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다른 것일까? 아님 나만 그런 것일까? 예술치료사라는 명함을 한 장 쥐고 있지만, 나 역시 모르겠다, 정작 사람의 마음은. 나이 사십이 되면 해명할 수 없는 슬픔이 이따금 밀려온다. 사람의 위로가 소용이 없는 것은 내가 그 슬픔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이유가 없지는 아니할 터인데, 그저 먹먹할 때는 먹먹한 채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큰 길을 가다가 횡단보도에서 밀물처럼 썰물처럼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을 볼 때, 아님 등만 보이고 멀어져 가는 자전거를 타고 사라지는 사람들, 그 자전거에 실린 연장가방을 볼 때, 나는 슬픔을 만난다. 아, 문득 그렇구나, 아버지구나. 내 아버지를 나는 보고 있는 것이구나.
왜정 때 일본 사람 밑에서 목수 일을 배우셨던 아버지. 내가 태어나던 정오에 비 내리는 공일날 탁주집에서 술 사발을 들이키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는 항상 자전거를 그야말로 끌고 다니셨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언제 한 번 자전거에 번듯하니 올라타시나, 기대하였지만 아버지는 생전에 한번도 내 앞에서 자전거에 오르신 적이 없었다. 그저 목발처럼 자전거에 기대어 아버지는 일터까지 절룩이며 걸어가셨다. 연장가방을 자전거 뒤에 싸매어 두고, 아버지는 그렇게 자전거를 한쪽 다리 삼아 걸으셨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 나는 도서관 문이 잠길 때까지 밤늦도록 걸상에 앉아 있었다. 한밤이 되어 집에 돌아와도 아버지는 아직 들어오시지 않았다. 밤이 지치도록 깊어져서야 아버지는 허름한 바지단을 끌며 집에 들어오셨다. 정신이 나가시도록 술을 드신 아버지는 어머니와 잠시 얕은 언쟁을 벌이곤 이내 코를 골며 주무셨다. 가끔은 와지끈 문짝이 날아가는 소란이 일 때도 있었지만, 이튿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부서진 문짝을 전문가 솜씨로 멀쩡히 고쳐놓았다. 그렇게 하루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갔다. 그렇게 머리 위에 흐르는 떼구름처럼 세월이 지나갔다.
고등학교 대학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나는 나대로 이런저런 이유로 야밤에 집에 찾아들고, 아버지가 몸져누우시고 나서야, 나중에야 직접 보고 알았다. 아버지의 한쪽 다리는 소년의 다리처럼 가늘고, 목발처럼 살집도 없이 뼈대만 앙상한 나뭇가지 같았다. 평생을 한 다리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얼마나 세월이 가혹했을까, 그러나 한 번도 다리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도 청춘이 있었을까? 야심찬 젊은 시절이 그분에게도 찾아와 주었을까?
예전에 박완서란 분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을까>라는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난 아직도 그 소설을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그 제목만은 귀에 쟁쟁하게 남는다. 아버지는 젊은 목수 시절에 술 담배 안 하고 열심히 돈을 모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고향에 내려와 보니, 전답을 사두려던 꿈도 무색하게 할아버지가 도박으로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한 뒤였다. 그 뒤로 술을 하시고 담배를 태우셨다고 어머니가 말해준 적이 있다. 마음이야 더 없이 착하고 약해서 술기운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찌 슬프지 않으랴. 아버지는 그 때문에 환갑을 겨우 넘기고서 이승을 떠나셨다. 그분에게도 생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을까, 알 수 없다.
나이 사십이 되면, 그래, 고정희 시인의 말대로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 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고 스스로 제 생애가 넘겨준 짐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고비에 선다. ‘사십대’라는 고정희 시인의 글을 더 읽어보자.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이미 와 있는 인연들을 갈무리하고, 귀한 마음으로 사람을 아껴야 하는 나이가 사십대다. 스펙트럼처럼 스쳐 지나갔던 인연을 생각해 보면, 참 아쉬움이 남고 참 따뜻한 정이 고이기도 한다. 그 사람들을 다시 기억해냄으로써 우린 남아있는 내일을 걸어갈 힘을 얻는다. 내가 무슨 공력으로 살아갔는가? 묻게 된다. 모두 세상의 은혜를 입어서 목숨 붙여 이승에 머물고 있다. 모두 다른 이들의 공덕에 힘입어 그나마 삶을 버티고 있다. 내게 호흡할 힘을 허락한 목숨들은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름보다 많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이름들이 많을 것이다. 헤아릴 이름조차 갖지 않고서도 나를 살게 한 힘들이 있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단지 스물네 살의 나이에 ‘참회록’을 썼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고 썼다. 그는 말한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이들이 고백하는 슬픔은 눈물겨우며, 그 영혼은 누구보다도 맑은 얼굴이다. 이들은 경박하게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다. 예수는 광야에서 악마에게서 두 번째 유혹을 받는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말이다. 주님의 천사들이 행여나 다칠세라 손으로 너를 받쳐줄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땅에 속한 자임을 확인시켜준다. 사람의 마을에 당신의 천막을 치고, 그들처럼 아파하고 자신의 ‘허(虛)’와 ‘무(無)’을 고스란히 경험함으로써 어떻게 하늘이 자기 백성을 사랑하였는지 보여주신다. 낮은 곳에서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느님 없이’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드러낸다. 예수에게서 하느님은 시험당하지 않으신다. 그분에 대한 예수의 신뢰가 그로 하여금 무력한 자의 자리에 기꺼이 머물게 하신다.
(출처:<너에게 가고싶다> 한상봉, 이파르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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