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 27
/조병화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
그 기쁨이었으면 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
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
맑게 닦아 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
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
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
가지에서 가지로
새에서 새에로
꽃에서 꽃으로
샘에서 샘에로
덤불에서 덤불로
숲에서 숲으로
골짜기에서 골짜기로
네 가슴의 오솔길에 익숙한
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
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에
둥우릴 만들어
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
그리고 네 깊은 숲에
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
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고독하다는 것은
/조병화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 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요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요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요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내 마음에 사는 너
/조병화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너는 먼 별 창 안에 밤을 재우고
나는 풀벌레 곁에 밤을 빌리다 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잔다
너의 날은 내일에 있고
나의 날은 어제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세월이다
문닫은 먼 자리, 가린 자리
너의 생각 밖에 내가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있다
너의 집은 하늘에 있고
나의 집은 풀 밑에 있다해도
너는 내 생각 속에 산다
하나의 꿈인 듯이
/조병화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난 것은
개이지 않는 깊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랑잎 지고 겨울비 내리고
텅빈 내 마음의 정원.
곳곳이
당신은 깊은 아지랭이 끼고
무수한 순간.
순간이 시냇물처럼 내 혈액에 물결쳐
그리움이 지면 별이 뜨고
소리없이 당신이 사라지는 첩첩이 밤.
살아 있는 것이란 하나의 꿈인 듯이
이렇게 외로운 시절 당신을 만나고
가야 하는 것은
가시는 않는
지금은 맑은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와 나는
/조병화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은 이미 늦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 날이 있을 것만 같이
그 날의 기도를 위하여
내 모든 사랑의 예절을 정리하여야 한다
떼어 버린 카렌다 속에, 모닝커피처럼
사랑은 가벼운 생리가 된다
너와 나의 회화엔
사랑의 문답이 없다
또 하나 행복한 날의 기억을 위하여서만
눈물의 인사를 빌리기로 하자
하루와 같이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와도 같이 보내야 할 인생들이었다
모두가 어제와 같이 배열되는
시간 속에
나에게도 내일과 같은
그날이 있을 것만 같이
이별하기에 슬픈 시절이 돌아간
샨데리야 그늘에 서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작별을 해야 한다
너와 나는...
사랑
/조병화
기다린다는 건
차라리 죽음보다 더 참혹한 거
매일 매시 매초, 내 마음은
너의 문턱까지 갔다간
항상 쓸쓸히 되돌아온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이 기다리는 고통은
아직 네가 있기 때문이다
비굴을 넘어서
헤어진다는 것은
/조병화
맑아지는 감정의 물가에 손을 담그고
이슬이 사라지듯이
거치러운 내 감정이 내 속으로
깊이 사라지길 기다렸습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해와 달이 돌다 밤이 내리면
목에 가을옷을 말고
--이젠 서로 사랑만 가지곤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워서 못 일어서는 서로의 자리올시다
슬픈 기억들에 젖는 사람들
별 아래 밤이 내리고 네온이 내리고
사무쳐서 모이다 진 자리에 마음이올시다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나하고 헤어질 이 시간에
황홀한 모순
/조병화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 훗날 슬픔을 주는것을, 이 나이에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기쁨보다는
슬픔이라는 무거운 훗날을 주는 것을, 이 나이에
아, 사랑도 헤어짐이 있는것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것은
씻어 낼 수 없는 눈물인 것을, 이 나이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헤어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적막
그 적막을 이겨낼 수 있는 슬픔을 기리며
나는 사랑한다, 이 나이에
사랑은 슬픔을 기르는 것을
사랑은 그 마지막 적막을 기르는 것을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조병화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당신이 무작정 좋았습니다.
서러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외로운 까닭이 아니올시다
사나운 거리에서 모조리 부스러진
나의 작은 감정들이
소중한 당신 가슴에 안겨들은 것입니다.
밤이 있어야 했습니다.
