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시대 1954-1956
단단한 구성과 구조적 소재가 특징이다.
서구 회화의 단순한 실험에 치우치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을 통한
독창적인 회화탐구의 흔적이 엿보인다.
1956년 네덜란드 여행에서 암스테르담 항구는 이성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이후 항구 연작은 추상화로 이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추상시대 1957-1960
구상시대의 작품과 화면상의 질감에서 서로 어우러진다.
색감은 미세하게 변화하나 때로는 굵은 단색 터치를 대범하게 대조시킴으로써
이러한 조화를 깨뜨리기도 한다.
이 연장선에서 1960년대 후반까지 추구하는 ‘여성과 대지(大地)’라는 주제가 형성된다.
구상적인 모티브가 완전히 사라지고,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주를 이루던 화면에서
다양한 색조가 피어나기 시작한다.
사각형의 형태를 기초로 한 기하학적인 구조 속에 다양한 상징들이 화면을 지배하는 시기이다.
여성과 대지 시대 1961-1968
“나는 여성인 내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흙으로 고온의 불덩어리를 덮고 폭풍과 노도를 고요히 받아들이면서
만물에 생을 주는 여성과 같은 땅만을 알 뿐이다.”
1960 칸느 카바레로 화랑 개인전
이성자에게 창작이란 바느질이나 길쌈처럼 집중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작업이요,
베틀에서 천을 짜내듯 노동을 통해 얻어지는 값진 결과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듯이 그가 가진 창작욕은 캔버스와 목판을 비옥하게 살찌워
자신이 창조한 형태들을 자라나게 하였다.
기본색인 단색 위로 대조되는 색을 갈퀴가 지나간 흔적을 나타낸 것은
대지의 경작과 상응 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겹쳐지고 드러나고 다시 가려져도
진득하게 우러나오는 강한 생명력을 친밀한 한국적 색조로 표현하였다.
중복시대 1967-1971
이성자는 1969년 뉴욕을 방문한다.
워싱턴과 뉴욕까지 이어지는 여정에서 도시의 위용,
빽빽하게 높이 솟은 마천루에 인상을 받아 새로운 모티브에 눈뜬다.
여행 중 갑작스레 어머니의 부음을 접하게 된다.
이후 여성과 대지를 구성하던
모든 모티브들이 모두 어우러지며 중복(重複)시대를 연다.
중복은 여성과 대지에서 새로운 조감도인 도시에 이르는 전환기를 이룬다.
도시시대 1971-1974
“원은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시작도 끝도 긍정도 부정도 없다.
우리 미래의 도시가 추구해야 할 바로 그 모습이다.”
조화를 중시하는 이성자의 미래 도시는
정형성이 지배하는 ‘사각형’의 도시가 아니라 ‘원’을표현방법으로 채택한다.
하나의 세포핵 형태인 ‘원’형은 생명이 근원인 세포의 조직과 그 분할을 의미하며
우주 속 별들의 움직임을 가리킨다.
이 도시는 단순히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의 원천을 잉태하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가진 도시이다.
음과 양, 초월 시대 1975-1976
음과 양에서 이성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음양은
기계와 자연의 결합, 죽음과 생명, 동양과 서양 등 상반된 요소들의 결합으로 해석된다.
하나로 완결된 원이 아니라
둘로 나뉘어 합일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원을 통해
대립적인 요소들의 조화로운 결합을 갈망하는 것이다.
상반된 요소들의 결합이 주는 에너지는 이성자에게 ‘초월적 시간’이 보여주는
나무와 캔버스라는 상반된 요소의 결합으로도 나타났다.
나뭇가지를 직접 캔버스에 붙여 작업하는 방법으로
이성자는
평면이라는 이차원적 특징을 가진 회화에 삼차원의 조각적 특성을 더했다.
자연시대 1977-1979
두 개의 문화, 자연과 인간, 자연과 기계 등 상반된 것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상대적인 것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이성자는 이러한 상생의 원리를 자연에서 터득하여 중복, 도시라는 이전 시기의
고정되고 단선적인 구도와는 대조적인 자연주의적 표현을 이용한다.
자연과 합일된 이성자의 심상은 이국적이거나 민속적인 한계를 넘어서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던 그가 일구어낸 ‘자신만의 조화로운 토양’인 것이다.
형태적으로는 기존의 하늘에서 아래를 굽어보던 조감도적인 시각과는 달리
투레트의 밤을 계기로 보다 재현적인 형태인 ‘산’이 등장하고,
땅을 일구듯 가꾸어온 화면의 대부분을 ‘하늘’이 차지하게 된다.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시대 1980-1994
“이제 극지로 가는 길은 한국으로 가는 길이다.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이다.
가장 긴 길이다.
가장 자유로운 길이다.
가장 순수한 길이다.
그리고 가장 환상적인 길이다.
봄에 비행기가 북극 위를 날 때 순결한 만년설이 덮인 그린란드를 지날 때,
거대한 태양이 지평선에서 솟아오른다.
깨끗한 공기가 아침이슬을 변화시켜 유리창을 때린다.
그 순간 나는 태어났다.”
이성자의 시선은 이제 완전히 ‘땅’을 벗어나 ‘하늘’에 고정된다.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의 회화적인 근원은
작가가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환상적인 알래스카의 풍경이다.
알래스카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만년설의 빙하와 황홀한 오로라는
작가가 꿈꾸던 이상도시의 이미지를 하늘로 옮겨 놓았다.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한 강한 색채의 하늘, 맑은 대기, 광활한 풍경 등은
이후 10여 년이 넘도록 작가의 예술세계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작가는 현세의 덧없음을 넘어서 저 높은 공간과 진정으로 일체가 되고 있다.
우주시대 1995-2008
거대하고 장엄한 우주의 노래로 우리 자신을 달래도록 할 때이다.”
이성자에게 ‘우주’란 보편성의 동일어이다.
즉, 생명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영원한 움직임 가운데
지상과 천상의 아름다움 전체를 포용하는 총체적인 개념이다.
작가 또한 바로 이 우주계의 한 부분이다.
2000년대의 작품들은
음양이 섞여 최고 경지의 조화를 이루며 그 어느 때보다도 생동감이 있다.
봄의 새싹들이 돋아나는 것처럼 노랑, 보라, 주황색의 구름들이 펼쳐지고,
캔버스에 생명감을 불어넣어
무수하고 다채로운 별들이 빛을 발하고 소용돌이 치며 전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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