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권옥연

조용한ㅁ 2017. 10. 8. 00:05


풍경, 1957

 

꿈, 1960

 

인형이 있는 정물, 1957

 

권옥연 자화상, 유채  1970

 

 

 

 

 

 

 

 

 

 

 


 

권옥연이 파리의 "레알리테 누벨전"(Salon des Realites Nouvelles)에 초대 출품한 것은 1958년의 일이다. 체불(滯佛) 1년 만의 쾌거(快擧)인 셈이 다. 쾌거라고 한 것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레알리테 누벨전 은 1946년 창설된 이래, "살롱 드 메"(Salon de Mai, 1945년 창설)와 쌍벽 을 이루면서 당시의 파리 화단에서 가장 권위있는 초대전으로 간주되고 있었 고, 이 두 전람회에 초대된다는 것은 곧 작가로서 공인(公認)받은 것으로 평 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레알리테 누벨은 살롱 드 메가 구상과 추상 을 고루 영입하는 절충적인 초대전이었는 데 비해, 유일한 추상미술 초대전 으로서 그 분명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권옥연의 초대 출품은 한 사람의 한국인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추상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내 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추상화가로의 권옥연의 변신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우선 한 작가로서의 작가적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는 이미 30대 중 반에 접어든, 작가로서는 가장 활력과 의욕에 찬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1953년 이래 서울대 미대에 출강하는 것을 비롯하여 이미 국내에 서 화단 경력을 착실하게 쌓은 중견 화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그리 고 그때까지의 그의 회화 세계는 흔히 지적되듯이 고갱적인 요소를 다분히 지 니고 있었고, 요컨대 모던 아트의 범주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그러나우 리나라의 당시의 모던 아트의 풍토에서 권옥연은 매우 개성적인 화가로 평가 되고 있었거니와, 이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경력을 갖고 파리.화단에 뛰어든 30대 중반의 한국 화가가 그곳 에서 보고 느낀 것은 과연 무엇일까?
1950년대는 프랑스에 있어서는 그대로 "앵포르멜(Informel) 시대"로 통 다. 그리고 그 후반기는 전반기에 비해 그 거센 활력과 약동감을 잃어가고 었다고는 하나, 앵포르멜 운동은 거의 전 유럽적인 현상으로 확산되어 가고있는 시기였다.
이 자리에서 그 앵포르멜 미학 자체를 거론할 여지는 없으나 권옥연이 그열기의 외곽에 시종 머물러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권옥연이 다분히 내 향적이요, 또 어떤 의미에서는 관조적 (觀照的)인 기질의 화가임을 일단 인정 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또한 앵포르멜 미술이 주장하는 일종의 극한적 자기 표출의 세계에 결코 동화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는 그 미술 운동을 하나의 체험적 계기로 삼았고 그것을 작가로서의 전환의 계기로 삼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실은 그의 체불시기(1957∼60)에 제작된 작품이 뒷받침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서 굳이 앵포르멜과의 관련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마티에르에 대한 이 화가의 각별한 관심일 것이다. 색채는 가능한 한 억제되어 있되 미묘한 색조의 변화와 운치, 그리고 거기에서 배미나오는 듯한 "기호=이 미지"가 때로는 까칠하고 때로는 윤기있는 살갗같은 마티에르에 의해 화면 전체에 훈훈한 체온을 지니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티에르에 대한 집착 과 애정은 귀국 후에도 한층 더 심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권옥연은 앵포르멜 열풍 속의 파리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끝내 절재 (節制)의 화가로 머문다. 1957년부터 58년까지의 몇 안 되는 연작 <절규 (證叫)>에서 보듯 그는 절규를 억제된 색조와 집 약된 이미지로 압축시키고있으며, 그 이미지를 상형문자화시킴으로써 그것을 오히려 단단한 조형적 모티프로 전화(轉化)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형적 모티프로서의 "기호=이미지"는 조형적 기능과 함께 우리로 하여금 태고적의 어떤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 기억 속에서 되살아 나는 것, 그것은 어쩌면 오랫동안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자고 있던 집단적 상 징의 포상일지도 모르며, 그리하여 권옥연의 <신화시대>(1958)는 오늘의 이 문명시대에 환시적 (幻視的)인자 주술적 (呪術的)인 형상으로 되살아나고 있 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초기의 회화세계

