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렁이를 존중하는가
땅속 깊이 풀뿌리 밑에서 일하는 농장 일꾼을
그는 계속해서 흙을 바꾼다
온통 흙을 뒤집어쓴 채 일한다
흙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이 먼 채
그는 밑바닥에서, 지하에서 일하는 농부이다
들판에게 수확의 옷을 입히며
누가 진실로 그를 존중하는가
이 깊고 조용한 경작자를
행성의 흙 속에서 일하는
이 불멸의 작고 누추한 농부를
- 하리 마르틴손 <지렁이> (류시화 옮김)
모든 정원사들은 지렁이 예찬자들이다. 흙과 거름을 뒤집다가 지렁이를 발견하면 그 땅은 살아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지렁이가 사라진 땅은 죽은 땅이다. 찰스 다윈조차도 지렁이에게 매료되어 죽기 바로 전까지 연구를 계속해 <지렁이의 활동에 의한 식물 재배 토양 형성>이라는 논문을 썼다. 줄여서 <지렁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리는 이 논문은 거창한 주제를 기대했던 동료 학자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신체가 절단되었을 때 이 땅속 동물이 가진 재생력, 흙의 성질을 바꾸는 놀라운 능력은 과학자뿐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 시인의 관심까지 끌어당겼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세상을 지탱하고 우리의 생존을 떠받드는 위대한 존재들은 대부분 풀뿌리 근처 흙거름 속에서 일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존재들에 대해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 더럽고, 미천하고, 보잘것없다는 것이 그들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다. 특히 농부들을 보라. 그들은 계속해서 흙덩이를 부수고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 우리의 식탁을 책임진다. 그 힘없는 농부를 공권력의 물대포로 쏘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까지 파헤치려고 하는 경악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 작고 조용한 흙일꾼을! 이 시에서의 ‘누가(who)’는 누구인가?
군나르 에켈뢰프,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와 함께 3인의 스웨덴 시인으로 꼽히는 하리 마르틴손(1904~1978)은 어린 시절 여러 양육원을 떠돌아다녔으며, 화물선 선원과 노동자, 방랑자로 청춘기를 보냈다. 독학의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는 최초로 스웨덴 한림원에 선출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시각에서 20세기 스웨덴 시문학을 개혁한 공로로 197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젊은 날의 경험을 쓴 자전적 소설 <쐐기풀 꽃 필 때>, 독창적인 여행기 <목적 없는 여행>, 대표 시집 <무역풍>이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시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한림원 임원이면서 노벨 문학상을 탄 것을 비난하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목판화_Michael Mccur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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