밤은 약한 사람들의 최대의 행복
제한된 행복을 위하여 밤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눈치를 보면서
눈치를 보면서 걸어야 하는 거리
연애도 없이 비극만 깔린 이 아스팔트
어느 이파리 아스라진 가로수에 기대어
별들 아래
당신의 검은 머리카락이 있어야 했습니다.
나보다 앞선 벗들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을 두고 돌아들 갔습니다.
벗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하여
나는
온 생명을 바치고 노력을 했습니다.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무하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을 믿고
당신과 같이 나를 믿어야 했습니다.
살아 있는 것이 하나의 최후와 같이
당신의 소중한 가슴에 안겨야 했습니다.
이렇게 될 줄을 알면서도...
오히려 비내리는 밤이면
/조병화
오히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려 주오
비가 궂이게 쏟아져야
그대에 가까이 가는 길을 나는 찾아간다오
나보다 더 큰 절망을 디디고
진정 이 지구를 디디고 나는 찾아 가리오
내가 살아가기에 알맞은 풍토는
비 많이 쏟아지는 밤
이러한 밤에 절망을 뒤적거려 보는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었던가
무슨 주변에 내가 더 큰것을 바라오리오
내 것인 것만 주오
진정 내 것인 절망만 주시고
나를 괴롭지 않은 이 자리에 머물게 하여 주오
비 내리는 밤을 기다리는 사람의 절개는
그대 것인 가는 호흡을 호흡하는 것이라오
비 내리는 밤이면
귀를 기울이어 내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어 주오
영 멀어가는 그대여
사랑 혹은 그리움
/조병화
너와 나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로 좁힌 거리에 있어도
그 수천억 배 되는 거리 밖에
떨어져 있는 생각
그리하여 그 떨어져 있는 거리 밖에서
사랑, 혹은 그리워하는 정을 타고난 죄로
나날을, 스스로의 우리 안에서, 허공에
생명을 한 잎, 한 잎 날리고 있는 거다
가까울수록 짙은
외로운 안개
무욕한 고독
아, 너와 나의 거리는
일 밀리미터의 수억분지 일의 거리이지만
그 수천억 배의 거리 밖에 떨어져 있구나
하루만의 위안
/조병화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넌
/조병화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머릿속에서
먼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때론 연하게, 때론 짙게
아롱거리는 안개
밋밋한 자리
감돌며
밤낮을 나보다 한 발 앞자리
허허
떠 있는 그 '있음'
넌 그 자리에서 좋은 거다
그만큼 떨어져 있는 자리에서 좋은 거다
지금 이곳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거리만큼
충만히
머릿속에서
넌 그 거리에서 좋은거다
항상
초상
/조병화
내가 맨 처음 그대를 보았을 땐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도 살고 있구나 생각하였지요
두번째 그대를 보았을 땐
사랑하고 싶어졌지요
번화한 거리에서 다시 내가 그대를 보았을 땐
남모르게 호사스런 고독을 느꼈지요
그리하여 마지막 내가 그대를 만났을 땐
아주 잊어 버리자고 슬퍼하며
미친 듯이 바다 기슭을 달음질쳐 갔습니다
사랑의 노숙
/조병화
너는 내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슬프고 즐거운 작은 사랑의 숙박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인생은 하루의 밤과 같이 사라져 가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하루의 밤과 같은 밤에
우리는 사랑 포옹 결합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인간이다
너는 내 사랑의 유산이다
너는 내 온 존재의 기억이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인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그대로 떠나야 하는 생명
너는 그대로 있어라
우리가 가고 내가 가고 사랑이 사라질지라도
너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라
때오면 너도 또한 이 세상에 사랑을 남기고 가거라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과 숨가쁜 밤과 사랑을 남기고
가난히 자리를 떠나라
지금 이 순간과 같이 나와 같이
너는 이 짧은 사랑의 숙박이다
너는 내 짧은 생존의 기억이다
기다림은 아련히
/조병화
이제,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인생의 겨울로 접어들면서
기다림은 먼 소식처럼 아련해지며
맑게 보다 맑게
가볍게 보다 가볍게
엷게 보다 엷게
부담 없이 보다 부담 없이
스쳐 가는 바람처럼 가물가물하여라
긴 생애가 기다리는 세월
기다리면서 기다리던 것을 보내며
기다리던 것을 보내면 다시 기다리며
다시 기다리던 것을 다시 보내면
다시 또다시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어라, 하면서
이 인생의 겨울 저녁 노을
노을이 차가워라
기다릴 것도 없이 기다려지는 거
기다려져도 아련한 이 기다림
노을진 겨울이거늘
아, 사랑아
인생이 이러한 것이어라.
