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건져올린 시어
구상이 정치참여에서 본격 시인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박정희의 집권이다. 이어 전두환 정권의 시작은 구상 시인의 몰골마저 바꾸어놓았다. 1980년 이른 봄, 구상 시인은 고질인 천식이 도져 석달째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었는데, 제5공화국 출범시기에 허문도 등이 시인을 찾아와서 민정당 창당 발기인이 되어 달라고 졸랐다. 완강히 거절해도 “선생님이 거절하셔도 우리는 우리의 결정을 그대로 발표한다”고 했지만, “이런 폐물을 내세운들 무슨 일을 치르겠느냐”며 턱밑 수염까지 무성하게 자란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나는 시인으로서 이 땅의 세파를 또 한 고비 무사히 넘겼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구상 시인은 이후 또 다른 강요나 유혹이 있을까 싶어 이조시대 늙은이처럼 흰 수염을 그대로 기르기로 마음먹었다.
▲ 구상 시인 (사진출처/구상문학관 홈페이지) |
이중섭과의 우정은 남달랐다. 구상의 서재에 걸려 있던 그림은 이중섭이 담뱃갑의 은박지에 연필로 그린 천도복숭아 그림이다. "왜 어떤 병이든지 먹으면 낫는다는 천도복숭아 있지 않아. 그걸 먹고 우리 상(常)이 어서 나으라는 말씀이지"하며 이중섭은 구상 시인이 폐 절단 수술을 했을 때 병원에 찾아와 이 그림을 던져 주고 갔다. 구상 시인은 이후 ‘비의’(秘儀)라는 시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복숭아 천도 복숭아
님자 상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요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
그의 그 말씀을 가만히 되뇌이기도 하고 되씹기도 한다.
그런데 차차 그 가락은 무슨 영절스러운 축문으로 변해가더니
어느덧 나에겐 어떤 경건과 그 기쁨마저 주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또한, 내가 태중에서부터 숙친한 또 다른 한 분의 음성과 한데 어울려 오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니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피니 받아 마시라.
나를 기억하기 위해
이 예를 행하라‘
구상에겐 ‘입버릇’에 대한 재미난 글도 있다. 한국전쟁 때 일인데, 이계환 공군대령이 “세상 못마땅한 일을 보거나 들으면 언성을 높여 ‘저런 죽일 놈’하고는, 깜짝 놀라는 상대에게 이번엔 아주 상냥한 음성으로 ‘노래 한마디 부르겠습니다’라고 하여서 크게 웃겨 고약한 우리 심정을 달래곤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상 시인 역시 그분의 입버릇이 부지중(不知中) 옮아서,
행길에서도 “저런 죽일 놈”
버스에서도 “저런 죽일 놈”
모임에서도 “저런 죽일 놈”
심지어는 성당에서도 “저런 죽일 놈”
매일 저녁의 신문을 읽다가는
“저런 죽일 놈” “저런 죽일 놈들”
남의 귀에 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때도 곳도 가리지 않고 연발한다.
하였단다. 구상 시인은 “이 말이 씨가 된달까, 저런 증세가 날로 심해지면서 이번엔 내 마음속에 소리 안 나는 총이 있으면 정말 없애고 싶은 사람이 하나 둘 불어나고 그 욕망이 구체화 되어서 집단살인도 자행(恣行)할 기세라 이 밑도 끝도 없는 살의에 스스로가 놀라게끔 되었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머리에 떠올린 것이 “저런 죽일 놈”하고선 “노래 한 마디 부르겠습니다”라고 엉뚱한 후렴(後斂)을 되풀이하는 그분의 말이 해독제(解毒劑)였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도 ‘저런 죽일 놈’ 소리가 나오면 애송시 한 편이라도 읊어서 비록 마음속에서일망정 살인은 안 해야겠다”고 말한다.
구상 시인의 시 중에서 산문시가 오히려 더 와서 닿는다. 관상적인 시어보다는 구체적 일상을 탐색하고 있는 까닭일 것이다. 거기서 시인의 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듬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역시 대여섯 살 때의 추억이다.
이웃집 사랑채에서 서른이 됐을까말까 한 청상과부가 혼자 세 들어 있었는데 그녀는 가톨릭의 독신녀로서 수도원 세탁부 노릇을 하며 살고 있었다.
늦둥이로 노부모 슬하에 홀로 자라고 있던 나는 그녀를 몹시 따랐고 그녀도 나를 몹시 귀여워해서 그 집에는 무상출입이었을 뿐 아니라 가끔은 밤에도 그녀와 함께 지냈는데 집에서도 이를 책잡지 않았다.
그런 어느 가을, 오늘 저녁 같은 휘영청 달밤, 나는 다듬이질하는 그녀 곁에서 놀다가 잠이 들었었는데 한밤중 눈을 뜨니 그녀는 아직도 똑딱, 똑딱이라 잠에 취한 내가 반 응석으로
--아줌마 안 자?
하고 돌아누웠더니 등 뒤에서
--응, 가슴의 불을 끄고서!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때 그녀 가슴 속의 불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찌 끈다는 것인지 그 뜻을 알 바 없었으나 그 말만은 내 머리 한 구석에 박혀 있다가 이렇듯 잠 안 오는 달밤이면 또렷이 떠오른다.
이승, ‘영원’을 향해 걸어가는 길목
구상 시인에게 이승에서 지낸 한 생애는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영 기분 좋은 곳도 영 기분 나쁜 곳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은 계속 된다”는 것이고, 여기서 만난 이들과 이런저런 인연을 엮고 자잘한 기쁨과 후회 속에서 ‘영원’을 향해 걸어가는 길목일 따름이다. ‘도형수(徒型囚) 짱의 독백’이라는 부제가 달린 ‘드레퓌스의 벤취에서’라는 시에서는, 상식이 전하는 자유와 속박의 경계를 넘어선 삶에 대해 관조한다.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곤이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얽혀 올 것을 겁내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게 새 삶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 말일세. 이 세상은 어디를 가나 감옥이고 모든 인간은 너나없이 도형수(徒刑囚)임을 나는 깨달았단 말일세.
이 죽음의 섬을 지키는 간수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우리 큰 감방의 형편없이 위험한 건달패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소임인 200마리의 돼지를 기르고 사는 것이 딴 세상 생활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것을 터득했단 말일세.
빠삐용! 그래서 자네가 찾아서 떠나는 자유도 나에게는 속박으로 보이는 걸세. 이 세상에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창살과 쇠사슬이 없는 땅은 없고, 오직 좁으나 넓으나 그 우리 속을 자신의 삶의 영토(領土)로 삼고 어려 모양의 밧줄을 자신의 연모로 변질(變質)시킬 자유만이 있단 말일세.
빠삐용! 그것을 알고 난 나는 자네마저 홀로 보내고 이렇듯 외로운 걸세.
2004년 5월 11일 84세로 이승을 하직한 시인 구상은 이렇게 자신의 임종을 고백했다. 여전히 남은 것은 회한뿐이다.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 공포증 폐쇄 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지각만으로도 내가 외면으로 지녀 온
양심, 인정, 명분, 협동이나 보험에나 들 듯한 신앙생활도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 쓴답시고 시어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 망측한 나의 참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구상, 임종고백)
마지막으로 2001년 <문학사상>에 실렸던 구상 시인의 대표작 하나를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시인의 혜안을 되새겨 봄직하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구상,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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