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글/시

이 환장할 봄날.....박 규리

조용한ㅁ 2009. 5. 17. 23:32

1995년 『민족예술』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규리 시인의 첫 시집이다. 8년여 동안 전북 고창 미소사에서 공양주로 절 살림을 맡아온 시인은 뛰어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성과 속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깨달음을 얻는 자의 내면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시문법 또한 주목할 만하다.

 

 ◆


*
요즘은 대통밥 해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나무는 한꺼번에 다 큰다.
한꺼번에 다 커놓고 두고두고 안으로 여문다.
대나무는 키만 크려고 자기 인생을 탕진하지 않는다.
텅 빈 속을 평생을 두고 살찌운다. 크게 비고, 힘껏 단단해진다.
대통밥을 해먹으려면 햇대로는 어림없다.
대통에 찹쌀을 넣고 장작불을 지피면
금방 타버리거나 쩍쩍 금이 가서
당최 밥은 되지 않고 망치기 일쑤다.
묵은 대는 속이 차고, 비어 있다.
거기에 소중한 밥을 지어먹는 맛이 있다.
나는 대나무가 좋다. 오래 늙어가며 텅텅 비고 싶다.
그동안 돌보아주신 선생님들과, 아직 쌀도 제대로 안치지 못할 햇대 같은 작품을 선뜻 받아주신 창비의 관계자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2004년 2월
박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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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향 사태
 

글쎄 웬 아리동동한 냄새가 절집을 진동하여
차마 잠 못들고 뒤척이다가
어젯밤 산행(山行) 온 젊은 여자 둘
대체 그중 누가 나와 내 방 앞을 서성이나
젊은 사미승 참다못해 문을 여니
법당 뒤로 언뜻 검은 머리 숨는 게 아닌가
콩당콩당 뛰는 가슴 허리 춤에 잡아내리고
살금살금 법당 뒤로 뒤꿈치 들고 접어드니
바람처럼 돌담 밑으로 스며드는 아,
참을 수 없는……내……음……오호라 거기라고,
거기서 기다린다고 이번에는
헛기침으로 짐짓 기별까지 놓았는데
이 환.장.할.봄날 밤, 버선꽃 가지 뒤로
그예 숨어 사라지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걸
피차 마음 다 흘린 걸
밤새 동쪽 종각에서 서쪽 아래 토굴까지
남몰래 돌고 돌다가 저 아래 대밭까지 돌고 돌다가 새
벽 도량석 칠 때까지 돌고 돌다가 온 산 다 깨도록 돌고
돌다가 이제 오도가도 못해서 홀로 돌고 돌다가……천
리향, 천리향이었다니…
…눈물 핑 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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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친 길
 

나보다 더 지쳐
찬 바닥에 모로 누운
몸과 마음아

오늘은 너희들을
살며시 뉘어놓고
이 밤만은 나 홀로 다녀오리라

달빛이 옹기종기 몸을 녹이는 숲길과
바람이 지친 다리 주무르는 대숲 지나
저 홀로 생겨났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길을

오늘 밤만은 나 홀로 떠나야겠다
더이상 몸 때문에 마음이 눈물 흘리지 않고
더이상 마음으로 저 바람에 몸 베이지 않게

까까머리 숫별이 눈 부비며 새벽종 칠 때면
꿈결인 득, 아무도 모르게 돌아와 있을 테니

그때까지만이라도 고이 자거라
너희들과 가는 길은
이 세상 누구라도 가슴 치며 돌아볼 길
다시 걸어도 끝끝내 사무쳐 서러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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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立秋]


신새벽에 요사채 방문 열고 밖에 섰다
승복 한 벌 가을비에 젖고 있다
두 철째 묵언중인 젊은 납자(衲子)
가슴에 다 마르지 못한 것들 저리 많았는가
속살 베이도록 단단히 풀기 먹였는데
잠시 고개 돌리면
이 산중(山中)에서도 젖고 또 젖었다
두어라, 서둘러 걷을 일 없다
빳빳이 세웠던 풀기 다 빠져야
곧추선 허리 풀린다
그리운 이름 한 사발쯤 가슴으로 젖어야
이 겨울, 다시 눈 푸르게 넘기지 않으련
비 들이친다 문 닫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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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별

