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그림들/외국의화가의 작품

칸딘스키

조용한ㅁ 2018. 4. 6. 01:30

러시아 출신의 화가로 추상 회화의 창시자이다. 
 

 

Composition VIII. 1923. Oil on canvas. 140 x 201 cm. The Solomon R. Guggebheim Museum, New York, NY, USA

 

녁놀이 내릴 즈음이었다.

나는 습작을 마치고 화구통을 들고 돌아왔다.

방금 마친 작업에 골몰한 상태에서 갑자기 형언할수 없는

아름다움과 내면의 빛으로 가득찬 그림을 보았다.

잠시 자리에 얼어 붙었다가 재빨리 그림으로 다가갔다.

거기에서 형태와 색깔은 구분할수 있었지만 내용은 알아볼수 없었다.

순간 수수께끼의 열쇠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으로

옆으로 누운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중략) 그제서야 대상들이 내그림에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깨달을수 있었다.


 


<회색 안에서> 1919 캔버스 유채 129×176cm 국립현미술박물관 조르주 퐁피두 센터, 파리



Succession, April 1935

 

칸딘스키는 자신의 회화에 음악성을 부여했다.

심지어는 “색상은 건반이고, 정신은 피아노,

화가는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영혼을 울리는 손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음악이 화음만으로 청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색채나 선만으만으로 대상을 표현해

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검정 그물망 (1922년, 96x106cm, 조르주퐁피두 센터)

 

칸딘스키는 색채를 음악과 같은 맥락에서 음악이 음의 조화를 통해 감동을 전달하듯,

회화 역시 구체적인 대상이 없어도 색채의 조화를 통해 감정을

표현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음악에서 음의 높낮이가 다르고, 악기마다 독특한 음색이 있듯,

색채도 저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것을 연구를 통해 밝혀 냈다.

예를 들어 노랑색은 전형적인 지상의 색으로 맹목적인 착란이나 광기 어린 병적인 색,

파랑색은 전형적인 하늘의 색이며 순수에 대한 동경을 준다는 것 등 각각의

색채마다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칸딘스키는 이런 연구를 통해 심지어는 색상으로 보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고도 했다.

 



20세기초의 현대시와 미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한 바그너의

오페라 이론으로부터 총체 예술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여 공감각의

원리로 발전시켰다. 공감각이란 이미지와 음 또는 냄새와

맛과 같이 서로 다른 영역의 감각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즉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색조와 형태의 배치는

음악적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영혼을 감동시키는 것이다라고.....








상호의 화음 1942년

 

무의식으로 느껴지는 내면의 상황, 비록 형태는 없지만

그는 캔버스 위에 피인지 물감인지 구분조차 안되는

불길한 얼룩을 그려 넣기도 하고, 선의 움직임을 통해

격정적이고 흥분된 느낌을 살리기도 했다.


 

Untitled (First Abstract Watercolor). 1910 (1913).

Pencil, watercolor and ink on paper. 49.6 x 64.8 cm.

Musee National d'Art Moderne,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France.


칸딘스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하는 대신

사물을 본 그 순간,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는 데 충실했던 화가이다.

결국 그의 화폭 위에는 구체적인 대상이 그려지는 대신

자신의 감정만을 색채와 선으로 남긴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대상을 묘사하지 않으면서

화가가 자신의 감정과 정신을 표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칫하면 화가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만을 표현함으로써

감상자에게는 의미 없는 낙서나 얼룩으로 치부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험성을 파악한 칸딘스키는 색채를 통해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인상V / 공원)> 1911 캔버스 유채 106×157.7cm

국립현대미술박물관 조르주 퐁피두 센터

 

현대 회화에서 처음으로 순수한 추상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칸딘스키 는사람이나 물건을 있는그대로 또는 약간씩

변형해서 그리는 것만이 그림 그리기 라는 믿음 을

과감히 깨부수었다.20세기 들어 그의 영향을 받지않은

화가는 거의 없다고 할수있는데 그는그림의

철학적인 측면 을 강조한 그림 의 철학자였다.

 

Study for "Composition II". 1910. Oil on canvas. 97.5 x 130.5 cm.

The Solomon R. Guggebheim Museum, New York, NY, USA



Improvisation 26 (Oars). 1912. Oil on canvas. 97 x 107.5 cm.

