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루소 Henri Rousseau(1844-1910)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La muse inspirant le poete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흘러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들 사랑도 흘러내린다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
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20세기 초 미라보 다리 아래 유유히 흐르는 센 강을 보면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정작 시인을 떠나간 '미라보 다리의 여인' 마리 로랑생은 '죽은 여자보다 더 불쌍한 건 바로 잊혀진 여자'라며 배신당한 사랑에 괴로워했다.
미라보 다리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초현실주의의 대가인 아폴리네르가 오퇴이유의 집에서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몽파르나스로 오갈 때 건너다니던 곳, 벨에포트에는 어떤 빛깔의 사랑도 가능했다. 이 '좋았던 시절', 이른바 제국주의의 끝자락에서 보헤미안 예술가들은 자유롭고 퇴폐적인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1907년 전위적 화가와 시인들이 가난한 공동생활을 하던 바토라부아르('세탁선'이라는 뜻으로 센 강의 세탁선을 닮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몽파르나스의 이 아파트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았다)에 드나들던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의 소개로 마리 로랑생을 만난다.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 미학을 창안함으로써 시와 미술을 결부시킨 20세기 모더니즘 예술의 창조자와, 재기발랄하고 개성 넘치는 여성 화가의 만남, 둘은 사생아라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곧바로 사랑의 열병에 빠져든다.
이탈리아 장교인 아버지와 로마에 망명한 폴란드인 어머니를 둔 아폴리네르의 혈연은 그대로 얽매이기 싫어하는 방랑시인이라는 그의 운명을 암시해 준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은 둘다 지독히도 개성 강한 에고이스트였기에,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긴 채 1912년 헤어진다. 아폴리네르에게 사랑이란,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라지는, 그리고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었다. 또 다른 사랑이 새로 올 수 있기에. 로랑생은 아폴리네르의 생각을 알았을까. 로랑생의 '자화상'에서는 이미 잊혀지고 있는 버려진 여인의 비참함이 절절하다. 로랑생의 우수어린 얼굴 표정과 길고 연약한 손가락에 사랑의 슬픔이 인상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아주 정렬적이고 호방한 기질의 소유자였던 아폴리네르는 로랑생 이후에도 자신의 바람대로 또 다른 여인들을 차례로 만났고 그때마다 '루에게 주는 시' '마들렌에게 주는 시'등 수십 편의 시를 썼다. 아폴리네르와의 사랑이 파탄난 후 로랑생은 1914년 독일 남작 오토 폰 바트겐과 결혼한다. 그러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인으로 국적이 바뀐 로랑생은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로부터도 버림받은 어처구니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아폴리네르와 친구들]Apollinaire and Grou of Artists.
1908, (de gauche à droite: Pablo Picasso, Fernande Olivier,
Guillaume Apollinaire et Marie Laurencin)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뿐.
스페인과 독일에서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로랑생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혼을 하고 1920년이 되어서야 파리로 귀국할 수 있게 된다. 아폴리네르는 변덕스러운 루라는 여인과의 불화 끝에 보병 소위로 입대했다가 1916년 3월 머리에 파편을 맞아 파리로 후송되었지만, 완치되지 못하고 휴전되기 이틀 전 1918년 11월에 세상을 떠난다.
"나를 열광시키는 것은 오직 그림이며, 그림만이 영원토록 나를 괴롭히는 진정한 가치이다", 이제 마리에게 남은 것은 그림뿐이었다. 1956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폴리네르보다 더 많은 만남과 이별을 겪지만, 그녀에게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변함이 없었다. 로랑생은 자신의 그림 속 감미로운 여성상처럼 하얀 옷에 빨간 장미를 손에 들고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가슴에 얹은 채 숨을 거두었다.
"왜 죽은 물고기나 양파, 맥주컵 같은 것을 그려야 하지? 소녀들이 훨씬 더 예쁜 걸." 이렇듯 로랑생은 여성만을 그렸다. 얇은 베일에 감싸인 듯 몽환적인 분위기에 여인의 창백한 얼굴이 아련한, 신비스러운 파스텔 색조 그림들.
피카소를 포함한 입체파와 야수파 화가들 그리고 서머셋 몸이나 초현실주의 문인 등 당대의 쟁쟁한 대가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었고, 그로 인해 로댕으로부터는 '야수파의 소녀', 장 콕토로부터는 '야수파와 입체파 사이의 덫에 걸린 불쌍한 암사슴'이라는 비아냥대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잃지 않았다.
마리 로랑생 - 마드모와젤 샤넬의 초상
여성 화가란 남성 작가들 틈에 예외적으로 존재하는 꽃이던 시절을 살았던 로랑생이지만, 그녀만의 삶의 방식과 작품세계는 아주 독톡했다. 남성 화가들이 전통에 대한 파괴와 혁명적인 반항만을 모색하던 전환기의 시대상황에서 로랑생은 그 어떤 조류에도 매몰되지 않는다. 그녀는 꿈꾸는 듯한 소녀상을 주제로 여성다운 섬세한 지성과 관능이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지킨 현대 예술가였다.
사랑은 때로 비수가 된다. 사랑의 자유 외에는 의지할 것 없는 사람들은 베일 줄 알면서도 또다시 사랑에 모든 것을 건다. 그리고 결국 갈 곳을 찾지 못해 다리 위를 서성이곤 한다. 다리 위 남자는 강물에 사랑을 떠내려 보내고 여인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사랑으로 눈물 짓는다.
정은미 저 아주 특별한 관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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