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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그림들/한국의화가 작품

평양에서 내려온 국보

 

 

지금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건무)에서는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6월 13일부터 일반에게 공개된 이번 전시는 8월 16일까지 열린다.

북한이 소장하고 있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문화재들 중 엄선된 90점의 유물들을 가져와 전시한 유물들 중에는 북한의 국보 50점과 우리나라 보물에 해당하는 준국보 11점이 포함되어 있다. 남과 북으로 분리된 이후 북쪽의 유물이 공식적으로 내려와 전시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는 것에 이번 전시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전시된 유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그동안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었던 평양시 상원군 검은모루 출토의 구석기가 있다. 한 진열장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이 유물은 찌르개, 뗀석기, 주먹도끼다. 100만년 전 우리 조상들이 썼던 도구들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몇 가지 유물을 통해 유물에 좀 더 접근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고려 왕건의 청동상이다.


고려 태조 왕건 청동상, 개성시 해선리 현릉, 고려 10세기말-11세기초,

높이 143.5cm,  국보 

 

1992년 10월 고려 태조릉인 현릉(顯陵)의 보수 공사 중, 봉분 북쪽 약 5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발견 초기에는 ‘청동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 결과 고려의 태조 왕건의 동상으로 밝혀졌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고, 동상과 함께 발견된 옥띠 장식 등이 왕건의 관에 있던 옥띠 장식품과 재질 및 형태가 동일하며, 결정적으로는 태조 왕건의 주상(鑄像)을 능 옆에 묻었다는 조선시대의 기록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은 918년 고려를 세운 후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최초의 임금으로, 죽은 후에도 고려 왕실을 상징하는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태조의 제사를 지냈던 봉은사는 국가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려 국왕이 직접 분향하였다. 태조 왕건상은 봉은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양식상 10~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신(裸身) 형태의 동상이지만, 머리에는 외관과 내관으로 된 관을 쓰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발굴 당시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금도금을 한 조각과 얇은 비단 천들이 붙어 있었는데, 이는 당초에는 몸에 도금(鍍金)을 하였으며,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쳤음을 보여준다.

이 유물에 대해 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에 모나리자가 있다면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엔 왕건 상이 있다고. 그만큼 왕건 상은 유물들 중에서도 음미해봐야 할 귀중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뼈피리,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유적, 기원전 2000년기 후반기,

 길이 17.3cm, 지름 1cm, 준국보

 

 

 새의 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피리로, 기원전 2000년기 후반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이다.  가늘고 기다란 원통형으로, 가운데는 비어 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13개의 구멍이 뚫려져 있다. 구멍 사이의 간격은 대체로 1cm 내외다. 양끝의 한쪽은 제대로 남아 있고, 다른 한쪽은 좀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악기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슬로베니아의 곰 다리뼈로 만든 피리를 비롯해 유럽 각지와 중국에서도 고니나 매, 사슴뼈로 만든 피리들이 발견되고 있다.

 

 

칼, 칼집, 고조선, 전 평양, 길이 47.5

 

 

 

  칼집은 청동장식품을 결합시켰고, 몸체에는 옻칠을 하였다. 이 처럼 한국식 동검문화 단계에서 보이는 독특한 칼집은 고조선 후기부터 북한지역에서 유행하였으며, 남부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칼집은 먼저 나무로 만든 후 모두 5개의 금구로 감입시키고, 금구사이와 맞뚫음 무늬 내부에 옻칠을 하였는데, 칼집의 일부는 복원한 상태이다.

 

 

 

 

 

'전(方角頁 )’자를 새긴 활자, 개성시 만월대, 고려, 길이1.3cm, 너비 1cm,

준국보

 

 

 1958년 개성시 만월대 신봉문 터로부터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발굴되었다. ‘이마 方+角+頁(古자이기에 결합한 글자로 표시한다)  ' 자가 새겨진 이 활자는 활자의 생김새, 글자의 모양, 출토지점 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활자로 판단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 山+復’ 자를 새긴 활자 역시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려시대 활자로 알려져 있는데, 글자의 느낌 역시 ‘전’자와 비슷하다.