외로움도 오래되면 온몸 따스히 데워주는 것인지, 홀
로 뽑아낸 거미줄 같은 길이 달빛에 하얗게 내려앉는 밤
이면, 가슴에 그토록 사무쳤던 사람 아니 죽어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던 사람.......사람들, 하나씩 쓸쓸한 길을
따라 내게 찾아와, 벚나무 아래 삐걱이는 평상 위에 나란
히 걸터앉아, 목젖을 적시는 묵은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
기도 하다가, 붉은 홍시 위로 가을비 번져오는 신새벽,
오줌 누러 뛰어가면 오돌오돌 떠는 어깨 뒤를, 어느결엔
가 당신은 다가와 꿈껼인 듯 나를 감싸안기도 합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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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오는 이 이별은


이 나이에 오는 사랑은
다 져서 오는 사랑이다
뱃속을 꾸르럭거리다
목울대도 넘지 못하고
목마르게 내려앉는 사랑이다

이 나이에 오는 이별은
멀찍이 서서
건너지도 못하고
되돌이키지도 못하고
가는 한숨 속에 해소처럼 끊어지는 이별이다

지금
오는

이별은
다 져서 질 수도 없는 이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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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그늘


먼산바라기만 하던 스님도
바람난 강아지며 늙은 산고양이도
달포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누울 묘자리밖에 모르는 늙은 보살 따라
죄 없는 돌소나무밭 돌멩이를 일궜다
문득,
호미 끝에 찍히는 얼굴들
절집 생활 몇 년이면 나도
그만 이 산그늘에 마음 부릴 만도 하건만,
속세 떠난 절 있기나 한가
미움도 고이면 맛난 정이 든다더니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하필 그리워져서
눈물 찔끔 떨구는 참 맑은 겨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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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말리며


선물로 받은 꽃다발을 동생이 벽에 걸어놓았다
말려놓고 보아도 독특한 운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매달린 꽃송이들이 내겐 영 마음에 걸
린다
안쓰러워 물 몇 방울 얹어주었더니
그늘에서 물기 없이 오래 말려야 그 태가 좋다고
내 손의 물컵을 낚아채며 동생은 난리다
만개하다가 꽃답게 떨어져 죽는 일도 쉽지 않구나
가늘게 남은 생명이 검게 변하면서 오래오래 죽어가는
모습
나의 하루도 어디선가 줄기가 잘리고 어디엔가 매달려
천천히 죽어가는 것은 아닌가
물 한방울 피 한방울 남지 않고, 나는
지금 얼마나 꼬득꼬득 잘 말라가고 있는가
불현듯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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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꽃 피기 전에


그대는 내 새끼다 내 속으로 낳아, 피 묻은 탯줄 내 이
로 끊은, 끊없는 절망 끝에서 뒹굴다 뒹굴다 내가 품은
넋이다 서러운 사랑이다 고양이처럼 울부짖으며 갓꽃 피기 전
에. 골백번 혀를 깨물어도 내 그대를 사랑한 적 없으니
죽어도 죽어도 허리춤에 다시 꿸 핏덩어리, 내 새끼야 갓
꽃 필라, 어여 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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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제 얼굴 제가 만든다는 말 무엇인가 했는데
지울 수 없는 사연 건너뛰지 못한 세월
골골이 주름으로 잡혀 내 얼굴이 되었다
웃음 하나에 주름 하나 서러움 하나에 주름 하나
이렇듯 살가운 사정과 스산한 과거 내게도 있었는가
누군가에게 몸 버리고 떠돌던 흔적과
양민간 깊이 팬 상처

그러나 생각하면,
내 주름은 또 다른 누구의 주름이 아니었으리
나 때문에 눈물 흘리던 사람이여
나 때문에 섧게 섧게 속 태우던 사람이여
내 철없는 욕심과 부질없는 사랑이
상처 한줄 그을 줄 차마 어찌 알았으랴

