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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글/시

박이화



나의 포로노그라피 / 박이화


 

썩은 사과가 맛있는 것은
이미 벌레가
그 몸에 길을 내었기 때문이다
뼈도 마디도 없는 그것이
혼신을 다해
그 몸을 더듬고, 부딪고, 미끌리며
길을 낼 동안
이미 사과는 수천 번의 자지러지는
절정을 거쳤던 거다
그렇게
처얼철 넘치는 당도를 주체하지 못해
저렇듯 달큰한 단내를 풍기는 거다

 

봐라!
한 남자가 오랫동안 공들여 길들여 온 여자의
저 후끈하고
물큰한 검은 음부를!



후박나무 아래 잠들다 / 박이화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이 세상 모든 죽음마저 꽃피워 줄 때
나 저 후박나무 아래 들겠네
그럴 때 통영군 연화리 우도의
저녁하늘 바라보던 내 눈은
후박나무 어린잎에게 주겠네
내 잠든 동안 저 후박나무
나를 대신 할 수 있도록
아, 살면서 누구보다 고온 다습했던 내 생은
누구보다 먼저 후박나무 그늘 아래 썩겠네
그렇게 한 생쯤
내 몸도 꽃잎 아래 물컹,
향기롭게 썩었으면 좋겠네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그대는 영영
아주 내게서 잊혔으면 좋겠네

다시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나를 저 후박나무 심장처럼 높게,
꽃피워 줄 때까지




똥 패 / 박이화

 

 

화투라면
꾼 중의 꾼이었던 나도
다 늦게 배운 고도리 판에서는
판판이 깨어지고 박살납니다
육백시절의
그 울긋불긋한 꽃놀이 패를
(그러나! 고도리 판에서는 만년 똥 패를)
미련 없이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나는 저 한물간 낭만주의에 젖어
이 시대의 영악한 포스트모던에 영합하지 못했던 겁니다
사랑도 움직인다는 016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아날로그 주제에
빠져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 생애도
버리지 못하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젖은 꽁초처럼 미련 없이 던져야 하는 데도
도무지 홍도의 순정으로
내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패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더 이상 히든 패가 아닌 세상
잊어야 하는 데도
언제 어디서나 흥얼거려지는 당신
흘러간 동숙의 노래처럼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미움이라면
당신은 분명
내 생애 최악의 똥 패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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