세대적으로 보아 권옥연은 일제 말기의 세대에 속한다. 그것은 그가 한 화 가로서 성장함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인 정규 미술대학 과정(帝國美術學校)을 일제 말기의 일본에서 보냈고, 따라서 8·15 직후의 우리나라 미술계의 공백 기에서의 활동도 그 형성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의미에 서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종전(終戰) 전의 일본 모던 아트 풍토에서 화가로 서의 토양을 가꾸었다는 말이다.
8·15해방과 함께 귀국한 권옥연의 활동 무대는 두말할 나위없이 국전(國展,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약칭)이었으며, 그는 국전이 창설되는 1949년 첫 회에 출품한다. 그러나 국전은 6·25로 인해 창설된 지 1년 만에 중단의 비 운을 맞게 된다. 1953년의 환도와 함께 다시 되살아난 이 관전(官展)은 여전 히 권옥연에게 있어서 거의 유일한 작품활동의 무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권옥연은 그때부터 이미 국전 중심의 관학파적 (官學派的) 아카데미즘과는 거리가 먼 개성적인 화풍을 가꾸어가고 있었다. 역시 일본에서 미술 수업을 한 대다수 선배 화가들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와는 달리, 그는 서구 적인 모던 아트의 틀에 한국적인 향토성을 도입하면서 당시 우리 화단에서는보기드문 양식화(樣式化)되고 평면화된 "비(非)사실적"인 회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 양식화와 평면화(이는 형태와 색채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가 그의 회화를 고갱의 회화와 접근시키고 있으며, 회화작품이 담고 있는 "문학성" 에 있어서도 이 양자 사이에 분명한 친화관계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화면 설정에서나 색면 분할적인 방법에 있어 그가 얼마나 고갱에 경도되고 있었는가를 알아볼 수 있게 한다. 내용에 있어서 짙은 토착적인 취미와 방법에 있어 분 할적 (分割的)인 구도 설정이 고갱을 방불케 하는 점이 적지 않다. 일견 타히티란 원생적(原生的)인 자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혹인 여인의 모습을 대하는 듯한 한국 여인들의 원생적 삶의 정경이 그의 화면에 극적 (劇的)인 모티브로 해석되어지고 있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간들의 적나라한 삶의 정경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짐을 보게 된다. 이 점에서 그는 고갱의 문학적 발상에 많은 감화를 받으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체험을 조형의 방법으로 승화시키려는 기미를 분명히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향토성에의 귀의가 고갱을 통해 비로소 조형적 통로를 열고있음을 보여준다(吳光洙, 「象徵과 造形」, 《韓國現代美術全集》 17,한국일보사刊) .

고갱의 회화 양식을 빌린 향토적 노스탤지어의 세계-아마 권옥연의 초기의 회화 세계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향토색"은 다분히 이국취향적(異國趣向的)인 것이며, 작품<고향>(1948)에서 보여주듯 다분히 상상적이자 향수적인 정경으로 그려져 있거니와, 그 향수는 어쩌면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권옥연의 작가적 성장 과정에 있어, 8·15해방과 더불은 귀국 후부터 그의도불시기까지의 기간을 묶어 "초기"로 삼는다면, 불행하게도 이 시기의 작품 은 오늘날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와 같은 사정이 그의 초기 작품연구의 결정적인 장애가 되기는 하나, 이 시기에 나타난 매우 강렬한 향토성은 체불(滯佛)시기에 이어 귀국 후, 마티에르에 대한 추구와 함께 보다 중후한 것이 되어 가는 것이다.

60년대의 작품활동

약 3년간에 걸친 권옥연의 파리 체류는 그로 하여금 보다 투철한 조형 의식을 일깨우게 하였고,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재발견이라는 또 다 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파리의 앵포르멜이라는 용광로를 몸소 거침으로 해 서 그의 조형적 체험세계는 한층 깊이를 더한 것이 되었고, 그리하여 그 체 험 속에서 보다 정련(精鍊)된 자신의 언어를 발견하고 다듬게 되었던 것이다.실제로 귀국 후, 약 10년간에 걸친 그의 작품 활동은 의욕적이고 활력에 찬 것이었다.
프랑스로부터 귀국한 해(1960)에 가진 귀국전을 비롯하여, 그 후 60년대 전반에 걸쳐 그가 참여한 주요 미술전만 보아도 가히 그의 활동 상황을 짐작 할 수 있는 터이다. 연대순으로 살펴본 그의 주요 미술전 참가는 다음과 같다.