고려시대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가 시작되었으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현재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1377년에 인쇄되었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직지심체요절》이전에 이미 금속활자를 사용한 출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자를 새긴 활자’와 함께 고려시대 금속활자 기술의 선진성과 우수성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남과 북에 하나씩 남아있는 이 역사의 증거물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거울 거푸집, 傳 평안남도 맹산군, 청동기시대, 지름 20cm, 준국보

 

평안남도 맹산군 봉인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1930년 평양부립박물관을 거쳐 현재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거푸집의 발견은 청동기의 제작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거푸집은 대부분이 활석제인데, 돌이 무르기 때문에 조각하기 쉽고, 주조할 때 터지지 않아 반영구적이며, 표면이 매끄러워 주조된 청동기 표면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거푸집의 경우 앞·뒷면에 각기 다른 형태의 거친무늬 거울의 주형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 새겨진 거울은 지름이 17.15cm인데, 2개의 꼭지가 있으며 꼭지 사이에는 구멍을 뚫기 위한 연결부가 잘 남아 있다. 거울의 테두리는 반원형이며 꼭지 반대편에 용액을 주입하는 탕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뒷면에 새겨진 거울 주형은 지름이 12.8cm인데, 역시 주형의 한쪽에 치우쳐 2개의 꼭지가 있고 주입구는 역시 그 반대편에 위치하며 테두리도 반원형을 띠고 있다.

 

 

베개 마구리 장식, 평양시 역포구역 진파리 7호무덤 출토, 고구려 4∼5세기,

길이 22.8㎝, 너비 13㎝, 국보

 

 

 

  고구려의 대표적인 금속공예품으로 중앙에 2겹의 둥근 테두리 속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를, 그 위쪽에는 봉황을, 양옆으로는 용을 각각 표현하였다.

처음에는 이 장식품이 피장자의 머리부분에서 한쌍이 출토되어 금동관의 일부로 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피장자의 베개마구리 장식(베개의 양옆을 장식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맞뚫음된 금동제품에 비단벌래의 날개를 깔아 장식하는 예는 신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에서는 확인되는 것으로 고구려와의 영향관계를 짐작케 한다.

 

 

 치미,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상경용천부 제9절터, 발해 10세기,

  높이 91㎝, 너비 91.5㎝, 두께 36㎝

 

 

  이 치미를 실제로 보게되면 과연 건물의 규모는 얼마나 거대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것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내에 있는 제9절터에서 출토된 치미이다. 발해의 절터에서 치미가 출토된 예는 다수가 있지만, 이 중 완전히 복원되는 것은 상경성 제1절터와 제9절터에서 출토된 것뿐이다.

이 치미는 진한 녹색의 유약을 바른 것으로, 두 날개에는 각각 17개의 돋을 선을 새겨 새의 깃을 표현하였다. 날개와 몸통 사이에 7개의 구멍을 뚫고, 거기에 머리가 꽃모양으로 생긴 장식을 맞추어 넣었는데, 가운데 꽃술 부분이 둥그스름하게 도드라졌고, 그 둘레에는 다수의 꽃잎을 새겨져 있다. 몸체의 등 부분에는 작은 구멍들이 줄을 맞추어 가면서 수십 개나 뚫려있다.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면서 펼친 두 날개 사이로 주둥이를 쑥 내민 형상에 녹색유약이 잘 조화되어 전반적으로 힘이 있고 세련된 느낌이다. 제1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는 형태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양식이다. 안학궁에서 이와 동일한 대형의 치미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적 계승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관음사 관음보살, 고려, 개성시 산성리 관음사 높이 113.0cm, 국보

 

 

 이 보살상은 원통형의 보관에 화불을 새겨 넣었고 온몸을 장신구로 매우 화려하게 꾸몄다. 오른쪽 다리를 의자 아래로 내린 자세와 높은 보관은 고려시대 말에 유행한 관음보살상 모습 중 하나이다. 관음보살은 '내려다보고 있는 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아발로키테슈바라'를 한역한 것이며 '소리를 듣는 이'라는 뜻의 관음, '세상의 소리를 듣는 이'라는 뜻의 관세음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운다.

 

선녀도, 김홍도(金弘道, 1745- ?), 18세기말-19세기초, 비단에 먹․담채(絹本墨筆淡彩),  19×13.2cm, 국보

 

 

 

  작지만 아주 매력적인 아름다운 그림이다.

  산에서 캔 영지를 바구니에 가득 담고 내려오는 영지선녀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영지선녀는 서왕모의 생일잔치에 늦게 참석했다하여 청봉산으로 쫓겨났다가 강원이라는 청년을 사모하게 되어 신선들만 먹을 수 있는 영지버섯을 그에게 먹여주었다 한다. 그것이 인간이 영지버섯을 먹기 시작한 시초라고 한다. 

  김홍도의 작품으로 김홍도는 조선시대 3대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아름다운 풍채와 태도에 마음은 활달하고 구애됨이 없어 사람들이 신선 세계에 사는 인물이라 했으며 그가 그린 산수 인물, 화훼(꽃), 영모(새와 짐승)는 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특히 신선을 잘 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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