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s Pierre Seurat
December 2, 1859 – March 29, 1891
was a French painter and the founder of Neo-impressionism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Woman with a Monkey
Georges Seurat -
La Tour Eiffel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detail)
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An Afternoon
그랑드자트 섬의 日曜日午後_ Sunday Afternoon on the lsland of La Grande Jatte
파리 태생 프랑스의 화가이며 신인상주의의 창시자인 조르주 쇠라의 대표적인 작품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Sketch with Many Figures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The Rope-Colored Skirt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Seated and Standing Woman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Woman Fishing and Seated Figures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Landscape with Figures
Georges Seurat -
woman with umbrella
Georges Seurat -
In the Woods at Pontaubert
Georges Seurat -
Boquet in a Vase
Georges Seurat -
La Rade de Grandcamp
Georges Seurat -
La Siene a Courbevoie
Georges Seurat -
Bathing in Asnières (detail)
Georges Seurat -
Bathing at Asnieres
Georges Seurat -
Les Bas-Butin, Honfleur
Georges Seurat -
Man Leaning on a Parapet
Georges Seurat -
The Artist's Mother
Georges Seurat -
Port-en-Bessin, The Outer Harbor, High Tide
Georges Seurat -
Port-en-Bessin, The Outer Harbor, Low Tide
Georges Seurat -
Rue Saint-Vincent, Montmartre, in Spring
Georges Seurat -
Study for 'The Channel at Gravelines' 2
Georges Seurat -
Suburb
Georges Seurat -
The Bridge - View of the Seine
Georges Seurat -
The Hedge
Georges Seurat -
The Seine with Courbevoie
Georges Seurat -
The Siene at La Grande Jatte, Spring
Georges Seurat -
back seated model
Georges Seurat -
Bridge of Courbevole
Georges Seurat -
Quayside, Honfleur
Georges Seurat -
Pierrot with a White Pipe
Georges Seurat -
Chahut
Georges Seurat -
Models (small version)
Georges Seurat -
Young Woman Powdering Herself (Study)
Georges Seurat -
Watering Can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White Dog
Georges Seurat -
Ville-d'Avray, White Houses
Georges Seurat -
Fisherman
Georges Seurat -
Courbevoie, Landscape with Turret
Georges Seurat -
La Grande Jatte - Une Perissoire
Georges Seurat -
Horse in a Field
Georges Seurat -
The Circus
쇠라의 작품_ 서커스
쇠라는 마치 그의 죽음이 곧 닥칠 것이라고 예감하기라도 한 듯
제8회 앵데팡당 전시회에 아직 완성하지 않은 〈서커스〉를 전시했다.
그는 전람회 준비위원으로 작품들을 전시하고 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던 중,
감기에 걸린 것이 전염성 편도선염으로 악화되어
전람회가 끝나기도 전인 1891년의 부활절 일요일에 죽었다.
그 다음날 마들렌 크노블로흐가 그녀가 사는 구역의 읍사무소에 나타나
자신이 피에르 조르주 쇠라의 어머니임을 밝혔다.
아버지의 병에 전염되었던 그 아이는 1891년 4월 13일에 죽었다.
쇠라는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지하납골소에 묻혔다.
쇠라는 7점의 대작들 외에 40점의 작은 그림과 스케치,
500여 점의 소묘 및 여러 권의 스케치북을 남겼다.
작품의 양은 그다지 많지 않지만,
그것들은 그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한 시기의
주요한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조르주 쇠라는 점묘법이라는 기법을 이용해
회화에 과학을 시도한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쇠라의 전기를 읽다 보면 꼼꼼하고 인내심이 강했다고 되어 있는데,
화가가 되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과학자가 되었을 것이라 상상합니다.
자주 CF에도 등장하는 그의 대표작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까지 내려 오던 회화의 규칙을 뒤 엎은 작품이었습니다. 가로 3m에 세로 2m가 되는 대작인데 완성하기 까지 무려 2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흥겨운 분위기는 아닙니다. 정지되어 있는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은 대체로 우울해 보이고 대화가 없는 것 같아 모두가 고독해 보입니다.
이 그림이 1886년 ‘메종도르’라는 레스토랑에서 개최 된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걸렸을 때 이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과 관객들의 반응은 경악이었습니다. ‘그림에 장난을 쳤다’ ‘ 마네킹을 만들다 실패한 것을 모델로 그렸다’ 이런 평가 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마네의 친구이자 우아한 여성들을 주로 그렸던 알프레드 스태빙이라는 화가는 작품에 대해서 혹평을 한 것도 부족했는지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레스토랑 옆에 있는 까페에 가서 손님들에게 돈을 주며 이 작품에 야유를 보내달라고 했답니다.
유명한 작품들에 대한 뒷 이야기에는 꼭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을 더 빛나게 하는 소품 같아 재미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의 모습을 봤다면 한 마디 했을 것입니다. ‘너나 잘 하세요-‘
이 작품이 이렇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쇠라의 붓 칠 때문이었습니다. 팔레트에 물감을 섞지 않고 작은 점을 화면에 찍는 소위 점묘법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점들의 연속입니다.
그렇지만 멀리서 보면 색상 전체가 감상자의 시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섞여 보이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색다른 화면 효과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 점묘법의 특징인데, 당시로서는 낯 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쇠라가 이렇게 작품을 만들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염색기술자이자 화학자였던 슈브뢸이라는 사람이 보색을 잘 정리하면 두 색이 서로 돋보이지만 마구 놓으면 칙칙해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것을 ‘동시 대비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옷의 색상을 결정하는데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회화는 과학처럼 확고해야 한다’ 고 주장했던 쇠라에게 이 법칙은 큰 관심이었습니다. (쇠라의 작품은 그 작품의 구도가 황금 분할로 되어 있다는 점도 그의 주장과 연결됩니다)
작품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랑자트 섬은 세느강의 가운데에 있는 섬인데 섬을 중심으로 왼쪽은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오른쪽은 노동자 촌이었다고 합니다. 쇠라는 이 섬에 양 쪽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다분히 사회적인 의도가 깔린 구성으로 작품을 그렸습니다.
쇠라는 미리 배치해야 할 색과 붓 터치의 방식까지 충분히 준비한 후 아침이면 섬에 가서 그림을 그리고 오후와 밤 늦게까지 색칠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직업이 무엇인지를 묘사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자를 쓰지 않은 소녀는 하녀나 공장 노동자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모자를 쓰지 않고 외출하는 여염집 여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자가 신분과 부의 상징인 셈입니다. 그러나 화면의 오른쪽에 있는 여자는 음란하다고 알려진 원숭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업이 창녀였을 것이고 당연히 그 옆의 남자는 기둥서방이나 단골손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쇠라가 그런 의미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위상이 결정되는 것은 순식간인 것 같습니다.
순수한 의미의 점묘화는 아니지만 ‘아니에르의 물놀이’라는 작품인데 작품의 건너편이 앞 그림의 그랑자트 섬입니다.
쇠라의 작풍을 폴 시냑이 뒤를 잇는데
대표작을 잠시 보시기 바랍니다.
‘여성복 재봉사’ 입니다
‘앙들리 강둑’입니다.
살아 생전 쇠라는 그의 기법을 말하는 점묘법 또는 신 인상주의라는 말 보다는
분할주의라는 말을 더 좋아 했는데, 분할주의는 점묘법을 이탈리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또 다른 이름입니다.
주세페 펠리차 다 볼테도의 ‘제4국가’ 라는 그림입니다.
1891년 3월 29일 제 7회 앵데팡당 전이 열리고 있던 중
31살의 나이로 쇠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서커스’에 검은 리본이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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