
모든 것이 각자의 감마로운 언어로
비밀스런 영혼을 노래 하네
거기에 모든 게 호사롭고
관능적인 질서와 아름다움 뿐
부유하듯 유머로 떠돌다가
이제 잠잠해진 배들이 정박한 운하를 보라
그것은 세상 끝에서 온 털끝만한 욕망이라도 달래주기 위함이라
지는 해들은 들판과 운하와 마을 전체를 물들인다
히야신스와 황금빛으로 세상은 잠이 든다
이 따뜻한 햇빛으로
거기엔 모든게 호사롭고
조용하고 관능적인 질서와 아름다움 뿐
- 샤를르 보들레르 -
|
Icarus
Illustration for the book ‘Jazz’
Screen-print after Gouache on paper cut-out 1947
예술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 〈재즈 Jazz〉(1947)를 출판하면서
곁들인 화려한 색채 삽화중의 하나로,
훗날 거대한 작품으로 재탄생 했는데 여기에 이용한 기법을
그는 ‘가위로 그린 소묘’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림에 들어갈 소재들을 색종이(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과슈로 직접 칠한 종이)에서 잘라낸 다음 풀로 붙인 작품이다.
“가위는 연필보다 더욱 감각적이다.”
<재즈>로 대표되는 일련의 색종이 그림 연작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자유분방한 조형감각으로 유화에서 느낄 수 없는
순수한 색과 단순한 형태로 인한 환희의 춤과 노래를 표현 하고 있다.
볼수록 그 역동성과 단순함에 빛을 발하는 듯 눈부시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를 1950년대 초의 ‘가장 젊은’ 화가이자,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로 만들어주었다.
|
Still Life Checked Tablecloth
1903
|
Naturaleza
Muerta con Meseverde
(Still life with green inn)
1928
마티스는 초창기와 말년의 작품 경향이 매우 다르다.
그의 예술은 차차 성숙해져
보색관계를 교묘히 살린 청결한 색면 효과 속에 색의 순도를 높여
1923년경부터 1930년대에 걸쳐 확고한 마티스 예술을 구축함으로써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다.
이 작품은 현대 미술의 시작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 작품이다.
강렬한 색채와 화려한 장식성이 보이지 않으며 평면성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초기 야수주의 화풍을 거쳐 단순함과 장식성이 두드러지는 작품을
선보이다가 균형과 조화로 접어드는 시기의 작품이다.
|
The King's Sadness
Sadness Gouache on paper cut out
마티스의 말년의 힘들었던 삶은 그의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티스는 말년에 아내와 헤어지고 성장한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장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받은 1941년부터
관절염 등의 고통으로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침대에 누워서 보내야 했다.
1950년부터는 천식과 심장병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1930년대 초에 그의 모델이었던 러시아 여인 리디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니스가 내려다보이는 시미에의 레지나 호텔에 있는 널찍한 화실에서 살았다.
그는 화실에 놓인 침대에 누운 채 기다란 장대 끝에 매달은 크레용의 도움으로
벽화 크기의 대형 그림을 그려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서 창조력이 약해진 조짐이나
슬픔의 흔적, 질병의 고통 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당시의 작품들은 그가 평생 동안 그린 그림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고 완숙하며 평화롭고 낙천적이다.
이 <왕의 슬픔>처럼...
|
The Egyptian Curtain
Oil on canvas 1948
Private collection
색채를 해방시킨 화가
대부분의 화가들은 사물을 그리는데 색깔 자체가 주는 느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사물과 같은 색깔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티스는 사실적인 그림에 흥미가 없었다.
마티스가 평생을 바쳐 추구한 가치는 생명력을 색채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즉 눈으로만 보는 그림이 아니라 풍부한 빛깔을 통해 마음으로 보는 그림이 되기를 바랐다.
사물에 대한 고정적인 색깔에 대한 규범을 거부하여 마티스에게는
인간의 몸은 파란색이 될 수도 있었고 평범한 실내가 빨간색으로도 될 수 있었다.
마티스를 통해 색채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사물의 원래의 색을 고집하지 않고 그 사물의 고유의 색을
떼어 내 버렸기 때문에 ‘색채를 해방시킨 화가’라고 불린다.
또한 마티스는 평생을 통해
그의 그림 속에 기쁨과 행복감을 추구하려고 노력한 화가이다.
|
The Dance
Oil on canvas 1932-33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Merion PA USA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메리언에 반스 재단의 건물에 장식한
대규모 벽화 연작의 하나로 1992년 미술 복원가들이
마티스가 말년에 살던 레지나 호텔에서 발견한 <미완의 춤>이다.