언제부터였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란
주름과 주름이 섞이는 일이라는 걸 짐작한 뒤부터
내가 먼저 한줄 주름으로 눕게 될까봐
그대에게 다시는 돌이키지 못할 깊은 주름으로
쓸쓸히 접히게 될까봐
짐짓 딴전이나 피우다
먼데로 말꼬리 흘린 적 참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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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그 고독한 탄생 앞에서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것이 분명하다
어디에 낳았을까 구경 좀 하려고 따라가면
고양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겁을 준다
멋모르고 근처를 얼쩡대던 강아지는 벌써
등짝에 피가 나도록 할퀴어버렸다
새끼만 낳으면 녀석은 뵈는 게 없다
그래, 가물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에서 홀로 치러냈을 그 뜨거운 공포와
황홀한 두려움을 생각한다
그 고독한 탄생 앞에 나는 목이 메인다
눈동자는 고통 속에서 더욱 형형하고
날선 발톱은 이제 다시
아무것도 놓지 않으리라
산고에 털이 다 빠진 녀석을 보며
고요히 내 가슴이 푸르게 멍든다
살아남은 것 외에
나의 생애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냐
그래 스스로 새끼들을 앞세워
당당하게 올 때까지
눈만 뀅하니 치켜뜬 녀석을
다시는 따라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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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부능선


산 아래 마을에서는 정말로
투명한 날개 키우는 사람 있을지 모르겠다
누구나 인생이 반쯤 익을 무렵이면
억센 다리를 기르거나
부리로 싸우는 법을 익히기도 한다는데
친구는 조용한 산중에 와선
숨겨온 날개 아무도 모르게 뻐근하게 폈다간
아, 하룻밤 참 잘 말렸다면서 돌아간다
나는 도대체 하루 만에 어떻게
날개가 투명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주먹 불끈 쥐고도 속고 속다보면, 차라리
마음이 날개보다 가벼워져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날개는 소중한 것일까
누구나 날개를 가져야만 행복해지는 걸까
나의 등은 딱딱하게 굽었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가을이면 카메라를 들고
산에 올라 벌새를 찍던 친구도
요즘은 서울 거리를 헤매며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고 한다
주로 몰래 숨어 사는 사람들의 등을
찍고 다닌다고 한다
어둔 암실에서 인화를 하다보면
어떤 이의 등에서는 진짜로
투명한 날개가 퍼득이더라고 한다
눈부셔, 눈이 부셔, 숨이 콱 막히더라고 한다
정말로 신기한 일들은 모두
산 아래 마을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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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 본 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마음이 가겠나. 마음이 가지 않 는데 무슨 그리움이 파꽃처럼 싹트겠나. 파꽃처럼 쓰리고 아픈 향 뭐 때문에 피워올리겠나. 향이 없는데 팔뚝을 타고 혈관에 지져댈 뜨거움 어딨겠나. 하아 아픔이 없는데 타고 내릴, 온몸을 타고 내릴 눈물이야 당최 어딨겠나, 동안거 뜨거운 좌복 위에. 내가 없어서 그대도 없는데, 이제 와서 싸늘한 비구 이마 위로 울컥울컥 솟구치는 이 신열은, 그런데 이 신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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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잠

 

사지 처억 늘어뜨리고 어린 조카가 자고 있다

온몸의 힘 다 버렸다, 버린 마음조차 모른 채

 

그, 야, 말, 로, 자, 고, 있, 다

 

잎과 줄기 하나씩 떨굴 때마다

뿌리 더욱 굵어지는 나무처럼

아! 버릴 때에야, 비로소 모아지는 힘!

슬며시 회양목같이 뻣뻣한 내 몸 만져본다

 

명치끝에 돌덩어리 같은 이 일생(一生), 뭐꼬?

