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장의 묵화(墨畵)가 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그려진 메기 한 마리. 세상사에 초연한 듯 무표정한 얼굴에서 언뜻 근심이 엿보인다. 별다른 움직임도 없건만 응집된
기(氣)와 강한 생명력이 물씬하다. 붓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기 위해 잠시 멈춘 숨을, 그대로 그림에 불어넣은 이는 누구인가.
그림 옆에 짤막하게 적혀있는 ‘작가노트’에서 주인공을 짐작해보자.
“장마철에 모든 나무들이 약간씩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빗소리를 듣게 되지요. 사실 행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미
정하고 갈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단지 노력 여하에 따라 오는 속도만 달라질 뿐.”
비 맞은 나무의 모습을 우울하다 느끼는 ‘감수성’, 세상일에 달관한 ‘도인’처럼 담담한 어조. 몇몇 눈치 빠른 독자는 이쯤에서 답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나로 묶어 내린 긴 머리, 콧수염, 흰색 옷을 고수하며 외양에서부터 도인의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작가 이외수가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필력으로, 세상을 글에 담아내던 그가 그림으로 영역을 옮겨왔다. 선화집 <숨결>(솔과학. 2006)을
통해서다.
시인 배문성은 책의 서문에서 “이외수의 작가 정신이 한 점 일갈로 요약된다면 바로 그의 그림을 통해서일 것”이라며 “그는 많은 장편소설로
자신의 세계를 말해 왔지만 기실 그가 그 많은 글에서 하고자 했던 말도 바로 이 한 마리 메기의 짧은 순간에 다 담길지 않을까 싶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림은 함축적이고, 강렬하다. 오죽하면 서로를 ‘도적놈’이라 칭하는 죽마고우 故 중광스님이 그를 만날 때 마다 “이외수는 직업을
바꿔서 그림쟁이로 나가면 좋겠다”고 졸라댔겠는가.
‘숨결 세모금’ 편에 실린 글에서 중광스님은 “3천 리 밖에 있는 그림이라도 이외수 도적놈 앞에 좋은 그림으로 나타나지 않고는 못
배겨낸다”고 말한다. 하룻밤에 화선지 1~2백장을 그려낸다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이외수가 화가지망생이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그는 선화(仙畵) 개인전(1994)을 필두로, 천상병예술제
특별초대전(2005)까지 세 차례의 개인전을 열며 못다 피운 예술혼을 불태워왔다.
하지만 이를 책으로 엮어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숨결>의 출간이 더욱 의미 깊다 하겠다. 책에서 펼쳐진 이외수의
작품세계를 좀 더 들여다보자.
무엇이 불만인지 고개를 돌려버린 ‘까칠한’ 표정의 새와 ‘야리야리한’ 줄기가 불면 날아갈까,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코스모스.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림 속 사물들은 이외수의 소설과 맞닿아 있다.
그의 처녀작 <꿈꾸는 식물>(해냄. 2005)을 떠올려보라. 문학평론가 김현이 “너무나 심하게 나를 고문한다”고 평한 작품은
엉덩이에 난 종기처럼 독자가 감추고 싶은 치부를 까발리고, 낱낱이 파헤쳤다. 있는 그대로를 가감없이 보여주기는 글이나 그림이나 마찬가지인 셈.
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그림이 좀 더 따뜻하고 여유롭다. 검은 먹칠에 자리를 내주고 남은 하얀 화선지의 ‘여백’이 독자에게 평온함을
안겨주는 것. 이외수의 그림은 그가 써온 소설처럼 아프지만, 그보단 ‘행복한 통증’이다.
“슬프고 외로울 때 같이 울어줄 사람이 있다면 그대의 인생은 실패하지 않은 인생입니다. 저는 독자들이 슬프고 외로울 때를 위해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서 때로는 혼자 웁니다. 그러나 제 인생도 눈시울을 적실 줄 아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은 인생입니다.”
(‘작가노트 24’)
채워지지 않는 원고지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릴 이외수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당신은 어떠한가. 슬프고 외로울 때 함께 울어줄
이가 있는가. 선뜻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 실패한 인생이라 자책하는 당신이라면 지금 당장 <숨결>을 펼쳐들자.
작가가 선사하는 숨결을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남김없이 받아먹다 보면 가슴 속에 가늘게 피어오르는 삶의 희망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