1962년 : "프랑스 귀국작가전"
제1회 "세계문화자유회의 (世界文化自由會議) 초대전"
세계문화자유회의에 의해 창설된 이 초대전은 당시로서는 가장 진취적인 현대미술전
으로서 창립전에 초대 출품한 작가들은 권옥연 외에 김기창 · 김영주 · 김창렬 · 박서보
· 박래현 · 서세옥 · 유영국 등이다.
1963년 : "현대작가초대전" (조선일보 주최 )
"한국 청년작가전" (파리, 랑베르 화랑)
1964년 :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1965년 : "세계문화자유회의 초대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66년 . "한국현대회화 10인전" (중앙일보 주최)
1967년 : "한국현대회화전"
1968년 : "한국현대회화전" (도쿄 국립근대미술관 주최)

그리고 이와 같은 각종 기획전에 참가하면서 권옥연은 자신의 작업을 검증 하고 매듭짓듯이 두 차례의 개인전을 서울(1964)과 도쿄(1965)에서 열었던 것이다.


이 시기(1960∼70년경)의 작품을 특징짓고 있는 것,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의적(寓意的)이자 모태적(母胎的)인 형상의 부상(浮上)이다. 파리시대의 상 형문자적인 "기호=이미지"는 사라지고 그대신 화면을 거의 가득히 메우면서 둔중한 "원생체(原生體)"가 기묘한 삶을 숨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체 인 동시에 광물질의 물체 같기도 하고 유기적인 동시에 무기적인 속성을 함 께 공유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자신만의 은밀한 이야기 를 그 속에 담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과묵하기 짝 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잊혀진 시간의 기억일 수도 있고, 또는 영원한 침묵에서 어쩌다 떨어져 나온 어떤 상처의 사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또 다른 삶을 위해 새로운 우화(寓話)를 꿈꾸 고 또는 잃어버린 신화를 되찾으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처럼 우화를 꿈꾸고 신화를 가꾸는 그 묵직하고 투박한 형상은 바로 우리 토 기 (土器)의 이미지요, 그 꿈도 역시 우리 토기가 키우고 있는 꿈이다.


권옥연이 토기의 수장가로서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토기, 그중에서도 특히 신라 토기에 대한 그의 개안(開眼)이 프랑스에서 귀국한 후부터라는 사실은 음미해 볼 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파리에서 처음 통절하게 느낀 것은 "내가 한국을 몰랐다", "내가 동양을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후부터 신라 토기에 매료되었고, "토기에서 오는 흙냄새나는 이미지를 찾는 작업"(1987년 4월 1일자 한국경제신문 인터뷰에서)을 꽤 오래 계속하고 있다.


토기, 그 흙냄새와 덜 다듬어진 형태, 그 까칠하고도 구수한 살갗 같은 면그리고 그 토기에 담겨진 소박한 삶과 얼. 권옥연이 그의 회화 속에 되살리 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일 것이다. 그 삶과 얼을 그는 농축되고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였다. 그 이미지는 그 속에 담겨진 "세월의 gms적"과 함께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 생각하도록 하였다.
영원히 정지된 세월의 기념비, 권옥연의 이 시기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비단 수사적 (修辭的)인 표현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실상 그의 회화작품의 건조하고 중후한 마티에르의 효과와 억제된 듯한 색조,그리고 단순화된 형태와 색면에 의한 구성은 벽화, 특히 프레스코 벽화의 기념비적 특성(모뉴멘털리티)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화가 자신도 벽화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거니와 벽화에 대한 그의 야심은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의 무대막(舞臺幕) 제작으로 간접적으로나마 그 일단이 실현되지 않았나 생 각된다.

