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년 - 문정희
터미널에서 겨우 잡아탄 택시는 더러웠다
삼성동 가자는 말을 듣고도 기사는
쉽게 방향을 잡지 않더니
불붙은 담배를 창 밖으로 휙 던지며
덤빌 듯이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욕을 하기 시작했다.
삼성동에서 생선탕집을 하다가
집세가 두 배로 올라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했다
적의뿐인 그에게 삼성동까지 목숨을 내맡긴 나는
우선 그의 사투리에 묻은 고향에다 안간힘처럼
요즘 말로 코드를 맞춰보았다
그 쪽이 고향인 사람과 사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속으로 이 시를 시대 풍자로 끌고 갈까
그냥 서정시로 갈까 망설이는 순간
그에게서 믿을 수 없는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
한해 여름, 가난한 시골 소년이 쳐다볼 수 없는
서울여학생을 땡볕처럼 눈부시게 쳐다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을 날, 불현듯 그 여학생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마치 기적을 손에 쥔듯
떨려서 봉투를 쉽게 뜯지 못하고 있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친구녀석이 휙 나꿔채서
편지를 시퍼런 강물에 던져 버렸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밤이 되면 흐르는 불빛속을 가면서
그때 그 편지가 떠내려가던 시퍼런 급류 앞에서
속으로 통곡하는 소년을 본다고 했다
어느새 당도한 삼성동에 나는 무사히 내렸다
소년의 택시는 그 자리에서 좀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아름다운글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 상 - 조병화 (0) | 2008.09.23 |
---|---|
인생은 / 조병화 (0) | 2008.09.23 |
오늘 / 구상 (0) | 2008.09.16 |
감나무가 있는 집 - 김창균 (0) | 2008.09.11 |
낙 엽 / 레미 드 구르몽(Rémy de Gourmont 1858 - 1915) (0) | 2008.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