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그의 여인들...
'그림의 암살자'라고 불리는 너무 나도 유명한 피카소, 그에게도 예술가로서의 고통과 고뇌가 있었지만, 여성편력 또한 그의 생애에 걸쳐 이어졌다. 그는 80여점의 여인들,친구들,시인들의 초상화를 남겼다.
피카소의 여인들은 대부분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피카소가 여인들의 영혼을 양식삼아 작업한 벰파이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인들은 피카소의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살아남아 있다.
피카소는 파리 초기시절 몽마르트 언덕에 사는 친구 막스자콥의 방에 끼어살면서 막스가 일하러 나가는 낮에는 자고 밤에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했다. 막스의 방에는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세기말 분위기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비관적이고 고뇌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의 그림의 주조가 짙은 푸른색으로 나타나는 청색시대이다
어려운 시기, 피카소는 마들렌느를 만난다. 몽마르트에서 캬바레를 운영하며 가난한 예술가를 후원하던 예술애호가의 딸이다.
이 초상화는 청색시대에서 분홍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 피카소가 어느 정도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음산한 분위기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갑자기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피해 피카소가 고양이를 안고 어느 집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이 페르낭드 올리비에 집이었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인상을 "그는 작고 까맣고 후줄근했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정열로 가득차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두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피카소는 페르낭드의 사랑과 함께 우울한 청색시대를 이별하고 분홍의 시대로 넘어간다 . 1905년의 마들렌느를 그렸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느낌과 색채로 스페인 특유의 따뜻함과 포근함이 드러나고 있다.
피카소가 세번째 여자 올가를 만난 것은 장콕토 때문이었다. 1917년 장콕토는 에릭 사티가 음악을 하고 디아길레프가 무대화하려는 발레의상을 부탁하기 위해 피카소를 찾았다.
피카소는 완강히 이를 거부 하다가 발레리나 올가 코클로바를 보고 첫눈에 반해 응하고 만다. 디아길레프는 피카소에게 그녀는 유뷰녀이니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둘은 이듬해에 정식 결혼을 한다. 올가는 피카소에게 자신을 그리려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그려달라고 부탁을 한다.
피카소의 그림이 고전주의로 회귀하는 계기가 된다. 올가의 초상은 피카소의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고전주의 미학에 충실하고 있다.
피카소는 1927년 올가와 헤어진다. 그리고는 라파예트 백화 점앞에서 희랍풍의 금발의 미녀 마리테레즈를 만난다.
당시 17세도 안된 그녀를 46세의 피카소는 유혹한다. "나는 피카소라는 사람인데 우리 함께 대단한 일을 해보자" 지금까지 나온 그녀의 초상화는 10작품 이상이 된다.
큐비즘, 초현실주의 등 미적 실험을 통해 그려진 그녀의 초상화는 조각난 반짝이는 유리 영혼처럼 얼굴의 실체를 알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녀의 초상화들을 통해 머리 속에서 그려보면 사진보다 명료하게 영상이 떠오른다
피카소는 마리테레즈에게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셍 제르멩 거리 카 페에서 브르통, 엘류아르 등 초현실주의자들과 잡담을 하다가 도라라는 지적이고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를 만난다.
도라를 모델로한 '우는 여자'는 피카소의 걸작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도라는 의문의 자살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마리토레즈, 도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던 62세의 피카소는 1943년 어느날 식당에서 21살의 프랑수와즈 질로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아래의 사진은 1952년 지중해에서 바캉스를 즐기고 있는 피카소와 그녀의 모습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진이다
1954년 도라와 프랑수와즈가 피카소를 떠나고 58년 마리테레즈마저 떠난다. 그러나 피카소는 곧바로 자켈린이라는 여자를 만나 결혼, 92세로 1973년 생을 마감한다.
출처. 인디아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