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
이 길에 들어서면서
한때 나였던 시간들에게
...............................................................................- 윤성택 -
."리트머스" .................- 윤성택 시인 - 늦은 밤 공중전화부스에 사내가 들어 있다 꾹꾹 눌러낸 다이얼은 서른 번을 넘긴다 타국으로 젖어드는 신호음 저편 그리움이라는 색깔로 반응하는 목소리, 부스안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수화기는 왼쪽 어깨로 넘겨져 데워지고 불러낸 이름을 유리창에 적어본다 글씨도 뿌리를 내리는지 흘러내리는 획마다 생장점이 먼지로 뭉친다 바지에 묻은 톱밥은 발아중이고 뒷주머니에 삐죽 붉은 목장갑도 피었다 안개에 젖고 밤바람에 흔들려 후둑, 스포이드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나뭇잎 가을은 그렇게 한 가지 색으로 반응해 물들어간다 사내는 하늘을 봉숭아꽃처럼 물들이고 싶다 꽁꽁 묶어 보낸 소포를 풀 즈음이면 첫눈이 내릴 것이다 슈퍼 간판불도 꺼져버린 자정 무렵, 사내의 머리와 어깨 실루엣이 공중전화부스 불빛에 흠뻑 젖는다 아득히 먼 곳에서도 색이 뚜렷하다 .# ...윤성택 詩集(문학동네) ..『리트머스』중에서_ 윤성택의 언어는 천평저울에서 내려온다. 미세한 눈금을 읽고 내려오는 그의 언어는 세계의 사각지대를 찾아가 예리하게 꽂힌다. 그는 트릭을 쓰지 않는다. 오늘의 불확실한 매트릭스의 세계가 보여주는 모든 징후를 그는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초감각적이라고 할 만한 그의 언어는 항상 안테나처럼 예민하게 대상을 포착하며 그에 따른 적확한 해석과 진단은 풍경의 이면에 숨어 빛을 발한다. 시원스런 몇 차례의 덤블링과 고공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일회전, 이회전, 삼회전을 보여준 뒤 가볍게 착지하는 십점 만점의 체조선수처럼 그의 시들은 한결같이 완벽한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 강인한(시인) 빛이 열을 내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 마찰에 그 몸을 기대어야 한다. 그 정신은 어느 것도 쉽게 관통하지 못한다. 머물면서 지나가고 지나가면서 끊임없이 보풀을 일으킨다. 옷깃만 스쳐도 생기는 이 상처가 보풀의 다른 이름이라면, 그 이름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서 은근히 열을 뿜는 문장이 또한 시를 만들어간다. 젊은 시인 윤성택이 기대는 문장도 이 언저리를 맴돌며, 휘돌아가며 뜨끈한 불빛 하나를 만들었다. 불빛의 가장 먼 유래가 별에 담긴 우리의 눈빛에 있듯 돌고 돌아서 도착하는 시인의 내면은 그래서 온통 밤하늘을 닮는다. 환하고 어둡다. 고통스럽고 잔잔하다. 산동네의 밤하늘도 알전구 켜진 어느 구석방의 희미한 온기도 기어이 틈을 비집고 나와 말을 거는 것이다. 돌에도 실핏줄이 있다면 물빛 그렁그렁한 그 눈에도 사소한 균열이 퍼져 들어간다. 그것은 존재의 뿌리이면서 마찰과 마찰 끝에 오는 우리들의 궁극적인 미래다. "죽음까지 관통하는 미래"에 내맡긴 이 시인의 행보에 잔잔한 박수를 덧보탠다.- 김언(시인) .................- 윤성택 시인 - 로그인된 나무에 새순이 돋고 아이디로 꾹꾹 입력된 꽃이 핀다 그러므로 계절이라는 사이트에 들어설 때부터 커뮤니티는 시작된다 시간의 약관에 동의한 나는 태어나 로그인된 방문자, 이리저리 흔적을 남길 때마다 기억이 스크랩된다 누군가 잠시 나를 떠올리기라도 하면 카운터가 올라간다 간혹 내가 접속하고 싶은 사람, 서로 언약한 적 없어도 그의 패스워드를 이해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일치해야 다음 단계로 이동할 수 있다 보는 이가 많아질수록 꽃은 절정의 트래픽을 갖는다 뿌리의 한계용량에서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는 이파리가 미끄러지듯 낙하한다 변경이 필요로 한 오류범위는 바람이다 로그인을 했다가 로그아웃하면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서도 나는 없다 내가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경계에 접속된 순간뿐이다 어디에도 있는 나를 어디에도 없게 하는 로그아웃, 나는 태연하게 다른 곳으로 로그인된다 .- 同詩集에서 - ........................- 윤성택 지음 -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 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넣고 앞으로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손으로 꾹꾹 눌러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너를 옮기지 않겠다고 원래 자리가 그대 자리였노라고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同詩集에서 - ....................