마티스는 우선 종이에 물감을 칠한 뒤에 잘라서 썼다.
종이에 칠하는 색깔 수는 제한되었으며
인물은 회색, 배경은 검은색, 그외에 파란색, 분홍색이었다.
색칠한 종이들을 팔레트에 물감을 늘어놓듯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배열한 다음
가위로 자른 후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목탄으로 종이의 윤곽을 수정했다.
|
Seville Still Life
Oil on canvas 1911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
Woman in a Purple Coat
1937
|
Harmony in Red
Oil on canvas 1908-1909
177 x 218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마티스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작품이다.
평면과 입체와의 상호 작용이 놀라울 정도의 극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
수평면의 테이블덮개와 수직면의 벽은 똑같은 붉은 바탕에
푸른 무늬가 그려져 있지만 수직면과 수평면과의 구분은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창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전경은 극적인 원색대비로 강열한 효과를 나타내며
마티스특유의 단순화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마티스는 물감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색채자체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자연과 사물을 묘사하는 것에서
규범적인 색채 관념을 벗어나 색채를 해방시켰다.
이처럼 <붉은 색의 조화>에서는 색채가 대단히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흑백의 복제판으로 보면 그 의미가 상실되어 버린다.
"마티스의 뱃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
피카소는 이같이 마티스의 뛰어난 색체감각을 찬양했다고 한다.
|
Nude Sitting in an Armchair
Oil on canvas 1926
Private collection
마티스의 작품들이 매우 지적인 구성이면서도 우리에게 항상 감각적으로
강하게 호소해 오는 것은 바로 ‘본능적으로 이해된’ 표현력 때문일 것이다.
마티스는 인체를 그릴 때, 모델의 모습보다는 그 모습에서 전해 받은
자신의 모든 지각, 센스를 표현하고자 했다.
한번은 야심작을 그리던 중
그 모델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대한 고충을 아들에게 털어놓았다.
“유감스럽게도 열여덟 살의 그 아름답고 순진한 시칠리아 시골 처녀가
방금 미인 선발 대회에서 우승을 했단다.
보기만 해도 즐겁고 터질 듯 싱싱한 과일 같이 아름다웠는데..
그녀는 우쭐해져 나이트클럽 댄서로 일하려고
룸바 따위의 요상한 춤을 배우러 다니고, 요즘은 밤늦게까지 파티에 나가는지
그 건강하고 아름다운 향기와 색깔을 잃었다.
이제는 그녀에게서 사라져버린 바로 그런 젊음이 내 그림의 주제였으니
앞으로 어떻게 이 그림을 계속할지 막막하구나!”
|
Blue Nude IV
Gouache on paper cut out 1952
Musée Henri Matisse Nice France
색채에도 영혼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마티스의
<푸른 누드> 연작중의 한 작품이다.
이 Blue Nude IV는
과슈(Gouache ; 수용성의 아라비아고무를 섞은 불투명한 수채물감)로
색을 칠한 종이를 조각조각 오려 붙여 완성한 것이다.
말년의 마티스는 관절염으로 몸이 몹시 아파서 하루 종일 누워있어야 했다.
이젤 앞에 제대로 앉을 수조차 없던 그였지만
화가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마침내 침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묘안으로 ‘색종이 작업’을 생각해 냈다.
그는 종이에 좋아하는 색을 칠하고 오려 내어
그것들을 배열시켜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결국 마티스는 병환 중에 그의 일생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히는
<푸른 누드>라는 씨리즈의 ‘콜라주’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콜라주(Collage) ; 신문, 잡지, 색지, 천 등의 여러 재료를
캔버스나 판지 같은 평면에 바르거나 붙여서 완성시키는 그림제작의 한 양식으로
20세기 초 입체파와 함께 처음 등장했다.
|
Le bonheur de vivre
Oil on canvas 1905-1906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Merion PA USA
마티스의 대표작 <삶의 기쁨>이다.
이 목가적인 그의 대작 <삶의 기쁨>은 그의 장구한 화력(畵歷)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야수파로서 그의 절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단계를 넘어서는 방향타이기도 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비평가들에 의해 공격의 목표가 되었던 그림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1920년경 미국인 컬렉터 앨버트 반즈가 구입한 이래 반즈 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반즈 재단의 소장품 공개 방침은 대단히 엄격해서,
작품의 상설 전시는 물론 컬러 인쇄마저 오랫동안 금지돼 있었다.
