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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미술걸작전

조용한ㅁ 2009. 1. 17. 02:15
근대미술전 보는 불편한 마음 [2009.01.09 제743호]
[노형석의 아트파일]
서울 덕수궁 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걸작전’, 정체성 불명의 풍경 앞에 서다
노형석
» <두루마리를 입은 자화상>
이 땅의 근대 그림들을 모은 전시회는 필자에게 편안한 감상거리가 못 된다. 20세기 초 곡절과 단절로 얼룩진 우리 그림의 뒤틀린 역사를 과제처럼 복기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강박처럼 밀려올 때가 많았다. 색채와 선이 활개치는 서양 모던 그림에 대한 맹렬한 모방 욕구, 뒤처진 묘사의 기본기가 엉켜 어색한 몸짓과 정체성 불명의 풍경을 짓는 그림들. 그 앞에서 눈힘 주기가 못내 거북스러운 느낌이랄까.

서울 덕수궁 미술관의 ‘한국근대미술걸작전’(3월22일까지)도 그런 강박감 속에 보았다. 최초의 양화가 고희동(1886~1965)이 웃통 벗어젖히고 무덤덤한 얼굴로 부채질하는 모습을 그린 1915년작 <자화상>을 필두로, 1900~60년대 작가 80여 명의 그림과 조각 232점은 행렬을 이루며 석조전 동관과 서관을 메웠다. 리얼리즘 거장 이쾌대(1913~65)의 대작 <군상Ⅳ>를 비롯해 향토색 화가 이인성, 국민화가 이중섭·박수근, 조각가 권진규 등 유명 작가들의 명품들 앞은 눈도장 찍으려는 관객으로 붐볐다.

감상의 뒤끝은 고희동의 무미건조한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대를 묻다’란 부제는 당대 작품들의 선구적 요소가 어떤 변화를 이끌어왔는지 살펴보려는 뜻이라고 미술관은 밝혔다. 그런데 그 맥락에서 근대인, 근대의 일상·풍경·꿈이라는 세부 주제들은 설득력이 거의 없었다. 출품작 중 상당수는 소주제 서너 개에 모두 끼워맞출 수 있었다. 출품작 절대다수가 우리 예술계가 자생적으로 만든 인식틀이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 서구 예술사조를 형식적 수단으로 받아들여 그려낸 산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목적의식이나 시대정신이 분명하지 않다면, 후대 해석의 장난에 희롱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예리한 안광을 빛내는 화가 이여성의 독서상(이쾌대)이나 쾌남형 근대 청년(이마동), 광포한 붓터치로 그린 <친구의 초상>(구본웅) 등에서 우리는 당대 작가들이 받아들인 근대인의 내면 모델을 나름 엿보게 된다. 다른 대다수 그림들은 에로틱한 관능이나 조형적 욕망조차 보이지 않는 건조한 여인좌상, 여인입상이나 누드상, 군상들로, 일본에서 전수받은 근대 포즈의 도식을 전해줄 따름이다.

시대를 직시한 시선의 매혹을 드러낸 이는 단연 이쾌대였다. 1948~49년 그린 걸작 <두루마리를 입은 자화상>(그림)은 푸른빛 하늘에 이 땅의 산과 벌판, 짐 지고 들판을 지나가는 농촌 아낙네 등이 배경이 된다. 그 앞에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을 쓴 작가가 정면을 노려본다. 전통 붓에 팔레트를 쥔 손, 짙은 눈썹에 크게 눈 뜨고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은 마냥 희망과 결의에 차 있지 않다는 것을 일러준다. 가까스로 냉정을 다잡은 눈은 기실 불온하며 불안하다. 푸른빛 하늘, 윤곽만 있고 구체적 묘사가 없는 여인, 농촌 등의 뒷배경도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해방 정국의 혼란에 휩싸인 나라와 미술판의 불길한 앞날일까. 그는 관객 있는 배경의 정면을 향해 나오려는 듯한데, 물론 장밋빛 길은 아니다.

실제로 그를 기다린 건 대한민국 공민이던 작가를 인민의용군으로 뒤바꾼 전쟁과 포로 생활, 그리고 월북길이었다. 그의 세 아이와 부인, 자신을 그린 가족 스케치 앞에서 필자는 눈이 메었다. 엄마 젖 빠는 맏아들을 그려놓은 다른 스케치엔 피카소, 보나르, 브라크 같은 서구 근대 거장들의 이름을 깨알같이 적었다. 서구 근대미술에 대한 탐구의 열망은 그 또한 누구 못지않았으리라. 1988년 해금된 그의 회고전 소식은 20년 넘도록 들리지 않는다.

또 하나 눈에 맺힌 건 50년대 작가들이 한국전쟁의 생채기를 색다르게 작품에 내장시켰다는 사실이다. 전시 말미 동관에 50년대 중반작으로 걸린 박영선의 <향토>, 박항섭의 <포도원의 하루> 등은 뜻밖에도 낙원을 묘사한 그림들이다. 포도농장의 수확 모습, 농촌의 이상향 등을 표현한 이 그림들의 남녀 인물들은 정작 유유자적이 아닌, 고대 이집트인처럼 경직된 얼굴과 포즈를 짓고 있다. 피카소의 그림 같은 입체파적 인물 이미지에 ‘공산도배들’을 격멸하는 포신과 총구를 붙인 변영원의 <반공여혼>(1952) 같은 작품은 코믹하면서도 스산한 비감을 자아낸다. 이들 기묘한 전후 그림을 보는 것은 분단과 전쟁, 냉전이란 ‘블랙홀’을 나름 ‘부재한 낙원’의 복선으로 암시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사실 그런 선례는 일제시대 향토색 묻힌 그림들에서 먼저 볼 수 있다. 전통 산수도를 양화풍으로 변질시킨 듯한 백남순의 <낙원>, 이인성의 <어느 가을날> 같은 30년대 그림들이 전후 그림과 함께 전시 중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맥이 풀린 필자는 동관 2층 전시실에서 황소의 거센 숨발을 색채로 틔운 이중섭의 <황소>를 보면서 겨우 마음을 다독거릴 수 있었다. “미술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라는 곰브리치의 말이 실감 나는 전시였다.

노형석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