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과 박수근(격정과 과묵) 문화사상
이중섭과 박수근(격정과 과묵)
1930년대 중반 조선 화단에도 입체파, 야수파, 표현주의, 추상미술 등 유럽의 20세기 초 모더니즘에 대한 정보가 유입됐다. 관학적 성격의 동경미술학교 집중 현상이 완화되고, 일본 유학이 다양한 대학으로 확대되면서 이뤄졌다. 이는 주로 동경의 전위그룹전 중 하나로 1937년에 결성된 ‘자유미술가협회(自由美術家協會)’의 참여를 중심으로 했다.
서구 모더니즘 역시 식민지시절 군국주의 이데올로기의 강화시기에 수용됐다. 1930년대 후반 냉소와 절망, 허무 따위의 관념에 치우친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의 모더니즘은 자유주의 또는 순수형식주의 미학의 발흥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 성과물을 내기보다 해방 후에 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20세기 우리 미술은 변동기의 가쁜 호흡이나 격정이 화면 속으로 진입하지는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온 순수주의 예술론의 덫에 피할 수 없는 한계였다. 그렇지만 이를 뒤집어 생각해 보면 정치나 사회 현실이 그토록 후진성을 보인 반면에 이중섭, 박수근 같은 작가가 배출됐음은 분명 우리 20세기 미술의 자랑거리다. 인간이 창출한 예술의 위대함을 새삼 수긍케 하고, 현실을 뛰어넘어 우리 민족의 존재를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중섭
우리 미술사에서 20세기를 가장 심하게 앓은 작가는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이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유럽의 모더니즘 사조에 심취했고, 각별히 대담한 변형과 색감의 표현파나 야수파 화풍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경향은 1950년대 소 그림이나 닭 그림 등 유화 작품까지 이어졌다.
1952년에는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입단했고, 부인이 아들들을 데리고 일본의 친정으로 떠나면서 그림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후 가족과 떨어져 외로움과 그리움 속에서 지내다가 1953년 어렵게 일본을 다녀온 뒤, 통영에 머물며 그린 작품들로 개인전을 가졌다. 가족과 헤어진 후 작업은 물론 끼니조차 챙기기 어려운 처지에서 이중섭이 반복해서 그린 테마가 바로 ‘가족’이다. 유난스런 가족애가 열정적인 예술혼을 뒤흔든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유화 ‘닭과 가족’ 역시 가족연작 계열이다. 아버지와 세 아들이 암탉과 수탉, 병아리로 이뤄진 닭의 가족들과 어울려 있다. 갈색과 흰색에 청회색을 짓뭉갠 듯한 굵은 터치와 거친 윤곽선이 수선스러운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닭과 가족 -이중섭-
1954년에는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에 머물며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 식사를 거부하는 거식증으로 처절한 자기학대에 이르렀으며, 1956년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중섭의 생애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명암이 고스란히 덧씌워진 듯하다. 그래서 이중섭은 작품세계보다 극적인 생애가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됐다. 야성의 예술가적 기질에다가 전쟁 시기 월남해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불운하게 살아온 삶의 역정 탓이다. 그의 생애는 교분이 두터웠던 구상(具常)이나 고은(高銀) 등 문인들에 의해 픽션화되고 영화나 연극무대에 올려진 적도 있다.
이중섭의 처절한 말년 행적은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역사현실을 닮은 것이다. 또 반 고흐나 고갱 등 서구 유럽의 작가들이 그러했듯이, 후진국이나마 자본주의 사회의 형성기에 겪어야 했던 예술가의 몸부림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중섭이 다른 누구보다 1950년대를 심하게 앓은 한 인간이자 예술가임을 알 수 있다. 동시대 어떤 화가보다 개인적 아픔과 사회의 아픔이 통합된, ‘이중섭다움’ 을 시대적 표징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한다.
박수근
이중섭(李仲燮)과 박수근(朴壽根)은 생애나 작품세계가 대조를 이룬다. 이중섭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동경 유학을 통해 신사조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 비해, 박수근은 가난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양구에서 소학교(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을 뿐 국내에서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한 토종화가인 셈이다. 그런 박수근의 이력이 오히려 보통의 민중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대하고, 그들의 순박한 심성을 아름답게 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박수근은 해방 후 ‘국전’ 출품을 통해 활동했는데, 도리어 그것이 큰 상처가 됐다. 1953년 제2회 ‘국전’부터 1956년까지 입상했는데, 1957년 ‘세여인’이 낙선되면서 우리 미술계의 편견에 따른 아픔을 겪게 되었다. 그는 이를 음주로 달랬고, 결국 백내장과 간염으로 지병을 안고 살다 52세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범한 민중 삶의 서정이 짙게 묻어나는 박수근의 유화기법은 독특하다. 화면 전체에 밝은 갈색과 회색조의 거친 마티에르를 조성하면서 대상을 그려내는 표현 방식이 그러하다. 탄력이 없는 단순한 선이면서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입체감이 살아 있고, 형상의 표정을 읽기에 충분할 정도로 풍부하다. 이중섭 유화의 수묵 모필식 터치의 격정성과 대조적이다. 이중섭과는 또 다른 형식의 개성미로 서구의 유화재료를 한국인의 감성에 맞게 재창조한 ‘한국화’라 할 수 있다. 박수근 자신도 “나의 그림은 유화이긴 하지만, 동양화”라고 확신했었다.
박수근은 합판이나 두꺼운 종이 위에 캔버스를 입히고, 그 위에 흰색·회색·갈색·흑색 등의 물감을 두텁게 건조시켜 가며 형상을 그리는 유화기법을 고안해냈다. 마치 옛 마애불 같이 화강암의 재질감 위에 단순한 선묘의 차분한 이미지로 나목(裸木)과 서민의 생활상을 담았다. 1940년대에 쓴 ‘미석(美石)’이라는 아호에 걸맞는 형식미를 창출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사인조차 어리숙한 한글 필치의 ‘수근’이라 써넣어, 그림 내용과 거칠한 화면을 받쳐주는 듯하다.
오늘날 박수근의 작품들은 한국인의 심성을 절절하게 읽어낸 것으로 평가되는 만큼,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기도 하다. ‘서민의 화가’에서 ‘우리의 화가’로 지칭될 정도다. 그림값이 현재 국내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박수근은 어려운 시절에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해 평생 불우하게 살았다. 식민지시대와 전쟁, 전후의 피폐한 사회를 온몸으로 겪으며 작품 활동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민중 삶의 일상을 차분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포착한 점이 이중섭과 대조적이다. 박수근은 애시당초부터 서민의 삶을 살았고, 그 곤궁한 삶에 깃든 인간적 진실을 읽어냈기 때문 아닐까.
박수근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점을 들어 종교적 인간애라는 시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타고난 성품을 일관되게 간직한 때문이라 여겨진다. 더불어서 박수근이 선택한 가난한 서민 삶의 표정은 자기 삶의 진정한 체험의 고백이자 1950~60년대 시대상의 회화적 증언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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