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40년 김광규, 11번째 시집
![김광규](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1/29/2016012902258_0.jpg)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김광규(75) 시인을 지난 26일 서울 홍제동 자택에서 만났다. 1975년 등단한 시인은 올해로 시력(詩歷) 40년을 넘겼다. 그의 열한 번째 시집 '오른손이 아픈 날'이 최근 출간됐다.
'4·19 세대의 輓歌'를 짓다
40년 넘게 살고 있다는 단독주택의 2층 서재는 정갈했다. 책상과 마주한 벽 동쪽에 한국 탈이, 서쪽에 유럽 포도주병이 걸려 있었다. "나의 '동도(東道)'와 '서기(西器)'인 셈"이라고 시인이 웃으며 말했다.
'동도서기(東道西器)'란 유학을 숭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독문학을 전공해 가르치면서 수십년간 우리 시를 써 온 김광규의 삶을 요약하는 단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후박나무가 동창(東窓)으로 내다보였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쓴 지 37년이 되었습니다.
"원래 그 시는 1979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청탁이 와 쓴 거였어요. 그런데 그 호가 못 나오는 바람에 시를 발표하지 못했지요.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검열이 심해지면서 여러 잡지가 갑자기 판매 금지가 되어버렸어요. 당시 준비하고 있던 첫 시집에 그 시를 실을 예정이었는데 시집도 검열에 걸렸어요. 내가 샌님이거든요. 험악한 소리를 시에다 쓰고 하는 타입이 아닌데도 '빨간 안경'을 쓰고 봐서 그런지 시에 줄을 그었더라고요."
―어떤 부분에 줄을 그어 놓았던가요.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게 그 시 맨 마지막 줄이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인데 '늪'이라는 글자에 빨간 줄을 그었더라고요. 대위급 장교들이 그 시를 봤다는데… '친구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셨으면 집으로 가야지 왜 늪으로 가냐'고 했다고 합디다. 그래서 첫 시집이 그해에 못 나왔습니다. 이후 광주 사태 나고 1980년 후반쯤에야 시집이 나왔습니다."
―그 시가 많이 읽히는 이유는 뭘까요.
"그 시는 말하자면 4·19에 대한 만가(輓歌)입니다. 그런데 4·19를 대표하는 시처럼 되어 가지고 거의 몇십 년 동안 매년 4월 19일이면 신문사에서 그에 관해 써 달라기도 하고, 라디오에서 시를 읽어 달라기도 하고 연례행사처럼 해 왔어요. 그 덕이 큰 거지요."
김광규는 조숙한 문학 소년이었다. 서울중·고교 재학 시절부터 시와 산문을 썼다. 그렇게 쓴 글이 '학원'을 비롯한 문예지에서 상을 받곤 했다. 그는 "초등학교 때는 항상 1등을 도맡아 했는데 명문 서울중학교에 입학해 보니 공부로는 날고 기는 친구들이 다 모여 있더라. 게다가 수학을 못하니 점차 숫자보다는 문자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수학을 피해 문학을 택한 겁니까.
"당시 우리 학교에 시인 조병화 선생, 소설가 김광식 선생이 국어 교사로 계셨어요. 국어 작문 시간에 내가 쓴 글을 발표하면 '너 잘 쓴다' 해 주셨죠. 중학교 들어가서 칭찬받은 게 그게 처음이에요. 우등생 반열에도 못 끼니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문학이 아닌가' 싶었지요. 게다가 조병화·김광식 선생이 베레모 쓰고 다니는 게 멋있어 보였었거든요. 그때 학생들에겐 현역 작가가 지금 '아이돌'이나 마찬가지였어요. 황동규·마종기 같은 고교 선배들이 일찍부터 시인으로 등단해 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어요."
"쉽게 쓰려고 수십 번 고친다"
일찍이 문학에 열정을 불태웠던 소년은 그러나 서울대 독문과 입학 후 평범한 소시민의 길을 걸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고, 독일문화원 장학금을 받아 독일 유학을 다녀왔다.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한 건 부산대 교수 임용 후인 1975년이었다. 서울대 문리대 동급생인 이청준·김승옥 등에 비하면 데뷔가 10여년 늦은 셈이었다.
