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사평역에서 -곽재구-

조용한ㅁ 2008. 8. 23. 16:08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를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오랫동안 바람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내가 바람을 사랑하는 제일 큰 이유는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 중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겠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 중에 그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없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많이 쓸쓸할 때,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고 가슴속이 텅 비어 지상 위의 모든 집착들로부터 벗어

               날 때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닌지요.

 

               존재의 비상.

               그것은 쓸쓸함만이 줄 수 있는 큰 선물은 아니겠는지요.

 

 

                                                            -곽재구의《포구기행》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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