- 윤성택 시인 - 버스는 아가미를 열고 우산 몇을 띄워놓네 다음 정차역까지 단숨에 가려는 듯 바퀴마다 지느러미 같은 물길이 돋네 수초처럼 흔들리는 이정표는 번들거리며 흘러가네 밤은 네온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고, 푸르다가 붉다가 점멸하는 자음만으로 도시를 읽네 건너편 창을 훑고 내려오는 자동차 불빛 밀물처럼 모서리에서 부서지네 물소리가 밤새 저리 뒤척이며 경적을 건져낼 것이네 한 떼의 은빛 치어가 가로등으로 몰려가네 살 오른 빗방울이 창문으로 수없이 입질을 해오지만 내가 던진 찌는 아무것도 물어오지 않네 이렇게 막막한 밤이면 그립다든가 보고 싶다든가, 쓸쓸한 표류를 어쩌지 못하네 무엇이든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렇게 일순간 떠오르는 것 흐르는 생각 끝에 맨홀이 역류하네 ..- 同詩集에서 - ...................- 윤성택 지음 -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물결은 음파처럼 밀려와 촘촘히 조각을 덧붙이고 있었다 갈대는 마이크처럼 바람을 잡고 뿌리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물밑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놀란 새들이 음표처럼 날아올라 수평선에 걸렸다 그 순간이 들려주는 연주곡은 코끝이 시렸다, 이별은 떠나온 것이 아니라 두고 온 것일 뿐이라고 노랫말을 붙이고 싶었다 조금 더 잦아지는 물결은 시린 저녁놀을 강 끝으로 옮겨놓는다 생각이 지류를 따라 부질없이 밀려갔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제목도 알 수 없고 구절만 떠오르는 쓸쓸한 곡이었다 공기방울이 얼음 밑으로 흘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뿌리의 노래라고 믿었다 ..- 同詩集에서 - ................- 윤성택 지음 - 나, 밤기차를 탔었다 검은 산을 하나씩 돌려보낼 때마다 덜컹거리는 기차는 사선으로 몸을 틀었다 별빛은 조금씩 하늘을 나눠가졌다 종착역으로 향하는 기차는 인생을 닮았다 하루하루 세상에 침목을 대고 나 태어나자마자 이 길을 따라왔다 빠르게 흐르는 어둠 너머 가로등 속 누군가의 고단한 길이 들어 있었다 간이역처럼 나를 스쳐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은 세상의 가장 바깥, 함부로 내려설 수 없는 여정이었다 나, 기차표를 들여다보았다 정처 없이 낯설어지고 있었다 ..- 同詩集에서 - .....................- 윤성택 지음 - 그 버스정류장에는 가지 많은 플라타너스 한 그루 피아노 교습소 간판을 반쯤 가리고 서 있다 비 오는 날 그 아래에서 버스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우산을 향해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실은 플라타너스의 연주라는 것을, 빗물로 흠뻑 잎들을 조율하고 가지의 탄력으로 옥타브를 넘나들기도 하면서 비 오는 내내 잎과 가지를 흔들어 우산의 공명통을 두드리는 것이다 노선안내판 옆 줄지어 선 음표 같은 뒷모습, 키 높이에 따라 색색의 우산으로 화음을 이룬다 한여름 교습소 창문에 드리운 새 이파리들도 박자를 놓치지 않는다 어느새 버스는 악보처럼 넘겨지고 모두 돌아간 그 버스정류장 옹이 같은 귀를 열어 둔 플라타너스만 적적하다 그러면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며 보도블록에 척척 잎을 눌러보는 것이다 ..- 同詩集에서 - .....................- 윤성택 지음 - 문자 메시지가 왔다 점멸하는 도착 표시, 오래 전 보았던 창문을 닮았다 가로등이 아이콘처럼 자주 깜박이던 곳, 그 겨울밤 가끔씩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아직 여기 있다고 했던가 언덕길 끝, 보일러 연통의 몇 볼트 온기로 나뭇가지에 꽃봉오리가 피었다, 잔기침에도 화들짝 놀라는 꽃 화분은 조금씩 금이 갔다 그리울 것이 많았으므로 라디오 주파수는 별과 별을 지나 사람의 소리에 닿고, 창문을 흔드는 바람이 캄캄한 궤도로 흘러갔다 깊은 밤 뚝뚝 지는 수돗물은 둥근 별의 습관, 얼지 않은 소리는 고드름처럼 일기장 행간에 매달렸다 창 밖에는 외, 롭, 다 꾹꾹 눌러놓은 눈사람 눈 코 입 그 겨울밤 시리우스, 빛의 속도로 도착한 전파처럼 지금 메시지는 그 별에서 보내온 답신이어도 될까 8년 224일 18시간 전 시리우스 별과 같은 혹성 언덕 공중전화부스에서, 나는 아직 여기 있다고 ..- 同詩集에서 - ..................- 윤성택 지음 -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두 우회로에 있다 ..- 同詩集에서 - .....................- 윤성택 지음 - 춥다, 웅크린 채 서로를 맞대고 있는 집들이 작은 창으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가로등은 언덕배기부터 뚜벅뚜벅 걸어와 골목의 담장을 세워주고 지나갔다 가까이 실뿌리처럼 금이 간 담벼락 위엔 아직 걷지 않은 빨래가 바람을 차고 오르내렸다 나는 미로같이 얽혀 있는 골목을 나와 이정표로 서 있는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샀다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몇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점점이 피어난 창의 작은 불빛들 불러모아 허물없이 잔을 돌리고 싶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따스하게 안겨오는 환한 불빛 아래 나는 수수꽃처럼 서서 웃었다 보일러의 연기 따라 별들이 늙은 은행나무 가지 사이마다 내려와 불씨 하나씩 달고 있었다 ..- 同詩集에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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