김광규는 1989년 산문 '배울 수 없는, 그리고 끝낼 수 없는 편력'에 군 복무 경험을 소재로 신춘문예에 투고했다가 낙방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적었다.
"학교 다닐 때 그저 글 쓰는 학생으로 칭찬받으면서 시나 산문을 끄적거리던 일이 결코 문학은 아니라고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다. (…) 어느 분야에서나 수신제가를 하기에 앞서 치국평천하하는 능력 있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도 이때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나다. 나답게 살자'는 결단을 내리고 제대 후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독문학 공부에서는 무엇을 배웠습니까.
"남이 다 아는 소리를 쓰면서도 존재의 깊이까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는 것을 배웠지요. 중학교 때부터 내 고민은 '시라는 건 남이 모르는 소리를 써야 하는데 나는 왜 다 아는 소리를 쓰지?' 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대부분의 독문학 작품은 알기 쉽고 논리가 선연합니다. 외국어인데도 읽기 쉬운 작품들을 접하다 보니 쉽게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쉽게 쓰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합니까.
"구체적인 현실 체험이 있는 거죠. 문학이라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서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어로 쓰려고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고칩니다. '이걸 보통 사람이 읽으면 알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이 저의 '시학(詩學)'이에요. 평생 그런 정신을 지켜왔어요."
문학평론가 김현은 김광규 시에 대해 "어려운 한자나 관념의 과시적 노출이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그의 시는 쉽게 읽힌다"고 했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1601/29/2016012902258_1.jpg)
김광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나치를 비판한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다. 그는 한양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85년 브레히트 시선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번역 출간해 국내에 브레히트의 시를 본격적으로 소개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로 시작하는 표제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아직도 김 시인의 번역본이 가장 널리 읽힌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어떻게 번역하게 되었습니까.
"80년대 이화여대 근처 교회에서 브레히트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더군요. 당시 브레히트는 사회주의자라 해서 금기(禁忌)였어요. 붙들려 갈까 봐 고사했는데 거듭 부탁해서 결국 강연을 했어요. 그 강연을 들었던 한 분이 이후 번역을 부탁해 왔습니다. 역시 여러 번 거절하다가 브레히트 시로서는 온건한 걸로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체화시킨 것을 골라서 했습니다. 시집이 나왔는데 결국 금서(禁書) 처분을 받았어요. 그런데 언더그라운드에서 많이들 사 봐서 출판사는 돈을 좀 벌었다고 들었습니다."
―시집 제목이 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가요.
"시의 원제인 'Ich, der Überlebende'는 직역하면 '나, 아직도 살아 있는 자'라는 거예요. 그런데 당시 사회 정서라는 게 광주 사태 이후 많은 지식인이 살아남았다는 걸 부끄럽게 여기고 있던 때였죠. '슬픔'이라는 단어는 내가 넣은 거예요. 그냥 '살아남은 자'라고 해 버리는 것보다는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 제목이 오늘날에도 즐겨 인용되는 관용구가 됐죠."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로 끝난다. 부끄러움을 통한 자기 염오(厭惡)다. 김광규 시에서도 부끄러움은 중요한 정서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는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바람이 속삭인다. 이번 시집에 실린 '부끄러운 계산'에서 시인은 오랜 친구의 부음을 듣고 이렇게 노래한다. "이제는 그가 알고 있던 몫까지/ 나 혼자 간직하게 되었다/ 내 몫의 부끄러움만 오히려 그만큼/ 늘어난 셈이다".
―선생님 시에서 부끄러움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그 부끄러움은… 아주 쉽게 말하자면 인간과 동물이 구분되는 바로 그 점입니다. 인간의 자의식은 부끄러움에서 시작되는 건데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짐승이나 마찬가지지요. 독일서도 '부끄러운 줄 알라'는 것은 아주 큰 욕입니다. 공자의 저서를 어릴 때부터 많이 읽었는데 거기에도 부끄러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나는 인간에게 용기라든가 하는 그런 덕목보다는 부끄러움을 아는 게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959년 고교 졸업반이었던 김광규는 '20년간 얻으신 당신의 병아리 인생관은?'이라는 교지(校誌) 설문에 '인간의 마음은 동물의 본능만치도 순결하지 못하다'라고 답했다. 소년의 그 결벽함이 60년 세월 동안 늙지 않아 시가 되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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