 

겁도 없이, 세상을 쑥쑥 뚫고 오르는

가장 착하고 무서운 잠을

어린 조카가 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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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한 알로 사는 법

 

 

황사가 산을 뒤덮은 날

눈에 죽염수를 넣고 울다

 

사람이 밟아선 한치도 낮출 수 없는 산

한줄 작열하는 햇살에

갈가리 부서졌다

만리허공을 날아 살아 있는 것들은

모조리 덮고 있다

어떤 무서운 힘이 이토록 고요할 수 있던가

 

몸으로 맞섰던 바람 속에서

그랬다, 나는 한치도 무너지지 못했다

가슴 아픈 세상 한뼘도 덮어주지 못했다

 

더이상 버릴 것 없는,

다시 돌아설 곳 없는 막막한 산 위에 서서

이제야 한 알 모래로 부서져

오장육부를 뒤덮고, 온몸을 흐르기 시작하는

사막이 된 것은 아니냐

 

이제 내 불모의 땅에

한줌 풀씨를 떨어뜨리지는 않겠다

 

모래 한 알에 깃들인 세상이

눈물겹게 일어섰다 사라지는 장관을 바라보며

모래 한 알로,

아주 작게 사는 법을 천천히 생각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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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의 힘

 

 

오랜만에 창을 여니

거미줄이 나의 방을 눈부신 빗장으로 채워놓았다

눈물보다 강한 제 몸의 뿌리를 하늘 향해 거침없이 뻗

어올렸다

믿을 수 없다

거미가 이 넓은 세상을 온몸으로 거머쥐는 법

 

오직 단 한 줄로 엮은 이 슬픈 족쇄의

시작은 어디이고, 그 끝은 도대체 어디인가

 

두려움에 떨리는 손으로 미리 끊어내지만 않는다면

기다림에 지쳐 이 무정한 끈을 먼저 놓지만 않는다면

아직도 나도, 쉿!

 

조금은 더 숨죽여 기다릴 게 남은 것 아니냐

문득, 이 자리에서

끊길 듯 끝나지 않는 내 사무친 노래 볼 수 있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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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방죽

 

 

너와 함께 이 바닥에서 썩고 싶다

푹푹 썩어 진흙탕이 되고 싶다

 

진저리치게 끓어오르던

그리움과 분노와 견딜 수 없는 욕정

 

네가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흐르는 동안

나는 뼛속까지 깊이 썩었다

 

아무래도 한생쯤 더 썩어야겠다

문드러져 문드러져 척척 고여야겠다

 

이 흙바닥 위로 너는 맑게 흘러라

게으름 피우지 말고, 빨리 흘러라

 

내 영혼의 썩은 물이 서서히 흘러, 닿기 전에

한줄기 내 더러운 눈물이

너의 푸른 살에 섬뜩, 닿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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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한낮...

 

 

치자꽃 흐드러진 계단 아래 반달이랑 앉아
하염없이 마을만 내려다본다
몇 달 후면 철거될 십여호 외정 마을
오늘은 홀로 사는 누구의 칠순잔친가
이장집 스피커로 들려오는
홍탁에 술 넘어가는 소리,
소리는 계곡을 따라 산으로 오르지만
보지않아도 보이고
듣지않아도 들리는
그리운 것들은 다 산 아래 있어서
마음은 아래로만 흐른다
도대체 누구 가슴에 스며들려고
저 바람은 속절없이 산을 타고 오르느냐
마을 개 짖는 소리에
반달이는 몸을 꼬며 안달을 하는데
나는 어느 착한 사람을 떠나 흐르고흐르다가
제비집 같은 산중턱에 홀로 맺혀 있는가
곡진한 유행가 가락에 귀쫑긋 세운 채
반달이보다 내가 더 길게 목을 뽑아 늘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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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한 사발


나도
언제쯤이면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
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
온몸으로 스밀
죽, 한 사발 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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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물꼬


