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비 갠 뒤
홀로 산길을 나섰다
솔잎 사이에서
조롱조롱
이슬이 나를 반겼다
"오!" 하고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만 이슬방울 하나가
툭 사라졌다
들녘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사랑
사랑하는가?
눈물의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슬픈 지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수도원에서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한나절을
개울가에 앉아 있었네
개울물은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쉼도 없이 앞다투지 않고
졸졸졸
길이 열리는 만큼씩 메우며 흘러가네
미움이란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네
수건
눈 내리는 수도원의 밤
잠은 오지 않고
방 안은 건조해서
흠뻑 물에 적셔 널어놓은 수건이
밤사이에 바짝 말라버렸다
저 하잘것없는 수건조차
자기 자신 물기를 아낌없이 주는데
나는 그 누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켜켜이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송이도 되지 못하고
세상사
울지 마
울지 마
이 세상에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어
세상은
다 그런거야
울지 말라니까!
통곡
죽음을 막아서는
안타까운 절규
"안 돼!"
온몸을 던져서 막아서는
여인
그러나 죽음은
그 어떤 사정도
명령도 듣지 않고
무표정히
갈 길을 간다
바보
잠든 아기를 들여다본다
아기가 자꾸 혼자 웃는다
나도 그만 아기 곁에 누워 혼자 웃어 본다
웃음이 나지 않는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웃음이 나지 않는다
나무의 말
소녀가 나무에게 물었다
"사랑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들려다오'
나무가 말했다
"꽃 피는 봄을 보았겠지?"
"그럼"
잎 지는 가을도 보았겠지?"
"그럼"
"나목으로 기도하는 겨울도 보았겠지?"
"그럼"
나무가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나의 대답도 끝났다"
가시
장미나무에
숯불덩이 같은 꽃이 얹히는
아카시나무에
팝콘 같은 꽃이 확 퍼져 있는
찔레나무에
아기 손톱 같은 꽃이 앙증스럽게 손짓하는
오월
나의 나무는
꽃은 없고
가시만 돋아
하늘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진리도 낮은 데로 흐른다
하늘이 높은 데 걸린 것은
최고의 낮은 터이기 때문
새 나이 한 살
한 살
새 나이 한 살을
쉰 살 그루터기에서 올라오는
새순인 양 얻는다
썩어 문드러진 헌 살 헌 뼈에서
그래도 남은 힘이 있어
올라온 귀한 새싹
어디 몸뿐이랴
시궁창 같은 마음 또한 확 엎어 버리고
댓잎 끝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 받아
새로이 한 살로 살자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벌거숭이
그 나이 이제
한 살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백두산 천지에서 -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흐르는 곡 : Sometimes When it Rains / Secret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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