Stadtische Galerie im Lenbachhaus, Munich, Germany

 

White Figure. 1943. Oil on card. 58 x 42 cm.

 

The Blue Mountain. 1908/09. Oil on canvas. 106 x 96.6 cm.

The Solomon R. Guggebheim Museum, New York, NY, USA.

 



위의 그림은 칸딘스키가 1905년에 그린 가브리에레 뮌터의 초상입니다.

1901년에 학교에서 처음으로 만난 칸딘스키와 10년이 넘는 연인이자 동료화가로서의 길을 같이하게 되죠.

1911년에 창립된 청기사운동에는 같이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과함께 청기사 운동은 자연스럽게 해산하고

결혼을 약속했던 칸딘스키는 홀연히 러시아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3년후 그는 러시아의 어느 장군의 딸과 결혼식을 올립니다.

뮌터는 충격적인 실연의 아픔을 견디며 남은 여생을 칸딘스키와 같이 살던

독일 의 집에서 여생을 쓸쓸히 지내다가

85세의 나이로 고독한 죽음 을 맞이 합니다.

 

Upward. 1929. Oil on card. 70 x 29 cm.

The Peggy Guggenheim Collection, Venice, Italy

 

Orange Violet. 1935. Oil on canvas. 88.9 x 116.2 cm.

The Solomon R. Guggebheim Museum, New York, NY, USA.



음악이 화음을 통해 음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듯 회화 역시 서로

다른 색채와 선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체를 통제하는 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기하학적이며 단순화 된 표현으로 내적인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절제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의 말년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모든 색채에는 의미가 있듯 이런 형태 또한 아무렇게나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이것들은 운동감, 균형감각, 무게 등을 나타내면서 제각각 의미 있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Composition X. 1939. Oil on canvas. 130 x 195 cm. Kunstzammlung Nordrhein-Westfallen, Dusseldorf.



Moscow I. 1916. Oil on canvas. 51.5 x 49.5 cm. The Tretyakov Gallery, Moscow, Russia.

 


Gorge Improvisation. 1914. Oil on canvas. 110 x 110 cm.

Stadtische Galerie im Lenbachhaus, Munich, Germany

 

<검은 선들I> 1913 캔버스 유채 129.4×131.1cm 솔로몬R. 구겐하임박물관,

 

뉴욕 밀도와 집중, 팽하는 듯한 노란색은 아랫부분의 청색과 대조를 이룬다.

칸딘스키는 소묘 같은 선을 통해 도식적으로 그 구성을 강조한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모스크바 출생. 193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현대 추상미술을 창시한 한 사람이며 처음에는 법률과 경제학을 배웠으나,

1895년 인상파전을 보고 모네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이듬해인 1896년 뮌헨으로 옮겨 아즈베와 F.슈투크에게 사사하여 화가로 전향하고

1905년 살롱 도톤의 회원이 되었다.

그 전후에 이탈리아 ·튀니지 ·프랑스 등지를 여행하고,

1908년 이후 뮌헨 ·무르나우에 살면서, 1910년에 최초의 추상회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표현파인 프란츠 마르크와 함께 뮌헨에서

예술가집단인 ‘청기사(靑騎士)’를 조직하여(1911), 비구상 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스크바로 돌아가, 1918년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으나 1921년 다시 베를린으로

가서 이듬해부터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교수(처음 바이마르,

1925년부터 데사우)로서 후진지도와 신예술 개척에 힘썼다.

만년에는 1933년부터 프랑스에 정주하여,

여행 이외에는 파리 교외의 누이쉴센에 살았으며,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한 적도 있다.

그는 현대 추상회화의 선구자로서,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에서 이탈,

선명한 색채로써 교향악적이고도 다이내믹한 추상표현을 관철한 후

점차 기하학적 형태에 의한 구성적 양식으로 들어갔으나

P.C.몬드리안과는 또다른 독자적인 발전의 자취를 남겼다.

 

주요 작품으로는 《푸른 산》 《즉흥 14》 《검은 선들》 《가을》 《콤포지션 7》

등이 있으며, 또 추상미술 이론가로서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Über das Geistige inder Kunst》(1911)

《점 ·선 ·면 Punkt und Linie zu Fläche》(1926) 등의 저술도 남겼다.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 (Luna Llena - Los Tres Diamant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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