이 <삶의 기쁨>의 인쇄물도 역시 마티스가 사망한지 9년만인 1993년에야
처음으로 컬러로 된 책에 등장했다.
생전의 마티스도 반즈의 방침을 지지했다고 한다.
<삶의 기쁨>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대로 화제(畵題)그 자체이다.
마티스는 오로지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사랑했고
감상자에게도 자신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기를 바란 것이다.
밝은 빨강과 눈부신 노랑, 깊은 초록 등 풍요로운 색채로 가득 메운 화면 속에,
부드러운 긴 곡선은 그림 전체에 생동감을 만들어내며
나무가 되고, 수풀이 되고, 사람이 되었다.
풍요로운 자연에 온몸을 맡긴 채 사랑을 나누고, 꽃과 대화하며,
동물에게 피리를 연주해주고, 여럿이 모여 둥글게 손을 잡고 춤추는 이들의 모습은
인류 태초의 순수했던 낙원이 아닐까.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사람을 불안하게 하거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주제를 갖지 않는 것이다.
균형과 순수함과 고요함,
두뇌의 진정제 같은 편안하게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작품이다.”
과연 화사하고 평화로운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있는 듯한 따뜻한 생동감에
마음이 환해지며 기쁨으로 가득해 진다.
마치 내가 푸른 들에서 맨발로 환희의 춤을 추고 있는 듯...
|
마티스는 북부 프랑스 르카토 캉브레지의 외가에서
곡물상을 하는 부친과 아마추어 화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낸다.
1887년 법과 자격시험에 합격, 잠시 생캉탱의 법률사무실 서기로 일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이를 그만둔다.
에콜 데 보자르 미술학교에 입학한 마티스는 귀스타브 모로의 주의를 끌게 되어
1895년부터 모로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하면서 마티스는
색채화가로서 그의 천부적 재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초기에 마티스는 신인상주의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색채는 더욱 선명해지며,
1905년서 1908년까지 야수파의 중심에 있었다.
1917년에 그는 남프랑스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마티스의 미술은 더욱 장식적으로 변하며 한결 순수하고 고요해진다.
만년에는 색도 형체도 단순화 되었으며, 밝고 순수한 빛의 광휘와 청순 명쾌한 선에 의해
훌륭하게 구성된 평면적인 화면은 ‘세기의 경이’라고까지 평가되었다.
즉 말년에 몸이 불편해지면서 고무 수채(Gouache)를 칠한 색종이를
오려 붙이는 독특한 화풍을 창조하여
선과 색채가 완벽한 합일에 이르는 새로운 회화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또 조각, 동판화와 장식미술 분야에도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
남프랑스 니스(Nice)의 방스 성당(Chapelle du Rosaire de Vence)의 건축,
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했다.
1952년 고향 카토와 니스의 시미에즈에 마티스 미술관을 개관한다.
그의 작품은 20세기 불후의 명작으로 평가되며 오늘 날에 이르렀다.
1954년 마티스는 85세에 심장발작으로 니스에서 눈을 감았다.
마티스는 이십 세가 넘어서야 화가로서 그림그리기에 입문해서
육십 여 년 간 그가 팔십오 세에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하루에 12시간씩 작품을 만드는 열정을 가진 예술가였다.
마티스의 생애에 있어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으며 비교되기도 하는 예술가는 <피카소>뿐이다.
이 두 거장의 교류는 1945년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다.
마티스는 지난 반세기에 걸쳐 피카소 예술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으로
경쟁자이면서, 또한 잘 이해했던 유일한 친구이기도 했다.
서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던 ‘아름다운 경쟁자’.
서로 존경하고 서로 질투하기도 했던 마티스와 피카소였다.
마티스가 사망하자
피카소는 절친한 친구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지 못해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생각해보니 오직 마티스 밖에 없었다.”
-피카소 -
“오직 한 사람만이 나를 평할 권리가 있으니
그 사람이 바로 피카소다.”
-마티스 -
편집 하늘새
'좋은그림들 > 외국의화가의 작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Daniel Sannier 의 그림 (0) | 2014.09.06 |
---|---|
Natalya Romanovsky (0) | 2014.09.01 |
마티스 Matisse Henri (0) | 2014.08.21 |
Jeremy Mannby (0) | 2014.07.22 |
Jeremy Mann (0) | 2014.07.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