기다림이 이러한 것이어라
자유
/조병화
공중을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공중을 날며 스스로의 모이를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그렇게 공중을 높이 날면서도
지상에 보일까 말까 숨어 있는 모이까지
찾아먹을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아, 그렇게
스스로의 모이를 찾아다니면서
먹어서 되는 모이와
먹어서는 안 되는 모이를 알아차리는
민감한 지혜를 가진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지상을 날아다니면서
내릴 자리와 내려서는 안 될 자리,
머물 곳과 머물러서는 안 될 곳,
있을 때와 있어서는 안 될 때를
가려서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새만이
자유를 살 수 있으려니
가볍게 먹는 새만이
높이 멀리 자유를 날으리.
산책
/조병화
참으로 당신과 함께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앉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다 앉았다 하고 싶은
나무 골목길 분수의 잔디
노란 밀감나무 아래 빈 벤치들이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누워 있고 싶은 남국의 꽃밭
마냥 세워 푸르기만한 꽃밭
내 마음은 솔개미처럼 양명산 중턱
따스한 하늘에 걸려 날개질 치며
만나다 헤어질 그 사람들이 또 그리워들었습니다
참으로 당신과 함께 영 걷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영 앉아 있고 싶은 잔디였습니다
나 돌아간 흔적
/조병화
세상에 나는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작은 소망도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아시아 동방 양지바른 곳
경기도 안성 샘 맑은 산골
산나물 꿀벌레 새끼치는 자리에
태어나
서울에 자라
당신을 만나 나 돌아가는 흔적
아름다움이여
두고 가는 것이여
먼 청동색 이끼 낀 인연의 줄기 줄기
당신을 찾아 세상 수만리 나 찾아 왔습니다
까닭도 가난한 소망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 곁에 잠시 있으러 왔습니다
이 세상은 사랑의 흔적
두고 가는 자리
사랑이 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에 당신이 사라지기 전에 나 돌아가고 싶습니다
당신을 만나러 수만리
소망도 까닭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잠시 나 있으러
나 찾아 왔습니다
공존의 이유
/조병화
깊이 사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헤어짐이 잦은 우리들의 세대
가벼운 눈웃음을 나눌 정도로 지내기로 합시다
우리의 웃음마저 짐이 된다면
그때 헤어집시다
어려운 말로 이야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얘기할 수 없음으로 인해
내가 어디쯤 간다는 것을 얘기할 수 없으며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날이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합시다
우리 앞에
서글픈 그 날이 오면 가벼운 눈 웃음과
잊어도 좋을 악수를 합시다
소라 /조병화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에 굳어 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혼자라는 거
/조병화
밤 2시경
잠이 깨서 불을 켜면
온 세상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나 혼자다
이렇게 철저하게
갇혀 있을 수가 있을까
첩첩한 어둠의 바닥
조물주는 마지막에 있어
누구에게나
이렇게 잔인한 거
사랑하는 사람아
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아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병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비가 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른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낙엽이 떨어져 뒹그는 거리에.....
한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덧을 모르는 가엾은 사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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