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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작. 제목은 ‘사우(思友)’였으나 뒤에 제목을 쉽게 풀어쓰게 되어 ‘동무생각’으로 바뀌었다. 원래 동요조의 선율이 바탕을 이룬, 작곡자의 가곡으로서는 퍽 고조된 작품으로, 악보에 정리된 곡을 작사자에게 부탁해서 가사를 붙였다. 이 노래는 작곡되자마자 널리 퍼져 삽시간에 젊은이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전반부의 전형적인 동요풍에서 후반부의 변박자에 이르러서 감정을 격화시킨 것이 퍽 효과적이다.
박태준 (朴泰俊 1900~1986)
작곡가·합창지휘자. 대구 출생. 대구계성학교를 거쳐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법을 배워 동요의 초창기 작품인 《가을밤》 《골목길》 등을 작곡하였다. 졸업 후 마산의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시인 이은상과 함께 《동무생각》 등 예술가곡 형태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1932년 이후 미국의 터스컬럼대학과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합창지휘를 배우고 합창지휘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5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를 설치하고 음악대학 학장을 지냈다. 68년 이후 한국음악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서울음악제를 창설하였다. 작품은 동요 등 150여 곡이고, 문화훈장·서울시 문화상·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작곡가 박태준(朴泰俊)은, 1900년 대구 동산동에서 태어나 1986년 10월 20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개신교집안에서 자라났고 역시 개신교계 학교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었다.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하고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노산 이은상이 같은 학교에 국어교사로 재직하였으며, 두 사람은 서로 교분이 두터웠다.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대구제일의 명문여학교인 경북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한 여학생을 무척 사모했으나 내성적인 성품 탓에 말 한마디 못했다고 한다.
노산이 이 얘기를 듣고 “잊지 못할 그 소녀를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켜 그 곡 안에 담아 두면 박 선생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나?” 하고 즉석에서 시를 써서 건넨다. 박태준이 살던 대구 ‘동산동’은 동산이 하나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동산엔 미국에서 온 세 선교사의 사택이 자리하고 있고, 또 그들이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 최초로 심은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그 사과나무의 자손목이 남아 있지만 대구가 사과의 고장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 분의 선교사들이 살기 위해 지은 집은 모두 2층 양옥으로 지금은 지방유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으며, 그 집의 담벼락엔 하나같이 푸른 담쟁이넝쿨이 휘감아 오르는 고풍스런 멋을 자랑한다.
곡의 가사에 보이는 ‘청라언덕’이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서 박태준이 살던 동네언덕을 지칭한 말이다. 한 가지 더 기가 막히는 표현은 그가 짝사랑하던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경북여고)의 교화가 백합화이기 때문에 가사에 등장하는 백합화는 바로 그 여학생을 두고 한말이다. 그러면서도 ‘짝사랑’이니, ‘연인생각’이니 하는 통속적인 말을 삼가고 그저 ‘동무생각’(처음엔 ‘사우(思友)’라고 함)으로 명명한 것을 보면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청라언덕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으나, 대구 계산성당에서 길을 건너 대구 제일교회가 바라 보이는 정면에서 왼편으로 난 계단길이 가장 운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