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정채봉 시모음

조용한ㅁ 2008. 12. 18. 22:22

 

생명

 

비 갠 뒤

홀로 산길을 나섰다

솔잎 사이에서

조롱조롱

이슬이 나를 반겼다

"오!" 하고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그만 이슬방울 하나가

툭 사라졌다

 

들녘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사랑

 

사랑하는가?

 

눈물의 강이

어디로 흐르는지

 

슬픈 지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수도원에서

 

어떠한 기다림도 없이 한나절을

개울가에 앉아 있었네

개울물은 넘침도 모자람도 없이

쉼도 없이 앞다투지 않고

졸졸졸

길이 열리는 만큼씩 메우며 흘러가네

미움이란

내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네

 

수건

 

눈 내리는 수도원의 밤

잠은 오지 않고

방 안은 건조해서

흠뻑 물에 적셔 널어놓은 수건이

밤사이에 바짝 말라버렸다

저 하잘것없는 수건조차

자기 자신 물기를 아낌없이 주는데

나는 그 누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고

켜켜이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송이도 되지 못하고

 

세상사

 

울지 마

울지 마

 

이 세상에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어

 

세상은

다 그런거야

 

울지 말라니까!

 

통곡

 

죽음을 막아서는

안타까운 절규

"안 돼!"

온몸을 던져서 막아서는

여인

그러나 죽음은

그 어떤 사정도

명령도 듣지 않고

무표정히

갈 길을 간다

 

바보

 

잠든 아기를 들여다본다

아기가 자꾸 혼자 웃는다

나도 그만 아기 곁에 누워 혼자 웃어 본다

웃음이 나지 않는다

바보같이

바보같이

웃음이 나지 않는다

 

나무의 말

 

소녀가 나무에게 물었다

"사랑에 대해서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들려다오'

 

나무가 말했다

"꽃 피는 봄을 보았겠지?"

"그럼"

 

잎 지는 가을도 보았겠지?"

"그럼"

 

"나목으로 기도하는 겨울도 보았겠지?"

"그럼"

 

나무가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랑에 대한 나의 대답도 끝났다"

 

가시

 

장미나무에

숯불덩이 같은 꽃이 얹히는

아카시나무에

팝콘 같은 꽃이 확 퍼져 있는

찔레나무에

아기 손톱 같은 꽃이 앙증스럽게 손짓하는

오월

 

나의 나무는

꽃은 없고

가시만 돋아

 

하늘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

진리도 낮은 데로 흐른다

하늘이 높은 데 걸린 것은

최고의 낮은 터이기 때문

 

새 나이 한 살

 

한 살

새 나이 한 살을

쉰 살 그루터기에서 올라오는

새순인 양 얻는다

 

썩어 문드러진 헌 살 헌 뼈에서

그래도 남은 힘이 있어

올라온 귀한 새싹

 

어디 몸뿐이랴

시궁창 같은 마음 또한 확 엎어 버리고

댓잎 끝에서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 받아

새로이 한 살로 살자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벌거숭이

 

그 나이 이제

한 살

 

슬픔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 백두산 천지에서 -

 

아!

이렇게 웅장한 산도

이렇게 큰 눈물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흐르는 곡 : Sometimes When it Rains / Secret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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