내 안에 물을 가둔 지 사년째
책 한줄 안 보고 잘 놀았다
산을 찾아온 이형은 물었다
그렇게 오래 노느라 지겹지도 않수
마침 달빛이 뼛속까지 환해서
나는 짐짓 생각난 듯
내 안의 물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썩은 낙엽과 이끼 낀 때,
언뜻, 그 사이로 말라붙은 바닥이 보였다

"얘야, 어서가자 이곳은 물이 얕아
배 댈 곳이 못 되는구나"

조주 선사가 말하자 동자가 짐을 꾸렸다는
이 바닥이 나의 전부다, 생각하며
이형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봤다
검은 상수리나무 사이로
서럽지만 환한 속살 같은
새벽 운무 피어오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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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의 집


눈보라 속 혹한에 떠는 반달이*가 안쓰러워
스님 목도리 목에 둘러주고 방에 들어와도
문풍지 웅웅 떠는 바람소리에 또 가슴이 아파
거적때기 씌운 작은 집 살며시 들쳐 보니
제가 기른 고양이 네 마리 다 들여놓고
저는 겨우 머리만 처박고 떨며 잔다
이 세상 외로운 목숨들은 넝마의 집마저 나누어 잠드는 구나
오체투지 한껏 웅크린 꼬리 위로 하얀 눈이 이불처럼 소복하다


*절에서 키우는 잡종개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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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자여 사리자여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지
어감과 의식도 없으며(...) 무명도 무명이 다함도 없고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할때까지도 없으
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
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고 없을
것도 없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
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그러므로 온갖 괴로움을......"*

......스니임, 눈 와요. 삽 가져와라. 네.눈 많이 와요
모자 단단히 쓰고 나와라, 네에......

사리자여......
사리자여......

* "우리말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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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무당 두 사람이 산기도를 왔다가
느닷없는 가을비에 떨며 서성이다가
해가 져 할수 없이 암자에 들어
스님, 마당에서라도 하룻밤 묵어 가면 안될라우?

 

 꾸벅꾸벅 졸던 스님 뛰어나가
" 아이고, 어서 오소! 공양부터 드시오."
나에게 밥 차려 오라는 눈치다.

 

"저녁은 해드리겠으니 잠은 잘 곳 없으니
저 아래 마을 여관 가서 자시오"
나는 맵게 말을 끊었다

 

사람 좋던 스님
처마 끝으로 후득후득 비 긋는 소리
무심히 듣고 섰더니,
혼잣말인 듯 한숨인 듯...
"....따스한 방안에서
여지껏 비에 젖지 않은
자네가 마을 여관 가서 자고
한비에 온몸 젖은 사람들은
따스한 이불 피고 방안에서 주무시게....."

 

빗물이 계곡을 덮쳤다.
가을비에 웬 천둥까지 내리는지...

 

그날 밤 , 나는 여인 둘과 한방에 나란히 누웠다.
쓸쓸한 참회의 잠이 고즈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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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스님의 방석

 


노스님의 방석을 갈았다 솜이 딱딱하다
저 두꺼운 방석이 이토록 딱딱해질 때까지
야윈 엉덩이는 까맣게 죽었을 것이다
오래 전에 몸뚱어리는 놓았을 것이다
눌린 만큼 속으로 다문 사십년 방석의 침묵
꿈쩍도 않는다, 먼지도 안 난다
퇴설당 앞뜰에 앉아
몽둥이로 방석을 탁, 탁, 두드린다
제대로 독 오른 중생아!
이 독한 늙은 부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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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어딨노 경(經)

 


하늘이 두 쪽 나도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땅이 두 번 갈라져도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하,세상이 왕창 두 동강 나도 하마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이 가슴 두 쪽을 지금 쫘악 갈라보인다 캐도
참말로 당신은 내 맘 모를 깁니더
……

술 깼나 저녁 묵자

 

 

