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울"
- 강연호 시인 -
그대 하루하루가 입산금지의 팻말 무시하고
숲 속으로 들어가 길 잃고 싶은 마음일 때
숨어보시지, 새까만 별들 하늘에 총총 박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믐밤 골라 그대
어두운 시절의 탯줄을 이빨로 끊고 울어보시지
첩첩산중 밀봉된 세월을 적시는 바람 소리뿐
적막은 너무 깊어 오히려 고막을 터뜨리네
그대 어디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시지
耳鳴처럼 끈질기게 깨지는 거울의 비명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그대의 얼굴 할퀴고
손목 그어버리는 저 낯선 사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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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호 詩集(세계사시인선ㆍ42)
『비단길』
....."섬"
..................... - 강연호 시인 -
..한 사나흘만 묵어가고 싶었다 더 이상은 곤란해 아름다움이 외로움으로 바뀌기 전에 뭍으로 나가야 해 그런 굴딱지 달라붙은 다짐들을 먼저 바다로 띄워 보내며 까닭없이 아득해지고 싶었다 그러면 어느 이름 모를 몇 장의 바다를 걷어낸 뒤 또 다른 곳에서 한 사나흘 묵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안개에 곱게 머리 헹궈낸 바람결 따라 뿌우우 뱃고동 순한 물길 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래 떠돌수록 말없는 사내 되어 제 그림자 스스로 밟을 무렵이면 애쓰지 않아도 잔잔하게 밀려 비로소 뭍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 同詩集에서 -
.... ■ 表誌文 -
.."하나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다"는 말을 저 라마르틴느로부터 빌려와 그 풍경 어디에 붙여두고 싶다. 그러나 강연호는 더 강하게 말한다 -" 그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 없으면 나약한 저는 언제나 불륜입니다"(「그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렇다, 강연호의 진정한 검열은 거기에 있다. 그의 검열이 잠시 자리를 뜰 때 저 그리운 세계의 검열이 거역할 수 없이 군림한다. 그래서 휴식은 얼마나 큰 긴장을 담게 되는가. 젊은 시인에게 불쌍한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가 기다리는 "그대"이다.
..........................................................- 황현산(문학평론가ㆍ고대 불문과 교수) -
."저문 길"
.................- 강연호 지음 -
사람 기척에 놀라 그만 막다르게 입 다문 길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게 삼가 열며 걸었습니다
謫所 따로 없어 세상의 집들 웅크린 채 잠들고
불 꺼진 창에서 풀풀 새어나온 어둠이
길을 끌어가는 포플라 행렬 흔들어 어지럽혔습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생각은 숨가쁘게 달려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까지 데불고 오곤 하였습니다
혼자서는 작정한 만큼 가지 못할 산책이었을까요
귀찮아도 같이 걷자며 어깨를 치는 시름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은 힘겨웠으니
그리 알고 지내라고 이만 줄인다고
밑도끝도없는 엽서 한 장 우체통에 넣을 때
가슴 한쪽이 먼저 둔탁한 소리로 떨어져내렸습니다
바라보면 저기 돌아가 지친 몸 뉘어야 할 거처가
자꾸만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습니다
.- 同詩集에서 -
."마음의 서랍
.................- 강연호 지음 -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절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 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大洋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 同詩集에서 -
."허구한 날 지나간 날"
............................- 강연호 지음 -
...1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2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 同詩集에서 -
........■ 解 說
....-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 황현산(문학평론가ㆍ고려대 불문과 교수) -
..강연호는 그의 이 첫 시집『비단길』을 준비하면서 한때,〈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는 한 문장을 그 제목으로 고려하였다. 그의 시 「비단길ㆍ2」의 마지막 행에 근거를 둔 이 경구는 결국「自序」의 겸손한 자리로 물러나와, 시인이〈앞으로의 다짐 삼아 한마디〉덧붙이는 말이 되었다.
..시는 진솔함 속에 과장을 허용하고, 이치가 부족할 때 운율에 기대고, 어눌함을 은유로 바꾸고, 말과 사물의 경계를 상징으로 혼란시킨다. 한마디로 시는 오류가 용서되는 언어이다. 시인은 그와 동류들, 모든 인간말자들이 이해받으며 살 수 있는 세계를 구하는데, 그 이치에 맞지 않는 희망을 오직 오류의 언어인 시가 지지한다. 도자기 굽는 사람에게 이치가 잠시만 자리를 비껴준다면 그는 얼마나 아름다운 그릇을 얻어낼 것인가?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 그 도자기는 구워지지 않을 것이나, 시는 항상 그 희망을 실천한다. 과연 시의 광채는 찬란하다. 詩는 오류를 저지르는 순간 그 모든 오류가 해소되는 세계에 벌써 도달한다. 그러나 시인이 그 세계에 도달하는가? 물론 아니다. 도공의 터무니없는 희망이야 도공의 오류라 하더라도, 시의 오류는 시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이어야 함을 그는 겨우 알았을 뿐이다. 지금 이곳에 부재하는 그의 자리만큼 이 세상은 부족하다. 그(시인)는 이 결여와 오류를 산다. 오류는 저 찬란한 세계의 그 눈부신 광채로 조명된 이 잘못된 세계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편협함으로 깨어진 저 세계의 빛이다. 이 오류의 세계는 저 세계의 거울이다. 오류는 항상 해결되어 왔으며 또 해결되리라고 역사가는 말할 테지만, 시인은 납득하지 않는다. 그는 도리어 자신이 답사했던 길을 이 세계의 편협함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점령할 뿐이라고 여길 것이다. 시인은 다시 그 길 밖으로 내몰릴 것이며, 편협한 세계의 영토가 그만큼 넓어질 뿐이다.
..시인의 아픔만큼 그 세계는 구체적이다. 나의 아픔은 그 세계의 아픔이다. 내가 연약하여 그 세계는 안쓰럽다. 그 세계는 안쓰럽고 확실하게 거기 있다. 그는 불행한 의식이 아니며, 상징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자 : 강연호에게 시가 잘못 든 길인 것은 시로 그리워하는 그 세계가 확실하게 거기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야 한다.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 지도를 만든다.
...............................................- 同詩集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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