성숙기의 회화, 팬터지의 세계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권옥연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참 이상해요. 추상화를 그리던 사람이 사실화(寫實晝)를 그리면 타락했다 고 하고 사실화를 그리던 사람이 추상화를 하면 발전했다고 하거든요. 그거 참 딱한 일이에요.

실지로 권옥연은 1970년을 전후해서 이른바 "사실화"로 되돌아간다. 그러나그가 말하는 사실화는 엄격히 말해서 사실주의 회화를 말하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회화는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회화는 고갱의 회화가 비사실주의적이듯 이 비사실적인 회화인 것이다.
사실(寫實)과 추상의 관계가 어떤 진화론적 (進化論的)인 발전과 퇴보의 것이 아님은 새삼 말할 것도 없거니와, 권옥연의 회화적 변모는 단순히 "추상적" 인 회화에서 "구상적 (具象的)"인 회화로 되돌아왔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체질적으로도 그는 완전한 추상화가가 아니었고, 또한 완전한 사실주의 화가도 아니었다. 그의 작품 속에는 항상 자신이 말했던 바, 문학적인 이미저리(imagery)가 깔려 있었다.


그의 회화는 확실히 구상적인 세계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구상적인 세계는 꿈이 있는 세계요, 달과 산, 나비와 꽃, 새와 나무가 서로 밀어 (密語) 를 나누는 동화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자연의 피조물들이 서로 어울려 교감(交感)하며 동심 속에서 되찾은 것 같은 팬터지의 세계를 엮어내고 있는것이다.


권옥연의 회화작품에서는 그것이 <풍경>(1970)이든, <사랑>(1970)이든,또는 <잊혀진 이야기>(1975∼76)이든, <우화(寓話)>(1980∼84)이든, <정월 (正月)>(1987)이든, 모두가 일종의 시적 변모(詩的變貌)를 겪으며 우리에게 지극히 친밀한 사물들을 시간 너머의 설화(說話)와 명상이 어울려 생성하는 세계로 옮겨놓는다. 만일 그의 작품 속에서 어떤 문학성을 찾을 수 있다면,그것은 결코 산문적(散文的)인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시(詩)로서의 설화성 (說話性)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바로 "눈으로 읽는" 한 편 의 시라는 말이다.


50세에 접어들면서 권옥연은 화가로서의 성숙기를 맞이했음이 분명하거니 와, 그러한 화가로서의 성숙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잃어버린 옛 정취(情趣)"를 되찾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모든 자연의 정경이 때로는 우수에 차고 때로 는 화사한 베일에 싸여 있는 듯하며, 모든 형상이 오랜 망각 속에서 새롭게 되살아나듯 때묻지 않은 소박한 삶을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 숨 결이 마치 "어른들의 동화"처럼 우리에게 먼 옛 이야기―달과 산, 나비와 꽃, 새와 나무가 서로 밀어를 나누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권옥연의 정감 넘치는 비현실적인 세계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억제된 단색 조(單色調)의 화면으로 해서 더한층 운치를 지닌다. 그의 색채는 감각적이기 보다는 차라리 심정적(心情的)인 색채이다. 그것은 현상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색채요, 자연의 사물 고유의 색채도 아니다. 화가 자신이 사물의 고유색 (固有色)을 거부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거의 모든 작품의 주조를 이루고 있 는 색채는 청회색·녹회색·암회색(暗灰色)이요, 그것도 차분히 안으로 가라앉는 색조인 것이다. 그는 원색을 기피하고 또한 눈에 띄는 색채대비도 기피 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사물이 우리의 육안(肉眼)에 비쳐진 것이 아니라, 자 연의 은은한 메아리처럼 화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권옥연의 회화작품을 두고 위에서 나는 "시적 변모"라는 표현을 썼으나, 그것은 그의 색채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그 차분히 가 라앉은 가식없는 색조는 그 자체가 이미 지극히 은밀한 서정성을 지니고 있 으며, 그것이 단순하고 소박한 "동화적"인 이미지와 융합되면서 격조높은 슥 적 공간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적 공간은 환상과 꿈을 잉태한 공간 이며, 또한 그 환상과 꿈은 우리 마음 속에 간직된 채 숨쉬고 있는 소중한 기 억처럼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도 다정한 환상과 꿈인 것이다. / 李逸 (홍익대학교 교수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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