**위 시는 참 재미있다. 경(經)이 뭐 별거냐? 삶의 간절한 바람 그것이 바로 경이다, 라고 그는 말하는 듯 하다. 짧은 위 시는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첨층적 어법으로 짜여진 1연이  설움과 한(恨)이 맺힌 지어미의 말이라면, 2연은 앞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어미를 조용히 달래는 지아비의 따스한 한 마디 말로 되어있다. 두 대화 사이에는 문장 부호 "……"처럼 시간이 한참 흐른 후다. 세상 남자들이여, 지어미의 말이 가슴속에 쌓여 한(恨)이 되지 않도록 할지어다. 그들의 한 서린 말을 바깥으로 불러내어 함께 할 일이다. 生의 젖은 말들을 화창한 햇볕에 널어 말리자.-이종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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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말리며

 

 

선물로 받은 꽃다발을 동생이 벽에 걸어놓았다

말려놓고 보아도 독특한 운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매달린 꽃송이들이 내겐 영 마음에 걸린다

안쓰러워 물 몇방울 얹어주었더니

그늘에서 물기 없이 오래 말려야 그 태가 좋다고

내 손의 물컵을 낚아채며 동생은 난리다

만개하다가 꽃답게 떨어져 죽는 일도 쉽지 않구나

가늘게 남은 생명이 검게 변하면서 오래오래 죽어가는 모습

나의 하루도 어디선가 줄기가 잘리고 어디엔가 매달려

천천히 죽어가는 것은 아닌가

물 한방울 피 한방울 남지 않고, 나는

지금 얼마나 꼬득꼬득 잘 말라가고 있는가

불현 듯 목이 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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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변소간의 비밀

 

 

십년 넘은 그 절 변소간은 그동안 한번도 똥을 푼 적 없었다는데요
통을 만들 때 한 구멍 뚫었을거라는 등 아예 처음부터 밑이 없었다는
등 말이 많았습니다 변소간을 지은 아랫말 미장이 영감은 벼락맞을
소리라고 펄펄 뛰지만요,하여간 그곳은 이상하게도 냄새도 안 나고
볼일 볼때 그것이 튀어 엉덩이에 묻는 일도 없었지요 어쨌거나 변소간
근처에 오동나무랑 매실나무가 그 절에서는 가장 눈에 띄게 싯푸르고요
호박이랑 산수유도 유난히 크고 훤한 걸 보면요 분명 뭐가 새긴 새는
것이라고 딱한 우리 스님도 남몰래 고개를 갸우뚱거리는데요 누가 알겠어요,
저 변소는 이미 제 가장 갚은 곳에 자기를 버릴 구멍을 스스로 찾았는지요
막막한 어둠속에서 더 갈곳 없는 인생은 스스로 길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어서요 한줌 사랑이든 향기 잃은 증오든 한 가지만 오래도록 품고
가슴 썩은 것들은 남의 손 빌리지 않고도 속에 맺힌 서러움 제 몸으로 걸러서,
세상에 거름 되는 법 알게 되는 것이 어서요 십년 넘게 남몰래 풀과
나무와 바람과 어우러진 늙은 변소의 장엄한 마음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만도 하지만요 밤마다 변소가 참말로 오줌누고 똥 누다가 방귀까지
뀐다고 어린 스님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저 구미호 같은 보살 말고는,
그 누가 또 짐작이나 하겠어요

 

나도 개나리가 필쯤의 봄 부터는 "미치고 환장할 날씨"라고 씨부렁대곤 하는 습관이 있는데, 봄을 환장할 날로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지, 박 규리의 시도 이 환장할..에서 만났다. 이미 "달빛 한 줌"에서 공감을  감지한듯 나는 그녀의 시를 스크랩 해 두었었고, 오늘 또 다른 시를 만나, 박 규리를 검색창에 썼었다.

다른 어떤 이들처럼 쉽사리 눈에 띄었더라면, 두어편 옮겨 쓰고 말았을지도 모르지만, 검색창 어디에도 박 규리라는 연예인만 가득할 뿐 시 쓰는 박 규리는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네이버의 검색창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거기서 겨우 스크랩을 허용한 불로그를 만나 나의 네이버 불로그에 스크랩 한 후 복사 해 여기에 옮겼다.

막연히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 진다.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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